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오자마자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대한문으로, 시청으로 향했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이미 가슴속 깊이 지펴놓았던 촛불을 꺼내 들고 동료들과 친구들과 함께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 시간이 참 그리웠노라면서….
야만의 시대와 민주화의 시대 사이에서,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사이에서, NL과 PD 사이에서,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 사이에서, 혼인과 비혼 사이에서,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서, 구속(拘束)과 자유 사이에서, 인간에 대한 실망과 환멸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어떤 벽돌을 차곡차곡 쌓으며 단단한 내면을 만들어갈 수 있었을까. 앞으로 그가 더욱 자유로이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내가 당당하게 선택한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해서 내 인생을 살겠다고 간단히 결정하는 순간 아무것도 거치적거릴 게 없어진다. 누군가 어떤 삶에 대해 완전히 확고한 사람이 있으면 그 확고함이 다른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린다."
"세상이 나한테 요구하는 욕망이 아니라 내 가슴속에서 욕망이 솟아올랐을 때 그걸 움켜쥐고 실천하라고 하고 싶다. 그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첫 단계다. 그때부터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되는 거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유명한 예술가'가 되는 것과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 사이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용기 있게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사회가 되는데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땅의 많은 청년들이여, 한 손에는 자신의 확신에 찬 꿈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에는 다른 이의 따뜻한 손을 포개고 마음껏 월경(越境)하기를!
▲ 목수정 작가. ⓒ프레시안(최형락) |
-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인 지난 6월 '재불 한인 시국 선언 서명 운동'을 공동 발기해 현지에서 150여 명이 이 서명에 동참했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해 정부가 이 사안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을 텐데, 한국에 들어오기 두렵지는 않았나.
"국정원이나 한국 정부에 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마침 지인들과 다른 프로젝트를 도모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한국이 시국 선언 정국에 돌입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다들 동의했다. 함께 글을 작성하고 한인 사이트에 올려 온라인으로 서명을 받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참여가 많지 않아 한인 마트나 공연장, 한국 관련 행사가 있는 곳에 직접 가서 서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진행했는데, 막상 (한국에 오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니까 살짝 걱정이 됐다. (웃음)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집에는 내가 공항버스를 타고 바로 집으로 간다고 했기 때문에 아무도 마중을 나오기로 한 사람이 없었다. 만약 도착하자마자 '(당국에서) 나를 데려가면 아이는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릴 때쯤 되니까 아무 걱정이 안 됐다. 지금 정국에 시국 선언했다고 누군가를 잡아가면 이것은 완전히 불붙은 데다 기름을 붓는 격이 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해주면 나야 고맙지, 해봐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당시 박근혜 후보가 알지 못했다 해도, 불법으로 치러진 선거는 무효라는 그 명백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가장 엄중한 헌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그 지위의 정당성도 자격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실토한 셈이다. 부정선거의 결과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준엄하게 요구한다"는 내용의 시국 선언을 했다. 어떻게 사퇴까지 요구할 생각을 했나?
"사람들이 '박근혜 하야'를 말하지 않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국정원을 개혁하라'는 정도만 말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결국 선거가 부정으로 치러졌다면, 선거 결과는 무효가 되는 거다. 그렇다면 당선된 사람이 물러나고 선거를 다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1960년 3·15 부정선거 때는 학생들이 '이승만 하야' 요구를 바로 했었는데, 지금 우리는 왜 퇴진 요구를 직접 하지 않을까 의아하다. 시국 선언을 할 때 우리는 '다른 것 다 필요 없다. 선거는 무효니까 박근혜 당선인은 사퇴하라'고만 얘기하기로 했다. 파리 한인 시국 선언 이후, 이것을 그대로 불어로 번역해 프랑스 서명 사이트에 올렸다. 제목은 "2012년 대한민국 대선 무효 선언에 대한 서명 운동"이라고 붙였다. 지금까지 프랑스인들을 포함해서 약 2000명 정도가 서명을 했다. 이 사안과 관련된 책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해뒀다.
이런 것들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가지고 계산기로 두드릴 필요는 없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결과와 상관없이 나서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동참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동참해주길 바랄 뿐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사퇴 요구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나?
"사퇴는 박근혜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지도자도 스스로 혼자 힘으로 세상을 바꾼 적은 없다. 이승만도 그랬고 박정희도 그랬다. 결국 시민 혁명을 통해서만이 부패한 정권과 지도자를 무너뜨릴 수 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으로 쐈지만 그것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 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 학창 시절, "운동이 권력이던 때, 선배들이 주도하는 소위 '세미나'는 멀리하고, 20세기 초 러시아 시의 참혹한 아름다움의 세계에 넋을 잃는 반동의 시절을 보냈다. 종종 마음이 움직이면 종로, 대학로 등지에서 열리는 집회에 평소처럼 원피스를 입고 참석하기도 했다"고 했다. 학창 시절 목수정은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라서 대학에 오면 글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문학적인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소양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많이 했다. 그런데 학교 안에 있는 신문사, 문학 동아리를 포함해 모두가 운동권적인 어휘가 아니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것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다. 모든 시나 산문 등이 운동권의 어휘가 아니면 아예 실리지가 않았다. '이 또한 독재다, 갑갑하다, 어떻게 세상에 이것만 존재할 수 있나? 이건 거짓말이다' 하는 생각에 늘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 동료들이 운동 현장으로 나갈 때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것은 없었나?
