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 '칸'에서 스크린쿼터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연일 들려오고 있다. 시작은 배우 최민식이었다. 최민식은 지난 5월 18일(현지 시각), 칸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팔레 전용관 앞에서 "할리우드가 아닌 희망을 세계화하라. 모든 문화는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1인 시위에 나섰다. 이틀 뒤인 20일 오후 8시 반, 같은 장소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한국과 해외의 영화인 150여 명이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촛불집회를 열었던 것이다. 곧이어 다음 날인 21일 오전, 칸영화제 운영위원회는 정기 이사회를 통해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에 공식적인 지지의 입장을 표명했다.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이 '전세계' 영화인의 관심과 지지를 얻고 있는 지금, 서울 광화문 열린시민광장의 분위기는 어떨까? '스크린쿼터 사수, 한미FTA 저지를 위한 146일 장외 철야 농성'이 80일째 이어지고 있는 24일, 이곳 농성장에서 만난 양윤모 스크린쿼터 대책위원장(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좀 야윈 듯 보였다. "얼마 전에 배우 안성기 씨가 그러더군. 딱 노숙자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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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윤모 스크린쿼터대책위원회 위원장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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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 동안 집에 얼굴을 비춘 건 나흘뿐이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스크린쿼터 사수의 의미와 한미FTA의 부당함을 알리는 강연을 계속하고 있는 양윤모 위원장. "투쟁 속에서 많은 지혜를 얻고 있다"는 그를 만났다.
- 칸에서 스크린쿼터를 지지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다. 소감이 어떤가. "기쁘다.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리라는 자신이 있다. 그들이 보여준 지지와 성원, 관심이 우리 영화인의 자신감을 더욱 굳건하게 했다. 칸은 시작일 뿐이다. 다음엔 미국 땅에 간다. 그곳에서 한미FTA 절차의 부당성, 일방성을 항의하는 것은 물론 미국 대중을 포함, 전세계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것이다."
-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칸의 지지와 달리 한국 내부의 반응은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인다. 정부는 물론 일반인들도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분위기다. "초기 투쟁에 비해 대중이나 언론의 관심이 무뎌진 것은 사실이다. 초기 투쟁은 확실히 전시 효과가 있었다. 유명 연예인이 대거 동참한다든지 하는. 지금은 외형적으론 대중의 관심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내부적인 지지 정서는 굳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최근 여러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한미FTA 자체에 의문을 갖는 대중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정서적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중들도 조금씩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깨달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 80일째 농성장을 지키고 있고, 스크린쿼터 사수는 물론 한미FTA 저지를 위한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분위기는 어떤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재일교포, 재독교포, 중국 동포들이 농성장을 찾아 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곳을 찾아 스크린쿼터는 물론 한미FTA의 실상에 대해 묻고, 자료를 얻으며 우리와 많은 토론을 나눴다. 그리고 문화를 지켜달라는 부탁과 함께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돌아가서 한국의 이 같은 투쟁을 알리겠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진보 진영 운동가는 물론 일반 시민단체, 지식인들이 농성장을 찾아와 지지를 보낸다. 평범한 일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농성장 주변 회사에 다니는 '넥타이 부대'들도 우리 운동의 뜻을 알고 있고 지지를 아끼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본다. 대중이 관심이 없는 듯하다지만 대중의 마음 그 밑바닥에 지지와 신뢰감이 있다는 걸 생활 속에서 부딪히며 느끼고 있다. 이춘연 영화인회의 이사장이 우리가 운동을 시작하던 추운 겨울이 지나니 날씨처럼 얼어 있던 민심도 점차 풀려가고 있다는 말을 하더라. 투쟁 현장에서 나도 그런 기운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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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 사수와 한미FTA 저지를 위한 146일 장외 철야농성'이 80일을 넘어서고 있는 가운데 제주도, 제천 등 전국 각지의 영화인들이 농성장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하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김명곤 문화부장관은 지난 5월 1일 농성장 방문 이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고, 거기다 최근 시나리오작가협회가 '한미FTA 저지 범국민 운동본부'에서 탈퇴했다. "문화관광부는 무능하다. 재정경제부의 파워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밑닦기 역할밖에 못하고 있다.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을 내린 초반에 문광부가 스크린쿼터를 없애는 대신 한국영화 지원 대책으로 4000억 원 규모의 영화발전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그것도 알고 보니 기획예산처와 아무런 협의도 거치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저 여론 호도용일 뿐이었다. 시나리오작가협회의 최근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다. 스크린쿼터는 사수해야 하지만 한미FTA에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영화계가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대화를 하기 전에 이야기가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문광부를 비롯해 재경부, 국방부 등 미국과의 오랜 역사적인 고리를 이제는 좀 끊어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대화가 가능하도록, 상황을 원 상태로 돌려놓는다면 참여정부와 충분히 대화, 협의할 생각이 있다."
