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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즈의 마지막 적자(嫡子), '바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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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타이거즈의 마지막 적자(嫡子), '바람의 아들'

[별을 쏘다⑮]한국 프로야구의 '캡틴', 이종범

2006년 3월 14일. "딱~" 하는 강력한 파열음과 함께 "우리가 이겼다"라고 시위를 하듯 두 팔을 번쩍 치켜 들며 다이아몬드의 첫 번째 베이스를 향해 거침없이 뛰쳐나가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바람의 아들' 이종범. 강력하다 못해 세계를 향해 울리던 그 시원스런 소리는 자신의 가슴 한켠에 깊숙하게 응어리졌던 한(恨)을 풀어내는 소리였으며 극일(克日)을 실현하며 전 국민의 한(恨)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또 하나의 소리였다. 그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50여년 이상 앞서 프로야구를 시작했고 30년 이상 앞서 있다고 자부했던 일본 야구를 꺾는 경쾌한 소리. 세계 무대에 대한민국 야구의 힘을 보여주는 그 경쾌한 소리.

역사적인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축구 대표팀이 이루어냈던 세계 4강 신화를 4년이 지난 2006년에 야구 대표팀이 다시 한번 재현하게 되리라는 것을 과연 우리는 상상이나 했는가? 물론, 역사가 깊고 많은 국가가 참가하는 축구 월드컵과 이제 첫 번째에 불과한 야구 월드컵을 동일선 상에서 비교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필자는 잘 안다. 하지만 국민들의 대표팀에 대한 관심과 격려, 그리고 응원, 이에 따른 선수들의 노력은 정말 값지다는 의미에서 비교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우리 야구의 역사보다 길고 수준이 높으며 선수들의 가치 또한 비교할 수 없는 국가와 선수들을 상대로 당당하게 맞서 전세계 야구팬들에게 한국 야구의 존재감을 이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로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우리 국민들은 또 얼마나 큰 환호성을 질렀겠는가?
▲2006년 WBC 한·일전에서 안타를 친 뒤 기뻐하는 이종범 선수. ⓒ프레시안

세계 4강, 한국 야구의 쾌거와 캡틴 이종범

지난 2006년 첫 번째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대한민국은 30여 년 이상 수준 차이가 난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 야구를 누르고 100년 이상을 앞서 시작한 야구의 종주국, 미국마저 누르며 4강의 신화를 연출하였다. 당연히 4강 신화의 주역은 함께 노력하며 고생한 김인식 감독 이하 모든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그리고 국내에서 뛰는 스타 선수들이 즐비한 대표팀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고 과거와는 다르게 대표팀에서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 2006년 WBC에 참가하는 스타 선수들에게 어떠한 대가나 혜택 등에 대해 결정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비시즌 동안 부상을 무릎 쓰고 대회에 참가하라는 것 자체에 무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두산의 김동주 선수는 예선전에서 당한 어깨 부상으로 인해 2006년 시즌을 뛸 수 없게 됨으로써 FA 자격 획득이 다음 시즌으로 늦춰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어떠한 제도적 혜택도 받지 못하고 2007시즌이 끝난 후 FA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자신의 몸을 중요시할 수 밖에 없는 프로 선수들에게 별다른 대가나 혜택 없이 오직 국가만을 위해 태극마크를 달고 '국위선양' 하라는 진부한(?) 목표를 제시하기에는 많은 제약과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대회 기간 중 좋은 성적과 여론에 의해 병역혜택이라는 당근이 결국엔 주어지긴 했다.) 하지만 그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선 스타 선수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되는 리더십을 발휘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한국야구 대표팀의 캡틴 이종범이다. 한-일 월드컵에서의 홍명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1980년대와 광주, 그리고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적자(嫡子)

1980년대는 우리 현대사의 큰 사건 중의 하나인 5.18 광주 항쟁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 함께 제5공화국이 시작됐고 그 후로 광주를 포함한 전라도는 탄압과 차별의 시대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태생적 장애'를 미화하기 위해 제5공화국은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 관심을 회피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펴기 시작하는데 그 유명한 '3S 정책'과 함께 컬러 방송 또한 송출을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자신 있게 그들이 내세웠던 정책 중의 하나는 스포츠의 프로화였다.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민속씨름과 프로축구가 나란히 출범했고 프로스포츠가 텔레비전의 황금 방송 시간대에 전진 배치되는 기쁨도 누리게 되었다.