"어떤 부채의식도 갖고 있지 않다. 당시는 87년을 계기로 큰 싸움이 끝난 시점이었다. 그렇지만 노태우가 여전히 군부를 이어갔고 학교에서는 그동안 다져진 운동권의 세력은 여전했다. 학생운동의 이슈가 학내 문제로 넘어가면서 경찰과 계속 부딪치고 있었는데 1991년 명지대학교에서 '강경대 사건'(명지대학교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의 강경 대응으로 맞아 죽었던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분신 자살이 이어졌다.)이 발생했다. 그 당시에도 이번 국정원 선거 개입으로 시민들이 선거 무효를 외치는 것처럼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과 군부가 종식되지 않고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굉장히 컸다. 그런 이슈에 대해서는 나도 현장에 나갔다. 다만 동료들과 같이 간 것이 아니라 혼자 갔다. 가급적 전투적이지 않은 스커트 복장으로 말이다. 전경들이 덮치려 들면 시민들 사이에 끼어들기만 하면 되니까 구타를 당하거나 구치소에 가는 일은 없었다."
- 스커트를 입고 시위를 나간 모습이 상상이 된다. (웃음) 자기 세계가 뚜렷했고 글을 좋아하던 소녀가 어떤 계기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나?
"대학에 오기 직전 87년에 대선이 있었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했고, 대선 하루 전에 당시 주범으로 지목된 마유미(김현희)가 잡혀서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면이 방송에 나왔다. 이것이 당연한 사실로 알고 대학에 들어와 보니 학내 게시판에 김현희는 조작된 인물이고 KAL기 폭파 사건은 정부가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 대자보의 내용을 완전히 믿건 안 믿건,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과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발족했는데 많은 교사들이 우리 교단에서 벌어지는 모든 옳지 않은 것들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이들의 가치와 연대에 동의했고 공감이 많이 됐다. 그 당시 내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가 바로 전교조의 '참교육의 함성'이었다. 그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핑 돌았다. 조직적으로 운동에 몸을 담고 있지 않았지만, 닫혀 있지는 않았다. 전교조를 지지했고, 전교조 활동을 하는 옛 은사들을 응원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에게 있어서 화두는 '문화'였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문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동숭아트센터에서 일하면서 자본에 문화가 종속되는 현실을 아프게 경험하면서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때문에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러한 문화 부분에 대한 고민을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사안으로 연결시키게 된 계기는 오히려 프랑스에 있으면서 생긴 것 같다."
-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동숭아트센터에 연극 기획자로 일하면서 "처음 연극 동네에 발을 디뎠을 때 감격의 눈으로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 있는 듯 새로운 부류의 인류를 만났다. 하지만 온통 '예술가님'들만 득실거리는 세계에서 예술은 그들에게 맡기고, 나는 서류를 만들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라고 했다. 연극 동네에서 경험했던 한국 문화의 취약점은 무엇이었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연극계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그나마 내가 있던 동숭아트센터가 비교적 규모가 큰 곳이라서 자본금도 상당히 갖고 있었다. 극장을 갖고 있어 공연장을 대관하기 위해 돈을 빌릴 필요는 없었다. 빚으로 시작해서 표를 팔면 그 돈으로 빚을 갚는 곳도 많았고 배우들에게 한 푼도 주지 못하고 운영을 하면 할수록 빚만 쌓이는 극단이 허다했다. 동숭 공연팀도 인원이 달랑 3명밖에 없어서 홍보, 기획에서부터 경리, 협찬을 구하는 일까지 다 해야 했다. 그중에 제일 싫었던 일은 매 공연마다 기업 후원을 받으려고 기획안을 가지고 기업에 굽실거리며 들어가 브리핑을 하는 일이었다. 한 50군데를 돌면, 한 군데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가 이 일을 왜 해야 되지?' 하는 환멸이 컸다. '우리가 생산하는 문화가 사실은 전 국민이 같이 누리는 문화적 자산이 되는 건데,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정말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건가'라는 고민이 굉장히 많았다."
- 그래도 일하면서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지 않나?
