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저녁 서울시청 앞에서는 20여명의 보수단체 회원들이 미국 버지니아 공과대학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촛불을 들고 버지니아 공대의 이니셜인 'VT'로 대형을 맞춰 서서, 성조기를 흔들면서 이들은 이번 사건이 한미동맹관계에 악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조직된' 보수단체의 촛불집회 외에도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22일 저녁 7시 서울시청 앞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집회를 열자는 자발적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날 촛불집회가 어느 정도 규모로 실제 열릴지는 미지수지만 이런 흐름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한국계 학생인 조승희(23) 씨의 총기 난사에 희생된 피해자를 추모하자는 뜻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날 지켜들 촛불의 의미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2002년의 촛불과 2007년의 촛불
촛불집회는 5년 전 미국 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여중생 효순·미선 양을 추모하기 위해 시작됐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한다"며 토요일이었던 2002년 11월30일 오후 6시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만나자는 한 네티즌의 제안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전파되면서 광화문 미 대사관 앞의 수 천개, 수 만개의 촛불로 현실화됐다.
그해 6월 월드컵을 계기로 대중에게도 익숙해진 '광장의 문화', 그동안 쌓여 온 불균등한 한미관계에 불만과 이라크 전쟁 등 갈수록 더해가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등을 배경으로 촛불집회는 당시 대선을 앞두고 엄청난 대중적 폭발력을 발휘했다. 심지어 "반미로 가서는 안 된다"며 여중생 사망사건이 여론화되는 것에 대해 경계하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직접 참가하겠다고 선언해 조갑제 씨 등 일부 보수계층으로부터 비난을 사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촛불집회는 5년이 지난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일상적 풍경이 됐다.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가 한국교포 1.5세라는 사실이 한국에 전해지고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 촛불집회를 열자는 제안이 나온 18일 저녁에도 촛불집회가 열렸다. 지난 1일 한미 FTA 협상 중단을 촉구하면서 분신한 노동자인 고 허세욱 씨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추모'가 아닌 '불이익'을 방지하자는 의미의 촛불집회
그런데 이번 총기난사 사건의 미국인 희생자를 위해 일부 네티즌들이 촛불집회를 제안했다. 가해자가 한국계이므로 "한국인으로서 이번 사태의 희생자와 유가족에 애도를 표하자"는 의미다. 무고한 희생자를 추모하자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해자의 국적과 무관하게 말이다.
하지만 사건 발생 초기에 가해자가 중국계 유학생으로 추정됐을 때에는 사실 이런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았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추모'의 물결이 일고 <조선일보> 사이트 등에 추모게시판이 개설된 것은 한국교포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다.
더군다나 이 촛불집회의 의미는 '추모'를 넘어서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교포 한명이 미국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를 한국인으로서 대신 사죄하자는 것이다.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이 사죄는 순수하게 가해자와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용서를 촉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번 사건으로 미국 내 한인들에 대한 보복 가능성, 한미관계 악화 등이 우려됨에 따라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촛불집회를 열자는 것이다. 소위 초강대국인 미국에 '찍혀서'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을 막자는 일종의 대가를 바라는 행위이다.
통치자들이 즐겨 말하는 '국익'처럼 애매모호했던 불안감은 일부 언론을 통해 구체화되고 증폭됐다. "'제2의 LA 폭동'이 우려된다" "미국 유학생들이 제대로 졸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등 미국 교포사회의 걱정에서부터 "비자면제 협정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어렵게 맺은 한미 FTA 협정의 미국 의회 비준이 가로막힐 수도 있다" 등 한미 간 현안에 이르기까지, 피부에 와 닿는 나와 내 주변의 문제가 됐다.
이같은 불안감은 이태식 주미 한국대사가 "희생자 유족은 물론 미국 사회 전체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자성하는 뜻으로 32일간 금식을 하자"고 한인사회에 제안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 하중근 씨, 허세욱 씨 등 국내 노동자·농민들의 죽음에 대해선 '침묵'하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날 이탈리아 총리와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직접 위로의 말을 전한 것에서도 마찬가지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앞서 청와대는 2번이나 이번 사건에 대해 '애도 메시지'를 발표했었다.
美정부 "이민자도 미국인"...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역효과
한때 정부차원의 조문단 파견도 검토됐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로부터 되돌아온 답은 'NO'였다. "미국은 다민족·다인종으로 이뤄진 국가다. 미국으로 이민을 왔더라도 미국 영토에 뿌리를 내리고 삶의 터전을 닦으면 그들은 모두 미국민이다. 그런데 모국이 나서 책임을 통감한다, 자성한다는 반응을 보이면 미국 정부로선 난감하다"는 것이다. 18일 오후 청와대가 "대통령 방미나 정부차원의 조문단 파견은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이같은 물밑 접촉의 결과로 알려졌다.
미국 언론도 여전히 범행 동기가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범행동기를 비롯한 조승희 씨 개인 문제도 한 축으로 다루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미국의 총기 소지 허용의 문제로 여론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결과적으로 가해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지 하루만에 한국사회를 휘감았던 '불안감'의 정체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잠정 결론났다. 오히려 '핏줄'이라는 단일한 잣대로 자국민을 나누는 한국사회의 폐쇄성과 한 개인의 문제를 개인이 속한 집단의 문제로 사고하는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 셈이 됐다. 이와 함께 강자 앞에선 지나치게 약한 한국인들의 고질병도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나아가 "한국사람에 대한 보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조승희 씨는 미국인"이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 천명에 따라 일단 근거없는 우려로 정리가 된 것이 씁쓸하다.
따라서 22일 촛불집회를 하자는 네티즌들 중 일부의 진심이 설령 순수한 '추모'에 있다 할지라도, 이런 배경과 반응들에 시선이 이르면 그 뜻과 효과는 전혀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다.
만약 진심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사회적 폭력에 희생되는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해 '추모'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번 일을 계기로 싹튼 것이라면 필리핀의 '정치적 살해'에 의한 희생자나 아직도 기아로 숨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촛불을 드는 것은 어떨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사건으로 숨진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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