제5공화국의 시작과 함께 가장 큰 핍박과 차별, 멸시를 넘어 탄압을 받았던 도시, 광주에서 프로야구의 역대 최강팀인 해태 타이거즈가 탄생했다는 것은 비장감마저 감돌게 한다. 프로야구에 참여한 6개의 구단 중 가장 어렵게 전라도 광주를 거점으로 '해태' 라는 기업이 연고권을 갖고 프로야구에 뛰어들었지만 재정적으로도 열악하고 급작스럽게 야구단을 구성하다보니 창단 멤버의 숫자는 14명에 불과한 초미니 프로야구단으로 탄생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년이 지나고 광주일고, 광주상고, 군산상고 등 70년대 고교야구를 주름잡던 연고지역의 선수들이 하나, 둘 가세하면서 해태 타이거즈는 점차 강팀의 위용을 보였고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통산 9번의 우승을 경험하게 되는 한국 프로야구 최강의 팀으로 거듭나게 된다. 아마도 미국에 뉴욕 양키즈, 일본에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있다면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이런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무적의 팀이 아닌가 할 정도로 그들의 위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해태 타이거즈가 이런 강팀의 위력을 지닌 것 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제5공화국의 시작과 함께 정치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던 호남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과 힘'을 주었다는 것이다. 금기시 되었던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마음껏 연호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 야구장이었고 그들의 마음 속에 응어리진 한(恨)을 토해낼 수 있었던 곳도 바로 야구장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탄압을 멋지게 복수해주는 것은 바로 해태 타이거즈 전사들이었던 것이다. 많은 호남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전국 각지로 흩어졌지만 오히려 이것은 해태 타이거즈에겐 큰 약으로 작용하였는데 어느 구장에 가서 어느 구단과 경기를 하더라도 마치 해태의 홈구장을 방불케 할 정도의 응원과 함성이 메아리쳤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그들이 얼마나 해태 타이거즈를 통해 그들의 삶을 대변코자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태 타이거즈가 호남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려운 재정난 속에서도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펼쳐내는 승부에 해태 타이거즈 특유의 응집력, 무서운 정신력, 그리고 선-후배간의 위계질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했고 그것이 고스란히 경기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호남의 한(恨)을 대신했던 선수들이 하나, 둘, 그라운드를 떠나기 시작했고 또 다른 선수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하는데 그 중 1993년에 입단한 이종범은 1980년대 무적 시대를 이끌었던 해태 타이거즈의 강함을 보여주고 그 전통을 잇기에 충분한 선수였다. 그는 입단한 1993년과 1996년, 1997년까지 총 9번의 우승 중 마지막 3번의 우승을 함께 했다. 1980년대 호남의 암울한 상황을 대변해주었던 해태 타이거즈, 그 해태 타이거즈와 마지막을 함께 했던 유일한 선수가 이종범인 것이다. 바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적자(嫡子) 이종범.

광주일고, 건국대를 졸업한 유격수 이종범은 무적의 팀, 해태 타이거즈에서 1993년 시즌에 9번타자 유격수로 프로에 첫 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몇 경기 지나지 않아 부동의 1번 타자였던 이순철을 밀어내며 타이거즈의 1번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시즌이 끝나고 그가 차지한 것들은 무수히 많았다. 신인으로서 당시 롯데의 전준호와 벌였던 도루왕 대결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물론 아쉽게도 얼마 전 2000안타의 대기록을 달성한 삼성의 양준혁에게 일생에 한번 뿐인 신인왕 타이틀은 내줘야 했지만 신인으로써 유격수 골든글러브와 한국시리즈에서 팀을 통산 7번째 우승과 자신의 첫 번째 우승으로 이끌면서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이때부터 이종범은 '야구 천재'의 별칭을 얻게 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된다.