"대학로는 마치 연극을 매개로 한 작은 커뮤니티 같은 곳이어서, 연극 동네에 있으면 마치 시골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너무 순박했다.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비교적 작은 단위의 돈으로 시작한다. 주연 배우가 300만 원, 나머지는 50만 원 정도였다. 3개월 연습해서 한 달 동안 공연하는데 그만큼 받고 하는 거다. 그렇게 공연을 올리고 나면 버는 돈도 크지 않기 때문에, 또 애초에 공연을 통해 큰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이 없어서 그 덕에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 뒤에는 연습도 공연도 지하에서 하고, 옥탑방이나 반지하에서 사는 연극인들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희생이 있었다. 송강호, 유오성, 장희순, 정은표, 성지루 등 지금은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배우들이 작은 공연장에서 땀 흘리며 연극을 하던 시절을 공유했던 것도 큰 기쁨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들의 희생으로 연극이 생존해야 할까 하는 물음이 가슴을 쳤다. 좋은 배우들이 영화나 TV로 옮겨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현실도 아팠다.
모든 것이 자본이라는 단 한 가지의 가치를 기준으로 일렬종대로 나열되는 사회에서는 결국 문화도 투자의 대상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문화란 사회 전체가 그것을 공공의 영역이라 인정하고 장기적으로 아낌없이 투자해야지만 광범위한 결과물들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오늘 투자하고 바로 내일 결과를 봐야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약화되지 않는 한 문화 사회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다. 자본을 제어할 수 없는 정치의 한계를 느끼며 문화 정책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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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가 실패로 끝났지만, 그 경험이 약이 됐다. 나와 그와의 문제는 두 개인이 서로 조화롭게 만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실패한 만남으로 끝난 것을 넘어선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평생을 지독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 권위 아래서 꼼짝 못하고 살아왔던 한 남자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여자와 부딪쳤을 때 생겨나는 생각의 파열들이 폭력적으로 드러났다고 받아들였다. 나는 거기에서 처음으로 가부장제에 이마를 쾅 박은 것 같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두 남녀 사이의 불화를 경험했다기보다는 지난 수세기 동안 그동안 수많은 여성들과 남성들이 겪어왔던 불평등과 억압, 착취의 구조를 경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희생양인 줄 모르고 아버지의 목소리에 꼼짝달싹 못하고 짓눌려 살고 있던 남자를 보았다. 그로 인해 아픔을 겪었던 그 순간은 힘들었지만 동시에 껍질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페미니즘의 첫 싹이 내게 싹텄다'고도 말할 수 있다."
- 우리는 보통 자신의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힘들어하곤 한다. 어떻게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확장시켜서 소화할 수 있었나?
"고등학교 이후 교회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위안을 구하기 위해 교회를 가지는 않았고 정신과의사를 찾지도 않았다. 대신 책을 읽었다. 책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에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과 사회를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아, 이게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게 많았다. 고2 때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갑작스럽게 닥친 큰 불행이었고, 우리 가족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이건 긴 인생사에서 약간의 굴곡을 내게 선사하는 사건일 뿐이란 생각이 있었다. 이미 책 속에서 많이 보았던 일들이 내게도 일어난 것이고 분명히 반전의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상황을 객관화했다. 그러니 담담하게 고통으로부터 무뎌지게 되고 물리적인 어려움을 정신적 어려움으로 확대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제를 겪은 모든 여성들에게 그 문제를 가지고 혼자서 힘들어 하는 것보다 사회로 나오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제안하고 싶다. 모든 개인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다. 나 혼자만 겪을 수 있는 문제는 없다. 내가 살고 있지 않은 다른 나라에도 내가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 1999년에 프랑스로 갔을 때가 서른이었다. 그런데 파리에 도착해 파리 8대학 공연학과에 학부 3학년으로 편입했다. 어떤 마음으로 다시 학부 공부를 하게 되었나?
"한국에서 학부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지만 공연계에서 3년을 일했기 때문에 원한다면 석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석사 과정에서는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수업이 두 번밖에 없고 나머지는 학사 시절에 공부한 것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한 준비 과정에 해당했다. 바로 논문 과정을 들어가면 시간을 단축할 수는 있었겠지만 왠지 그것은 정직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았다. 대신 프랑스는 학부가 3년인데 나는 어학을 병행하면서 차근차근 2년 동안 3학년 License 과정을 들었다. 불어를 제대로 공부해야 프랑스의 문화 정책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와서 오늘의 결과를 낳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히 '문화란 무엇일까?' 하는 광범위한 주제에서 프랑스의 문화 정책이라는 구체적이고 예민한 주제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다른 누군가가 내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학교 안에 외국인을 위한 무료 불어 강의를 있는 대로 다 들으면서 불어 공부 반, 전공 공부 반 열심히 공부했다."
- 프랑스에 있으면서 한국에서 경험했던 자본주의 하 문화 분야의 문제점들을 풀어나갈 답을 얻을 수 있었나?
