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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역사적 전환을 예고하는 산별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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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역사적 전환을 예고하는 산별노조

창비주간논평 <5> '산별노조 전환'은 실질적 민주화 실현의 소중한 기회

1987년은 일반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부활시킨 6월항쟁과 6·29선언으로 기억되지만, 사실 그해 7~8월의 노동자대투쟁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울산의 10만 노동자들이 각종 중장비를 끌고 시청으로 행진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노동자시대의 개막을 실감할 수 있었다.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한국의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 강압적 노동통제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신들의 권리를 실현할 수단인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회의 구석구석으로 들불처럼 번져갔고 이때부터 한국사회는 형식적 차원에서나마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다. '87년체제'라는 용어는 1987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그 뒤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그 핵심적 내용은 정치적 민주화다.

그로부터 10년 후 한국사회는 또 한번의 커다란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그에 따른 대규모 구조조정의 충격 속에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평생직장'의 신화가 깨지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외환위기의 여파는 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구성된 대기업 노동조합의 고용안정 투쟁을 강화했고 이는 역설적으로 중소기업의 하청·비정규직의 양산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시점에서 한국사회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으로 노동시장이 분화되면서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몸살을 앓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를 핵심으로 한 87년체제의 한계가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의 동력으로 작용해 온 노동조합이 정규직 노동자의 기득권을 지키는 이기적 집단으로 비난받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가운데 형성된 '나쁜 균형'은 한국사회의 전망을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지난 6월 30일, 1987년과 1997년에 비견될 만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금속노동자들이 조합원 투표를 통해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한국경제를 대표하는 주요 대기업 노조들이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중소기업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더불어 산별노조라는 동일한 조직에 함께 참여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세계 노동운동사에서도 유례없는 일이다.

세계적으로 기업별노조는 일본과 한국뿐인데 일본이 1950~60년대에 추진하다가 실패했던 산별노조를 한국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달성한 것이다. 산별노조 전환 선언은 막다른 국면에 처한 87년체제의 한계를 새롭게 돌파해내는 역사적 사건이다. 올 10월에 본격적으로 출범할 산별노조는 한국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실현해갈 민주화의 새로운 동력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물론 산별노조의 미래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수십 년간 익숙했던 조직형태인 기업별노조의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산별노조 출범과 관련된 여러 쟁점들이 명확하게 해결될지도 불확실하다. 예컨대 금속노조를 단일노조로 운영할 것인가 아니면 자동차와 전기전자 등 비교적 동질성이 큰 업종별로 운영할 것인가? 단체교섭에서 기업별 차원과 산별 차원의 의제를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 단체교섭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것인가?

이처럼 많은 난관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복지에서 누리던 기득권을 양보하면서까지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에 협조할 것인가를 두고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다. 최악의 경우 임금격차의 완화를 통해 조합원간의 연대를 실현하려는 산별노조에 반발하여 대기업 노조가 탈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는 산별노조에 대해 미리부터 비관적으로 전망할 필요는 없다. 지난 2003년 산별노조 전환 투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교육과 연대활동을 통해 3년 만에 가결을 이끌어낸 활동가들의 지혜가 발휘된다면 산별노조의 성공적 건설과 운영도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반 노동자들 또한 산별노조 전환을 계기로 고용안정과 임금인상에만 집착했던 관성에서 탈피해 자신들이 속한 기업과 지역, 나아가 사회 전체로 따뜻한 관심과 적극적 참여를 확대해가야 한다. 이제 조합원들은 더이상 임금노예로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 자신의 시민권을 획득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산별노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일노조가 될 금속노조의 사용자에 해당하는 대기업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수적이다. 대기업들은 산별노조를 현실로 인정하고 단체교섭에 임할 사용자 대표조직을 서둘러 마련할 필요가 있다. 선진국의 경험은 산별노조가 사용자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조직형태임을 보여준다. 노조 또한 국민경제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무분별한 파업을 자제할 뿐 아니라 교섭비용 자체도 일종의 '규모의 경제' 효과에 따라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에서 나타나는 교섭권한의 분권화 움직임은 기업간 차이를 일정하게 반영함으로써 산별노조의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것이지 산별노조 자체를 포기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의 사용자들은 선진국의 산별노조 경험을 적절하게 참조하여 산별교섭에 적합한 사용자 대표조직과 효율적인 교섭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 역시 산별노조로의 전환에 따른 제도적·법적 인프라를 신속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 노조측에서 반대하는 기존의 노사관계 로드맵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민주노총의 참여로 실질적 힘을 얻은 노사정 대표자회의의 틀 안에서 노사 양측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노사관계 발전방안을 마련하고 산별노조에 상응하는 제도적·법적 지원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서서히 산별노조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산별노조 교섭이 모쪼록 87년체제를 넘어 노동자들의 연대와 통일,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 전체의 실질적 민주화를 실현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http://www.changbi.com/weeklyreview)' 7월 18일자에 실린 것으로 창비 측의 양해를 얻어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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