하지만 1994년 이종범은 또 하나의 별칭을 얻게 된다. 바로 '바람의 아들'. 그는 1994년 자신이 왜 야구 천재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면서 한국 프로야구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타격 1위(0.393), 최다안타 1위(196개), 도루 1위(84개), 득점 1위(113점), 출루율 1위(0.452), 장타율 2위(0.581), 홈런 4위(19개), 타점 5위(77점)가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1994년에 세운 기록이다. 최다안타와 도루 부문의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2년차에 불과한 젊은 선수가 세운 기록이라고 보기에는 정말 믿기지 않는 기록이었기 때문에 시즌 MVP는 당연히 그의 차지가 되었다.

불과 2년 만에 리그를 초토화시키며 점령해 버린 그의 야구 능력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고 타율 4할과 200안타에 대한 아쉬움은 아직까지도 야구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과연 어떤 선수가 이종범에 버금가는 기록으로 4할과 200안타에 감히 접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도루 84개의 기록은 언제쯤 깨질 것인가? 물론 기록은 깨지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쉽지 않은 대답이고 최근의 프로야구를 냉정하게 분석했을 때, 팀 당 경기수가 늘어나지 않는 이상, 이 기록에 범접할 수 있는 선수는 쉽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후 1996년과 1997년, 해태 타이거즈에게 두 번의 우승을 더 안겨주면서 이종범은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호남의 아들에서 나고야의 아들로

이미 국보로 평가 받는 선동렬을 일본으로 이적시키며 재정난을 극복할 수 밖에 없었던 해태 타이거즈는 또 한번의 장고(長考)에 들어간다. 물론 리그 최고의 실력을 바탕으로 3번의 우승을 안겨 주긴 했지만 불과 5년 동안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이종범을 일본에 진출시키기엔 명분이 너무 부족했다. 제도적인 뒷받침도 없었고 11시즌을 활약하고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일본 진출에 성공한 선동렬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는 해태 타이거즈 뿐만 아니라 한국야구위원회(KBO) 또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난관에 부딪치는 결과를 낳았고 호남팬들의 입장에서도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적자를 일본에 내다 판다는 인식 때문에 적잖은 논란마저 일어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종범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적인 상황이 이종범의 일본 진출을 도울 수 있었다. 결국 재정이 탄탄치 못했던 해태라는 모기업을 갖고 있는 타이거즈에게 1997년 말에 찾아온 IMF 한파는 더욱 구단의 사정을 어렵게 만들었고 이종범을 일본의 주니치 드레곤즈에 트레이드 머니 4억 5000만 엔을 받고 이적시키고 말았다.
▲ 지난 2001년 귀국 기자회견을 갖는 이종범. ⓒ연합

최고의 전성기를 지내면서 일본 진출에 성공한 이종범은 '무등산 폭격기'에서 '나고야의 태양'으로 변신한 선동렬과 함께, '호남의 아들'에서 '나고야의 아들'로 거듭나 일본 열도를 공략할 요량으로 공격의 선봉에 나섰다. 1998년 시즌이 시작되고 이종범은 '야구 천재', '바람의 아들'이라는 그의 별명에 알맞게 뛰어난 일본 리그 적응력을 보이며 한국 야구의 수준을 마음껏 발휘한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일본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초반 3할대의 타율과 유격수로서의 수비 능력으로 좋은 평가를 받던 이종범이 그해 6월 23일 한신전에서 상대 투수 가와지리의 투구에 오른쪽 팔꿈치를 맞으면서 골절상을 입고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후 이종범은 3개월 가량의 공백을 가져야만 했고 그것이 일본에서의 시련을 알리는 서곡이 되었다. 9월 19일 복귀한 이종범은 1998년 67게임에 출장해 244타수 69안타(타율 0.283), 10홈런, 18도루, 29타점의 기록을 남기며 첫 시즌을 끝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종범은 일본 선수들의 집중 견제를 받게 되고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 일본에서의 프로 생활을 이어간다. 몸 쪽 공에 약점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오른쪽 팔꿈치 부상을 당한 후 내야 수비에서도 문제가 노출되고 일본 선수들에게 밀려 외야수로 전향하는 아픔까지 맛봐야 했다.