"유학을 갔던 1999년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은 한국과 굉장히 달랐다. 한때 '트로츠키주의자'(레프 트로츠키의 마르크스주의 혁명 이론. 트로츠키가 제창한 영구 혁명론의 입장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에 반대하며, 세계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의 달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 아울러 전투적인 노동자 봉기와 노동자 독재 집권을 주장했다.)였던 리오넬 조스팽이 총리를 맡고 있었다. 그는 총리 재임 당시에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좌파로 분류되는 총리였다. 또 대통령은 좌우 동거 정부의 수장이었던 자크 시라크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정당들이 의회를 통해 제도들을 법제화하면서 문화 예술인을 위한 좋은 복지 정책들이 시행됐다. 그것을 보면서 '아, 여기는 문화에서 자본주의의 독주가 무력화되는 시스템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가 자본주의 정책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인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독자적으로 입지를 펼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프랑스에는 연극, 영화, 공연과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 제도가 존재한다. 좌파 정부에 의해 1960년대부터 실행되어온 '앵테르미탕 제도'(앵테르미탕 제도는 1936년 당시 영화 산업 종사자들의 적은 임금을 감안해 부족한 수당을 보충하자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1958년 드골 정권 하에 국가상공업협회(Association pour l'emploi dans l'industrie et le commerce, Assedic)가 창설되면서 실업 수당이 본격화되었으며, 1969년부터 영화·공연·오디오영상 분야의 인력들을 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실업 급여 제도로 확대되었다)는 정부가 연극, 영화, 공연과 같은 분야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실업 급여와 같은 사회적 안전 시스템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제도로 1년에 2개월 정도의 계약에 근거해 일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나머지 기간에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 이 제도만큼은 꼭 도입시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때 문화부에서는 "프랑스에서 그런 시스템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 노동조합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노동조합이 요구를 해야 들어주는 거지, 정부가 알아서 해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 우리나라 예술인들도 노조 이야기를 하면 기겁을 하면서 '우리가 무슨 노동자냐 예술가지'라고 말한다. 다행히 '영화산업노조'가 만들어져서 그분들이 내가 제안한 제도에 전폭적으로 환영하면서 쟁취하려고 노력했다. 처음에 문화부를 통해서 했다가 안 되어 결국 노동부를 통해 프랑스 제도와 비슷한 한국식 제도를 얻어냈다. 이제는 영화 산업 노동자들이 촬영 이외의 기간에는 자신들의 기술적인 노하우를 기를 수 있는 연수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어떠한 사회 경제적인 문제들이 정치영역 속에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자본주의 하 소외되어 있는 경제적 약자들의 요구들이 정치에서 반영되기는 힘든 구조이다.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연대하여 요구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절대로, 저절로, 진보할 수 없다. 아무도 그걸 대신해주지 않는다.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큰 목소리로 요구하지 않으니 정치 영역에서 그들의 요구가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다. 요구하고, 만들어내고, 이후에 만들어진 제도들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행되도록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그것을 같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작업들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서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그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도록 지원금도 끊고 탄압했다. 너무나 많은 시민단체들이 파괴되어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먹고살기에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 한국에 돌아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민주노동당에 들어가 4년 동안 문화 담당 정책 연구원으로 일했다. 당시 여러 당이 있었는데, 어떻게 민주노동당으로 입당할 결심을 했나.
"석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마침 그때 총선이 있었다. 총선 때 각 당이 어떤 문화 공약을 냈는지를 살펴보는데 그 중 민주노동당이 눈에 띄었다. 사실 그런 당이 있는 줄도 몰랐다. 권영길 의원에 대해서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공약집을 보니 꼭 내가 쓴 것 같았다. 나보고 쓰라고 했으면 '이렇게 썼겠다' 싶은 것들이 다 있었다. '한국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 있었어?' 하고 너무 놀랐다. (웃음)
반면 다른 당은 완전히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공약만 걸어 놨었다. 민주당도 '부자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문화도 '부자 나라'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화 정책에 대한 그 어떤 철학도 볼 수 없고, 그저 문화예술인들한테 사탕발림하는 식이었다.
그에 비하면 민주노동당은 거의 100대 0의 스코어로 완벽한 문화 공약을 냈다. 그래서 여기 들어가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들어가서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그냥 거기서 일하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 이력서를 보냈다. 그런데 마침 당시 민주노동당이 나름의 정책 정당을 표방하면서 연구원을 뽑으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이력서를 받아본 사람이 '아직 공모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아셨냐'고 하길래, 그러면 가지고 있다가 공고를 내고 거기에 내 서류를 포함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중에 면접을 보러 갔고 일하게 된 것이다."
- 정책 연구원 초반, "정책은 상상력의 산물이다"라는 말에 행복해하며 즐겁게 일했다고 했다.
