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물결>의 노이(강혜정)는 배 위에서 만난 낯선 남자 쿄지(아사노 타다노부)에게 "유령 같다"고 말한다. 쿄지는 지금, 자신의 애인이었던 보스의 아내를 보스의 지시에 따라 살해하고 태국 푸켓으로 향하는 배 위에 올라 있다. 쿄지의 여행길을 따르는 <보이지 않는 물결>은 살인에 휘말린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죄의식, 그 바닥을 더듬는다. 아사노 타다노부는 <보이지 않는 물결>에서 각양각색의 살아 숨쉬는 표정을 덜어내고 '유령 같은' 무표정의 얼굴로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바닥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2003)에 이어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과 다시 한번 손잡은 아사노 타다노부는 특유의 무표정 뒤에 쿄지의 혼란과 죄의식을 새겨 넣는다. 표정을 지워 더욱 풍부한 표정을 만드는 아사노 타다노부의 연기에 대해 <보이지 않는 물결>의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은 "좋은 책이 독자가 스스로 채울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것처럼 아사노는 배역에 이와 같은 입김을 불어넣을 줄 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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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물결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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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 소년, 영화를 만나다 아사노 타다노부는 1973년, 미국계 혼혈인 어머니와 화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에게서 이국적 외모를, 아버지에게서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아사노는 히피문화와 펑크문화가 뒤섞인 항구도시 요코하마에서 자유롭게 성장했다. 아버지에게 일본 팝아트의 대가 '요코 타다노리(忠則)'에서 따온 '타다노부(忠信)'라는 이름을 선물 받은 그는 열두 살에 귀를 뚫고,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항상 귀에 꼽고 살았다. 열여섯이 되던 1988년 한국의 <호랑이 선생님>과 같은 성격의 TBS 드라마 <3학년 8반 긴파치 선생님 3>로 연기활동을 시작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밴드 'Peace Pill'을 결성해 활동하는 등 연기보다 음악에의 열정이 더 컸다. 현재 이시이 소고 감독의 밴드 'Mach 1.67'에서 음악 활동을 하고, 그림 작품집을 내고 전시회를 여는 등 아티스트로도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그지만 영화 데뷔작 <물장구치는 금붕어>(1990) 이후 그는 무엇보다 배우로서의 길을 꾸준하고 튼실하게 걷고 있다. 그 길에 든든한 밑받침이 되어준 건 TV영화 <프라이드 드래곤 피쉬>(1993)로 인연을 맺은 이와이 슈운지 감독이다. 이와이 슈운지는 아사노의 무표정 뒤에 숨어있는 섬세한 감정의 결을 꿰뚫어 보았고, 배우로 커가는 아사노의 성장통을 함께 했다.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피크닉>(1996)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선생님을 죽이고 정신병원에 갇힌 츠무지를 연기한 아사노 타다노부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걷고 있는 불안한 청춘의 표상을 온몸으로 표현해내며 동시대 일본 청춘들의 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배우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같은 해 만들어진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헬프리스>(1996)에서 아버지의 자살 이후, 이유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소년 겐지가 된 아사노는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스크린 위에 섬뜩한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 포스트 뉴웨이브의 중심에 서다 1990년 영화 데뷔 후, 4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한 아사노 타다노부의 필모그래피는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코미디와 스릴러, 드라마와 판타지, 시대극 등 장르를 종횡무진하고 주연과 조연, 단역을 가리지 않지만 가장 돋보이는 건 그와 함께 작업한 감독들의 이름이다. 이와이 슈운지에서 시작해 고레에다 히로카즈(<환상의 빛><디스턴스>), 아오야마 신지(<헬프리스><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시이 소고(<꿈의 미로><고조><일렉트릭 드래곤 80000V><데드 앤 런>), 안노 히데아키(<러브&팝>), 츠카모토 신야(<쌍생아><바이탈>), 그리고 구로사와 기요시(<밝은 미래>)와 미이케 다카시(<이치 더 킬러>), 기타노 다케시(<자토이치><다케시스>)까지, 90년대 이후 새로운 작가군을 형성한 일본의 포스트 뉴웨이브 감독들 대부분이 그의 필모그래피에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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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오시마 나기사(<고하토>), 소마이 신지(<바람꽃>) 등의 거장과 세키구치 켄(<서바이브 스타일 5+>), 이시이 가츠히토(<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여자><파티 7><녹차의 맛>) 등의 신진 세력까지 합세해 있다. 거장과 중견, 신진 감독까지 골고루 갖춘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아사노 타다노부가 90년대 이후 일본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영화 기운이 팽창하던 90년대 일본영화에서 그는 감독들과 함께 성장하고 변화하면서 그 시대 일본인의 타자화된 관계와 삶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정신병동을 둘러싼 담을 걸으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걷던 <피크닉>의 소년, 온 몸에 피어싱을 한 채 살인을 게임처럼 여기는 <이치 더 킬러>의 야쿠자, 세상과는 벽을 쌓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몸에서 발산되는 에너지로 전기 기타를 연주하는 <일렉트릭 드래곤 80000V>의 청년, 돌연한 살인 이후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밝은 미래>의 남자까지 영화 속 아사노 타다노부는 주로 정상과 주류에서 빗겨난 아웃사이더의 모습이다. 사회 주변부에서 방황하고, 무표정하게 살인을 감행할 뿐 아니라 별다른 반성도 하지 않는 영화 속 캐릭터들은 고도로 발달한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90년대 일본인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표정 없이, 그러나 직설적으로 대변한다.