한국에서 최고를 달렸던 그가 부상 후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많은 시련과 아픔을 일본에서 겪어야 했던 것이다. 스포츠에서 '만약에' 라는 가정법은 통하지 않지만 이종범이 부상을 당하지 않고 그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이종범의 가치는 훨씬 상승했을 것이다. 그의 상승세에 발목을 잡은 부상과 그에 따른 후유증과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으며 이종범은 2001년 한국 복귀를 선언하게 된다. 아마도 이종범의 일본 생활은 그의 인생 중에서 어쩌면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프로야구를 경험한 야수로써 최초로 일본에 진출해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50년 이상 뒤처졌던 우리의 프로야구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주었다는 사실은 모두들 공감해야 할 것이다. 이종범의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승엽과 이병규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승엽과 다르게 이병규의 경우, 이종범의 전처를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에 씁쓸한 웃음이 지어진다.

해태에서 기아의 시대로 - 그 중심에 선 프로야구의 큰 형님

2001년 6월 15일 국내 복귀를 선언한 이종범은 약 한달 간의 훈련을 거쳐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한 기아 타이거즈에 새롭게 입단하며 고향으로 돌아온다. 2001시즌에 비록 45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지만 그의 가공할만한 야구 실력은 여전했고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빼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수많은 야구팬들을 야구장으로 다시 모이게 하는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종범의 복귀 이후 기아 타이거즈로 변모한 팀은 과거의 해태 타이거즈보다는 훨씬 넉넉한 재정 상태에서 선수들이 편하게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 해태 타이거즈의 끈끈한 응집력, 정신력, 위계질서 등은 사라져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1997년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을 한 이후로, 타이거즈라는 이름을 가진 구단은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이다. 통산 9번의 우승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기아 타이거즈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종범 ⓒ연합

그러나 이종범은 일본에서 복귀한 후, 한 팀의 리더이기 보다는 프로야구 전체의 맏형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시작된 야구의 드림팀은 그 후로도 많은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히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일본을 누르고 2회 연속 아시아 정상에 서는 쾌거를 이룬다. 이때 선수들을 아우르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종범이었다. 그는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 주장을 맡아 선수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함으로써 쉽지 않은 상대들인 일본과 대만을 꺾고 아시아 정상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 시작하면서 언급되었던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다시 한번 팀의 맏형으로서 동생들을 보듬어 안고 보살피면서 세계 4강 신화의 정점에 서게 된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참패를 겪은 한국 대표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간 국제대회에서 코리안 파워를 보여줬던 구대성, 이종범 등의 노장 선수들이 다시 한번 예비 엔트리에 포함됐다. 그들의 노련함과 맏형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기대 때문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 이종범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말이다. 2006시즌과 2007시즌을 겪으면서 이종범은 선수생활에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 2군행을 자청하여 한달 간의 일정으로 2군 훈련에 돌입했다. 만약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부활하지 못하면 그 이후의 결정은 그에게 맡겨야 한다. 하지만 1993년 같이 입단하여 한국 프로야구를 이끌며 얼마 전 2000안타를 달성한 양준혁처럼 조금 더 화려한 선수생활을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이종범, 그는 일본에서 큰 시련을 겪었지만 그냥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리 없고 무너져서도 안 되는 한국 프로야구의 보배이기 때문에 그렇게 싫어했던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다시 한번 화려하게 부활하는 '바람의 아들' 이종범의 모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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