"면접을 보고 합격이 되어 들어가서 봤더니 거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 민주노동당이 내건 문화 공약을 아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웃음) 서너 명이 앉아서 문화 관련 공약을 다 만들었던 것이다. 굉장히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과 각 분야에 정통한 몇몇 교수들이 함께 만든 공약이라고 했다. 나는 당에 들어가서 내가 가진 새로운 생각들을 전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전할 것도 없었다. 이미 그들이 다 하고 있었던 거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틈에 싸여 함께 일하면서 정말 행복했다. 정말 파라다이스 같았다. 세상 어딜 가도 개중에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섞여 있어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 머물 때면 숨쉬기조차 힘들었는데, 그 와중에 이렇게 마음과 뜻이 맞아 협력할 수 있는 동네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 같았다. 그 시절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얻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 그랬던 민주노동당이 2005년부터 재선거 패배와 잇따른 '일심회 간첩단' 사건, NL과 PD의 정파적 갈등이 불거지면서 결국 2008년에 분당됐다. 갈라지는 민주노동당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솔직히 나는 당이 갈라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당시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당으로 노동자 문제, 계급 문제가 핵심인 당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NL들이 들어온 것이다. 장사가 잘 된다 싶으니 막판에 마구 들어왔다. 그들은 지난 총선에도 보여줬듯이 당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실제로 평생을 그렇게 해 온 사람들이다. 그들을 보며 '어쩌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극우에 가까운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했다.
NL은 거의 종교 단체와 비슷하다. "다단계 생계형 정치 그룹"이었다. 한번 발 들여놓으면 발을 빼기도 어렵고, 그 안에서 인간관계와 생계와 생각이 온전히 통제된다. 그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보다 당과 정파가 더 중요하고 목적을 위해선 그 어떤 수단도 정당화시켜버린다. 그런 사람들과 남한에서 가장 좌파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한 정당 안에서 한 살림을 꾸릴 수 있겠는가.
민주노동당 막판에는 정파 싸움만 계속했다. 그것을 보면서 더 이상 발전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더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씁쓸하겠지만, 깨지는 아픔을 딛고서라도 한국 좌파로부터 주사파를 떼어내야 하는 게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당이 콩알만 하게 다 쪼개져 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과도기적인 아픔이라고 생각했다."
- 당을 나오기 직전, 민주노동당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노조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끝까지 남아 있는 당직자들의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청산하겠다는 각서를 확정하고 나왔다.
"대선이 다가와서 당이 정신없이 돌아가던 시점이었다. 그 때 있었던 정책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PD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을 때 들어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NL이 보기에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어디선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 20명 정도를 선거 요원으로 대거 뽑아 와서 선거물 인쇄 등을 시켜가며 월급을 주고 아르바이트같이 일을 시켰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었다. 그러자 NL은 우리가 정파적인 싸움을 걸기 위해 다른 조직을 만드는 거라면서 반발했다. 결국 노조가 만들어졌는데, 그 이후에 사사건건 싸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노조라는 이름으로 지도부 회의에 들어가 그들이 하는 이상한 짓들을 다 기록해서 올리기도 했다. 그 중 내가 가장 많이 분노했던 것 같다. 대학 시절부터 PD와 NL 싸움에 길들어 있던 사람들이야 '쟤네들은 원래 저래' 하면서 새삼스레 분노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처음 봤으니 눈에서 불이 마구 튀었다. 심지어는 월급을 안 주고도 아무런 말을 안 하는 것이 이해가 안됐다. 어이가 없었다. '이것들이 무슨 노동자의 희망이냐, 너희들은 노동자의 절망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선거 막판에 가니 체면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고 오직 정파의 이해만 중요시되더라. 우리는 우리대로 노조의 힘으로 싸우겠다고 하고 의원들은 각개 전투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NL에 의해 권영길 씨가 대선 후보가 되는 순간, 모두가 배신감을 느꼈다."
- 민주노동당 안에 노조가 생겼다는 말이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하다. 어떻게 해서 직접 노조 사무국장까지 하게 되었는가.
"'노조를 만들어야겠다, 같이 만들자'라고만 생각했지 내가 무언가를 해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노조를 만드는 모임에 따라 갔다가 상황이 계속 좋아지지 않으니 내가 "도대체 노조는 뭐하는 거냐"며 매일 투덜댔다. 그러니까 옆에서 "그럼 네가 노조 사무국장을 해라"고 해서 하게 된 것이다. (웃음) 사무국장 자리에 있으니 스스로 조직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치고 나갈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파업이라도 하자!'라고 하면서 치고 나갔다. 그런 순진한 눈과 마음으로 NL을 비롯한 지도부와 싸움을 벌였다. 그때 내가 NL의 철천지 원수가 됐다. (웃음)
한번은 그들이 '코리아 연방공화국'이라는 슬로건으로 대선 포스터를 찍었는데, 그것은 북한의 고려연방제를 그대로 표방한 것이었다. 그게 한 장에 얼마짜리인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말도 안 되는 공약을 포스터에 담아 찍어낼 수 있는가. 이미 당내에서 그렇게 찍어낼 수는 없다고 폐기된 결정을 정파적 영웅심으로 찍어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폭로하고 포스터를 못 찍게 돌아가는 인쇄기를 멈추고 그것을 명령한 사람을 비판했다. 내게 개인적으로 '무릎 꿇고 사죄하라'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 이름을 당의 '오적' 중 한 명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 민주노동당을 나와 프랑스로 다시 돌아갈 때의 마음은 어땠나?