. 일본을 넘어 더 넓은 곳으로 21세기를 밟고 넘어서며 아사노 타다노부는 일본을 넘어 좀 더 다양한 국적, 다양한 이들과의 영화 작업을 시작한다. 태국의 대표 감독 가운데 한 명인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의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에서 죽기 위해 매일 발버둥치는 도서관 사서 '켄지'로 분한 아사노 타다노부는 삶의 벼랑에 다다른 남자의 고독과 아픔을 특유의 '무표정'으로 깊이 있게 전달한다. 이 영화로 인연을 새긴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과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은 최근 국내 개봉한 <보이지 않는 물결>에서 다시 한번 아사노 타다노부와 손을 잡고 인간의 죄의식을 파고들었다. 또한 크리스토퍼 도일은 자신이 직접 감독한 영화 <말을 버려라>(1999)에서 아사노 타다노부를 중심으로 영국, 홍콩, 일본을 오가며 영어, 광동어, 일본어를 버무려 '소통'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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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물결 ⓒ프레시안무비 |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은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영화 <카페 뤼미에르>(2003)에서 아사노 타다노부를 만났다. <카페 뤼미에르>에서 전철 주변의 소리를 녹음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 고서점 주인 하지메를 연기한 아사노 타다노부는 즐거울 때 슬며시 입가를 들어올려 미소 짓는 것 말고는 그다지 다양한 표정의 언어를 지을 줄 모른다. 그러나 여주인공 요코를 아끼는 하지메의 마음과 '소리'로 관계 맺고 있는 세상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옅은 미소와 표정 없는 표정으로 관객의 마음에 진하게 새겨진다. 그리고 아사노 타다노부가 선택한 새로운 영화 세계는 바로 러시아다. <곰의 키스>로 유명한 러시아 감독 세르게이 보드로프의 <몽골>(2007)에서 그는 12세기의 위대한 칭기즈칸 '테무진'이 된다. 말을 타고 광대한 몽골 평원을 달리는 테무진을 위해 아사노 타다노부는 이번엔 몽골어, 광동어, 타타르어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걱정이 앞서진 않는다. 그의 표정 없는 표정이 그 어떤 언어보다 더 정확하고 깊게, 말을 건넬 것을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 표정을 지워 표정을 세운다 <카페 뤼미에르>의 한 장면. 고서점에 함께 앉아 있는 요코와 하지메는 지금, 음악을 듣고 있다. 대사도 없고 두 배우의 움직임도 거의 없는 이 장면은 영화에서 꽤나 오래 계속된다. 그러나 한창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보면 미세한 변화를 찾아 볼 수 있다. 서점 창을 스치고 지나가는 자동차가 던지는 그림자가 빛을 가르며 순식간에 서점 안의 풍경을 바꾼다. 요코와 하지메 사이에 묶여 있는 개가 꼬리를 살랑이며 움직임 없는 공간에 움직임을 입힌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신, 지우고 지운 무표정으로 서 있는 아사노 타다노부의 인물들은 흡사 <카페 뤼미에르>의 저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배우가 나서서 감정을 내지르는 대신 배우가 서 있는 공간과 분위기가 관객에게 말을 걸게 연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사노 타다노부의 '무표정, 무표현' 연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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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뤼미에르 ⓒ프레시안무비 |
고향집에 잠시 내려온 음악 프로듀서 삼촌을 연기한 이시이 카츠히로 감독의 <녹차의 맛>에서 아사노 타다노부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온 동네를 하릴없이 걸어 다닌다. 그저 걷고, 간혹 웃고, 가끔은 조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삼촌'은 옛사랑의 집 앞에서 기웃거리기도 하고 길에서 만난 '괴상한' 무용수와 친구가 되지만 큰 연기를 펼쳐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이시이 카츠히로 감독은 연기에 관한 한 아사노 타다노부가 '굉장한 노력파'라고 단정한다. 그는 "영화 속 아사노 타다노부의 나른한 연기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연습의 결과다. 아사노는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 연습하고 현장에서는 완전히 그 인물에 몰입해 있다"고 말한다. 아사노 타다노부는 이렇듯 표정과 감정을 연기해 '보여주는' 대신, 관객이 직접 그것을 '느끼게' 한다. 표정을 지우고 감정을 낮춰 '빈 공간'을 만들고 관객 스스로 감정을 채워 넣길 기다리는 아사노 타다노부의 연기는 그래서 오히려 꽉 차고 튼튼하며 싱싱하게 느껴진다. 바다 깊숙한 곳을 흐르는 '보이지 않는 물결'이 때론 바다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만한 강력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배우, 아사노 타다노부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감정의 결'을 연기하기 위해 매진 중이다. 그는 모든 표정을 앞서는 완벽한 무표정, 빈 공간을 흐르는 꽉찬 감정을 향해 그렇게 한 걸음씩 다가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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