-일각에선 단지 할리우드만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실제 막대한 배급력을 갖춘 한국 상업영화들도 스크린을 독점하는 것이 지금 한국영화시장의 실태다. 배급 독점 문제 자체에 대한 논의 없이 스크린쿼터만 얘기하는 것도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한국의 영화 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한국은 아직 산업 체계와 제도의 완결성을 갖추지 못했다. 몇몇 상업 영화의 독점 문제들도 체계와 제도가 틀을 갖추면서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내부적 체계와 제도를 갖추기 전에 스크린쿼터 축소로 인해 할리우드의 산업이 그것을 침해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크린쿼터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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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윤모 위원장은 스크린쿼터에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반드시 이길 것"을 자신하고 있다.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극장 경영인들이 스크린쿼터를 자율 유지하겠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극장은 창작과 창조의 주체가 아니다. 그들에게 영화는 그저 '상품'일 뿐이다. 물론 축소된 새로운 쿼터제도가 시작되고 1, 2년 동안은 기존 상황에서 그다지 큰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극장도 여론을 신경 써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이 모든 게 시간문제일 뿐이다."
- 실제 일본에선 극장이 스크린쿼터 제도를 자율적으로 유지하고 있지 않나? "일본은 100년 전부터 걸출한 영화 제작사들을 둔, 영화 산업이 무엇보다 강한 나라다. 영화 제작 편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등 한국영화시장이 호황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발전의 가장 밑바닥 단계일 뿐이다. 산업적 공격이 있어도 자본의 여유와 제도의 여유가 있어야 그 공격에 맞설 수 있다. 일본의 영화산업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내실이 튼튼하다. 한국영화가 표현의 자유를 얻는 데 100여 년이 걸렸다. 그렇게 발전의 발판을 만들었는데 다시 물적 조건을 위해 100년을 더 싸워야 하나 생각하면 착잡한 심정이다. 한국은 아직 산업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점차 다져나가고 있는 시점이다. 그런데 정부는 우리의 노력을 보기 좋게 배반했다."
- 한국의 스크린쿼터 축소가 다만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한국 스크린쿼터 문제는 북한과 연결지어 '민족 영상'이 확대될 것에 대한 미국의 견제와 압력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문화에 대한 견제와 더불어 중국의 쿼터 제도 또한 염두에 두고 있다. 한국은 그 시작일 뿐이다. 또한 동북아, 동남아로 널리 퍼지고 있는 한류의 파급효과를 상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시아인들이 아시아 문화와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미국에겐 엄청난 위험 요소다. 경제, 군사 논리를 들먹이고 있지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아시아인들의 문화 정체성 획득에 있다는 것이다. 스크린쿼터를 발판으로 그들은 이를 막으려 들고 있다."
-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쿼터 축소 영화 진흥법 시행령 개정안'이 7월 1일부터 적용될 것이다. "희망은 있다. 법은 만고불변의 것이 아니다. 인간은 밥을 먹고 살지만 동시에 꿈을 먹고 산다. 그 꿈을 깨려는 것이 있다면 투쟁하고 싸우는 게 인간이다. 한국 영화인들은 내부적인 확신과 힘으로 성장해 온 사람들이다. 미국과 정부, 일방적인 힘에 대해 우리는 '연대'를 통해 서서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미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방적인 것에 제동을 걸 힘이 있다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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