"당시 희완이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나 때문에 그를 계속 한국에 살게 하는 게 미안했다. 또 민주노동당에서 진하게 경험을 하고 나니 당장은 내가 할 일이 없겠다 생각했다. 멀리서 같이 싸워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이제는 또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야 하는 시기도 마침 맞았다. 프랑스는 유치원부터가 정규 교육인데 아이가 프랑스 생활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나 또한 프랑스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으로서 거기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에 미련이 많지는 않았다.
프랑스로 갈 무렵 책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레디앙 펴냄)이 나왔다. 한국에 있을 때 짧은 기사를 한번 쓰고 나면 굉장히 많은 비난 댓글(악플)에 시달렸는데, 책 반응은 굉장히 좋았다. 책이 많이 팔리고 안 팔리고를 떠나서 사람들이 보여준 커다란 반응에 내 마음이 녹았다. 그러면서 '아, 책을 쓰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짧은 글에 담아내면 오히려 오해를 많이 부르지만, 긴 글에 쓰면 공감을 얻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 책을 계기로 다른 책을 또 쓸 기회가 생기면서 앞으로 이 길로 가도 나쁘지 않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프랑스에 있으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도 싶었다."
- 어쩌면 책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이 그동안 목수정의 힘들었던 삶에 위로가 된 것 같다.
"보통 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위로가 됐다고 말해 주는데, 그런 반응이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됐다. 책이 나온 지 5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도 거의 한 달에 한 명 정도 독자가 파리로 찾아온다. 그러면 함께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한다. 그들은 내게 내가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준다. 그러면 나는 '맞아요, 정말 그래요'라면서 서로에게 힘을 주는 시간을 가진다."
-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던 목치숙 씨, 아버지는 '누가 누가 잠자나',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등을 작사한 유명한 아동문학가 목일신 씨였다. 두 분 모두 사회에 메시지를 주는 분들이었다. 이런 가정적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웃음)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40대에 돌아가셨다. 주동자이셨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동조자 이름을 단 한 사람도 말하지 않아서 엄청난 고문에 시달렸다고 들었다. 아빠는 중학생이셨고 아래로 네 명의 동생이 있었다. 먹고 살기조차 막막한 상황이었다. 집이 매우 가난했지만, 다행히 목사였던 할아버지 주변의 선교사들 도움으로 아버지가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실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귀국 후 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했다. 아버지가 지은 동시들은 스스로가 어릴 때 쓴 것인데, 할아버지가 그 시를 <소년 동아일보>, <소년 한국일보> 등에 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당선이 되니 어린 소년이 힘을 얻어 계속 동시를 썼다고 한다. 그 시들이 나중에 곡이 붙어 동요가 되고 널리 불리게 된 것이다.
기독교 집안이긴 했지만, 보수적이진 않았다. 개인적으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자기 세계관이 확고하신 분들이었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글을 계속 쓰고 남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강연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러니 정년 퇴직 후에도 아버지만의 삶이 따로 있었던 거다. 어머니는 보통 엄마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이들의 성공이 내 삶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으셨다. '공부해라, 무슨 대학에 가라'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냥 밥만 해주고 건강 챙겨주고, 그다음에는 책을 보거나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자기 생활을 하셨다. 남동생이 마흔이 넘었는데 '너는 왜 결혼을 안 하니?'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각자 자기 인생을 사는 거지'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계시다. 어떻게 보면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본인들 스스로는 검약하고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 22살이 많은 프랑스인 희완 사이에서 아이를 낳을 것이고, 프랑스에 가겠다는 결정을 했을 때 보통 한국 정서상 가족들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당에서 일할 때 아이를 가졌다. 그땐 희완이 프랑스로 떠난 시점이었다. 그가 나더러 프랑스에 와서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가 임신 5개월쯤 됐을 때였는데, 어머니께 '내가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낳을 거고, 엄마가 이웃사람들 보기 민망하지 않도록 프랑스에 가서 낳을 거다'라고 말했다. 아이를 조금 키워 다시 오겠다고 하니, 엄마가 아무 말씀을 안 하셨다. 화가 나셔서 두 달 정도 대화를 끊으시더라. 그리고는 내가 프랑스로 갈 때 '다시는 오지 마라'고 하셨다. 엄마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남자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으니 얼마나 미웠겠나. 그런데 내가 칼리를 데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아이를 너무 예뻐하셨다. 아이 아빠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셨다. 그것은 너의 선택이라는 뜻이었다."
- 한국에서 나이 차, 비혼, 동거 등으로 정의되는 희완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갑지만은 않을 것 같다. '다름'에서 오는 생각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했나.
"실제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이 내 앞에서 직접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또 있더라도 그 사람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내가 당당하게 선택한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모두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항상 남을 위해 사니까 말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이혼도 못하고 살고, 자식들도 부모를 위해서 산다. 남들 핑계 대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못사는 대신, 나를 위해서 내 인생을 살겠다고 간단히 결정하는 순간 아무것도 거치적거릴게 없어진다. 세상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 여기서 누군가 어떤 삶에 대해 완전히 확고한 사람이 있으면, 그 확고함이 다른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린다. '저 사람이 저렇게 확고하다면 거기에 뭔가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다들 따라간다. 그러니 자기만 확고한 게 있으면 그만이다. 주저하고 말 게 없다.
만약 내가 희완과 함께 칼리를 낳고 함께 사는 것을 괴로워하다가 어쩔 수 없이 결정했다면, 엄마는 '이것아, 그러게 내가 뭐랬어'라고 하면서 나를 쥐어박고 나무랄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에 너무 행복해 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엄마에게도 전해진 것 같다. 실제로 나는 아이를 가진 것이 너무 기뻤다. 당시 내 나이가 36살이었지만 아이를 갖는 것은 내 인생의 큰 소원이었고, 이 사람이라면 내가 아이를 낳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의 아이었기 때문에 낳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가족들이나 주위 사람들을 말로 설득하지 않았다. 내 태도에 엄마가 전염이 되고 다른 식구들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 가족들이 그러니, 다른 친척들이라고 뭐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니 자기 인생을 본인 스스로 선택해서 산다면 사회가 개혁되길 바랄 필요도 굳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선택을 하고 살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다."
- 목수정에게 희완이란 어떤 존재인가?
"칼리도 이 질문을 많이 한다. 희완과 내가 정말 많이 싸우기 때문이다. (웃음) 칼리가 우리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왜 둘이 결혼했어?'라고 물어보면 나는 '결혼 안 했어'라고 답한다. 그러면 또 '왜 둘이 나를 낳았어?'라고 묻는다. 그럼 나는 '너의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사람이랑은 내가 칼리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랬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정말 진심이다. 희완을 보면서 '이 사람이라면 내 마음에 드는 아이를 같이 만들어서 키울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어떤 점에서 그런 것을 느꼈나?
"지적인 면을 비롯한 여러 가지 면에서 그랬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내가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구축한 이상적인 남자상이 있었는데, 그걸 모두 충족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지적이면서도 행동하는 사람이고, 나이는 많지만 어떤 사람보다도 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식이라는 게 하나도 없다. 문학을 전공해서 젊었을 땐 고등학교에서 불어 교사를 했다. 30대 이후 전업 작가가 되었는데, 예술가이면서도 굉장히 과학적인 사고를 한다. 그는 과학과 수학에 대하여 굉장히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고, 과학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세계는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보기 드물게 균형 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함께 살면서 새롭게 발견하는 모습들도 있다. 희완의 아버지는 1차 세계 대전 때 아버지를 잃고 본인은 2차 세계 대전 때 끌려가서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나온 사람이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1,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의 가장 거대한 슬픔과 비극의 역사가 이 사람 안에도 축적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반면, 나는 무모할 정도로 긍정적이고 걱정을 잘 안 하는 스타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와 비슷하게 사고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근본적인 세계관이 굉장히 달랐던 거다. 우리가 싸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적은 똑같지만, 그 싸움의 방식은 다른 색깔이었다. 사실은 칼리가 그런 면에서 그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에 희완이 너무 아는 것이 많아서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는데, 나중엔 학교 같다는 생각을 했고,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그냥 넓은 가지를 가진 나무 같다고 느꼈다. (웃음) 싸우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반가워한다. 우리는 서로가 출퇴근해서 잠깐잠깐 보는 삶이 아니다. 하루 종일 지겹도록 본다. 희완은 1층에서 작업하고, 나는 2층에서 글을 쓰거나 내 일을 한다. 밥 먹을 때 잠깐 보는데도 서로 무척 반가워한다. 희완은 움직임이 크게 없는 넓은 가지를 나한테 드리워주는 사람 같다."
- 자유로운 삶에 칼리는 사랑이자 동시에 구속이진 않는가?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아이의 젖병이기 때문에 1년 정도 수유를 하는 동안 어디를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런 여자들의 약점을 이용해 남자들이 권력을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웃음)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가 전적으로 육아를 맡으면서 사회적인 역할을 하지 않은 채 무력하게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를 계속 낳게 되면, 이 시절이 연장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 사이에 남자들은 먹이를 구해 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권력을 장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웃음)
칼리를 키우면서 내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지는 시절을 조금 겪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프랑스 사회에선 거의 모든 엄마들이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의 '전업 주부'라는 단어 자체가 프랑스에는 없다. 성인 중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실업자'일 뿐이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사회가 아이들을 돌봐주기 때문이다. 아이가 3살 때부터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어 4시 반에 끝난다. 부모 사정에 따라 별도의 놀이학교가 있어 6시까지도 학교 안 다른 팀들이 아이를 더 봐준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올라가면 그 놀이교실이 일종의 활동, 연극, 춤, 무용 등을 배우는 시간으로 바뀌어 아이들이 방과 후에 다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대부분 일을 하는 부모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도들이 학교에 마련되어 있어 6시경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제도 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가 학교에서 늦게 오니까 그 시간 동안 나가서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고 일도 할 수 있다."
- "내가 아이한테 배우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이다"라고 했다. 한국 엄마들은 특히 자신의 삶의 살지 않고 아이들에게 올인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칼리를 너무 좋아해서 얘를 보면서 아이의 미래를 혼자 상상하곤 한다. 그러면서 내가 상상하는 쪽으로 아이를 끌고 가려는 내 모습을 스스로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러면 안 된다'라고 혼자 중얼댄다. (웃음) 내 어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밥을 해 주고, 책을 사 주고,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연필이나 물감을 사주면서 아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게만 해주면 된다. 가끔 아이에게 생각을 환기해줄 질문을 해주는 건 아주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는 아이의 인생에 참견하는 대신 나의 인생을 열심히, 즐겁게 누리는 거다.
동숭아트센터에서 있을 때 그곳 대표님이 항상 질문을 하셨다. '너에겐 문화가 뭐니?'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모두들 그런 질문을 괴로워했지만, 그럼에도 계속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면접시험도 아닌데 20대 중반의 나이에 매일 '너는 여기에 왜 왔니?', '너는 기획자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니?'와 같은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부터 질문을 받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질문을 하면 그때 바로 대답이 나오면서 내 안에 있던 생각들이 말로 구축된다. 질문을 통해 내가 잊고 있었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듣는 것이 참 재미있다."
- 아이와 어떤 문답을 할 수 있을까?
"칼리는 우리에게 질문을 많이 한다. '왜 여자들은 하이힐을 신어?', '왜 여자들만 화장하고 남자들은 안 해?', '왜 한국 사람들은 초록색 불을 파란불이라고 말해?'와 같은 무수한 질문을 한다. 그러면 나는 근본적으로 그 질문에 대해서 고민하고 답한다. 언젠가 칼리한테 "칼리, 너는 꿈이 뭐니?"라고 물었더니 첫 번째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유명해지는 것, 세 번째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한참 후에 "어떻게 하면 피카소처럼 유명해질 수 있어?"라고 물었다.
나중에 이것 때문에 부부싸움이 났는데 (웃음) 희완이 "유명해지는 거? 그건 마요네즈지"라고 하는 거다. 그러면서 "마요네즈를 만들려면 식초하고 계란하고 기름이 필요해. 이것을 넣고 저으면 되는데 ,어떤 사람은 열 번을 저었을 때 마요네즈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백번을 저었는데도 안 되는 사람이 있지. 결국 마요네즈가 되는 것은 우연인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다. 노력하면 유명해진다고 이야기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희완이 버럭 화를 내면서 "칼리에게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과 유명한 예술가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줘야 된다"고 이야기하더라.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유명해지는 것은 정말 우연히 한 순간에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나이 대의 아이에게는 그런 얘기부터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나도 엄청 화를 냈다. 또 싸움이 났었다. (웃음)
ⓒ프레시안(최형락) |
- 프랑스에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정치적 현안들에 대해서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통해 가감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내는 목소리가 센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마 내가 외국에 있으니 정부가 나를 미워해서 '얘를 한 번 손 봐 줘야겠다' 싶어도 시간이 더 걸린다. 내가 프랑스 국적은 없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덜 위험하지 않겠나. 그럴수록 '이런 건 내가 해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세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위험하게 쓴 것도 없는 것 같다. (웃음) 이런 이야기가 한국에서 유익하다면 계속 할 것이다."
- 앞으로 어떤 꿈을 꾸며 살고 싶은가?
"가끔 내 이름이 어디에 날 때 '작가'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정말 부끄럽다. 고작 책 몇 권 냈다고 작가인가. 다른 직함이 나한테 없기 때문에 그냥 작가라고 붙이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진짜 내 꿈은 내 이름에 작가라는 직함이 붙여졌을 때 내 스스로 낯 뜨거워지지 않는 날이 오는 것이다.
아주 단기적으론 이번에 출간한 <월경독서>(생각정원 펴냄)라는 책이 호응을 얻었으면 좋겠다. '월경(越境)'이라는 단어는 생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경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치르는 월중 행사인 월경(月頃)을 떠올린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 경계를 넘는 일고, 한 달에 한 번씩 피를 쏟고, 다시 아이를 생산해 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일은 매우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쓰는 과정은 나를 만들어준 벽돌들, 이 혼란스런 시기를 건너게 해주는 벽돌들을 꺼내서 다시 만나는 일이었다. 행복했고 위안과 힘을 함께 얻었다. 독자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 목수정에게 자유란?
"자유는 우리가 누릴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다."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세상이 나한테 요구하는 욕망이 아니라 내 가슴속에서 욕망이 솟아올랐을 때 그걸 움켜지고 실천하라고 하고 싶다. 그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첫 단계다. 그때부터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되는 거다. 우리는 스스로 내가 어떤 욕망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이 진행하고, 정리는 조경일, 정인선이 맡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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