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기 이전에 선택된 삶은 아닐까' 하고 질문을 던져본다. 대답은 명료했다.
"나는 전순옥이지, 이소선도 아니고, 전태일도 아니다. 난 '전순옥의 삶'을 살고 있다. 엄마나 오빠가 살아왔던 길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분들과 똑같이 살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오빠, 그리고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 어린 시절부터 오빠를 쫓아 공장에서 노동을 시작했고, 그 가운데 수 없이 마주했던 부당한 상황에 목소리를 높였다. 치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업화에 희생당한 노동자의 삶이 바로 본인의 것이었고, 친구들의 것이었다. 지금껏 채워진 그녀의 삶은 가족이 아닌 시대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너무 길었고 먹는 건 너무 적었다. 거의 어린 10대들이었는데 항상 배를 곯아야 했다.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배를 곯으면서' 하는 이 말이 농담도 아니고 없는 말도 아니다. 수출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삶이었고, 그들이 바로 수출탑을 쌓았다."
서른을 훌쩍 넘겨 유학을 떠났다. 마흔을 훌쩍 넘겨 결혼을 했다. 사회의 규격화된 시선에 괴로움을 겪진 않았을까 궁금했다.
"내 인생에 충실하고, 내 감정에 충실하는 게 가장 잘 사는 거라고 본다. 전순옥이 뭘 원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지 항상 자신에게 물어보며 원하는 답을 찾는다.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다."
오랜 유학생활 후, 소위 잘나간다는 많은 자리를 거절하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11년간 현장에서의 삶을 꾸려오다, 그녀는 작년에 '국회'라는 공간에 발을 디뎠다.
"현장 안에서 일했을 당시보다는 시야가 넓어져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한쪽만이 아니라 전체의 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조그만 바늘구멍만 했던 게 조금씩 커지는 게 보인다. 그것에서 보람을 느낀다."
뜨거운 시간을 이미 넘긴 가을이 지금의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삶의 곳곳에 묻어 있을 서글픔과 고단함이 대화 속에 묻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생기 넘치는 여름 같았다. 가득한 열정과 넘치는 기운에 그의 '젊음'이 부쩍 부끄러워졌다.
"다시 제조업을 통해서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제조업에 와서 기술을 배웠으면 좋겠다. 기술은 예술이다."
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의 가치가 풍성히 피어나는 사회를 꿈꾸는 그녀는 여성 노동 운동가 '전순옥'이다.
▲ 민주당 전순옥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노동자에서 학생으로, 또다시 노동자와 노동운동가로 살다 작년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경제민주화라는 뜨거운 아젠다 속에서 노동자 권익보장의 중요성을 체감한 민주당의 결정이었다고 보인다.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어떤가.
국회에 들어올 때 기대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답답함을 많이 느낀다. '현실정치'라는 담이 더 두껍고 높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것이 일반 국민들에게는 정말 높겠구나, 내가 이것을 뚫고 나가려면 정말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현실정치에 있어서 타협과 절충 같은 유연함도 있어야 된다고, 이해하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다수의 국민을 위해 꼭 이뤄내야 하는 원칙적인 부분에서조차 정치적 타협이 관례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지켜내야 될 것들을 지켜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럼에도 사회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개미처럼 자기가 노력한 것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반영할 수 있는 것이 보인다. 거기에 보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정치권은 갈등이 있는 곳에서 양쪽의 소리를 모두 듣고 중재 역할을 잘하면 되는데, 양보와 타협을 어느 선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뺏기고 빼앗는 게 아니라, 서로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해 더 크고 가치 있는 '발전의 단계'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어떤 합의점을 찾아야 하나?'가 국회에 들어와 생긴 고민이다.
사실 경제민주화 그 중심에는 재벌이 있다.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라 보는가?
얼마 전 미국 워싱턴에서 한 회의에 참석했는데, 거기에는 다른 나라 의원들도 많이 참석했다. 그 중 일본 국회의원이 "경제민주화는 재벌을 해체하자는 것이냐?"라고 물어보더라. 내가 "경제민주화란 재벌을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재벌과 재벌이 아닌 중소기업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함께 윈윈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재벌에 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많지만 모든 것에는 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이 두 개를 다 봐야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정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는데, 그때 경제성장을 선택했다. 외자와 노동력 등 우리가 갖고 있는 온갖 자원을 활용해 몇 개의 재벌을 만들어내는데 특혜를 줬고, 법적으로도 많은 것을 눈감아 주면서 세계적인 재벌로 키워냈다. 이렇게 큰 재벌을 통해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삼성이나 엘지 등이 국제적으로 한국 상품을 만들어서 팔고 있고, 이들이 세계시장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갖는 게 사실이다. 대만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대만은 자체적으로 안정된 일자리도 있고, 지방중심으로 수평적 경제구조와 지역 구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세계적인 브랜드는 못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굉장히 부러워한다. 이렇게 부러움을 살만큼 재벌이 성장했으니, 이제는 세계적인 재벌답게 글로벌시장에서 경쟁력을 도모했으면 좋겠다.
또한 재벌들 스스로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소비자들이 물건을 사 줬으니까 장사가 된 것이고, 또 그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 물건을 만들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산업화 과정을 지나면서 정부에서 기업들에게 전기요금을 얼마나 싸게 해 주었나. 상대적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이 너무 싸서 국민들이 지금도 많은 고생을 하고 있다. 혼자의 노력으로 된 게 아닌 것이다. 재벌 총수와 일가들이 그들의 성공을 '모두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경영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의해 쌓은 부를 어떻게 나눌까 하는 게 '경제민주화'다. 내가 재벌에게 바라는 것은 재벌로서 제 역할을 하면서 공정한 경쟁을 하는 존경받는 재벌이 되는 것이다.
정치가로서 이전과는 다르게 건전한 공권력이란 무엇인지를 체감하고 있을 것 같다. '노동자의 삶의 개선'이라는 목표를 성취하는데 있어 이전 활동가일 때와 차이를 느끼는 것이 있는가.
ⓒ프레시안(최형락) |
'현장에서 사람들과 수년 동안 함께 노력했지만 이룰 수 없었고 한계를 느꼈던 것들을 제도 속에 들어가서 법으로 제정해 보자. 그러면 실제로 노동자들의 삶을 바꿀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 와서 보니 활동 영역이 넓어진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재미있게 일을 하고 있다. 법 제정이 굉장히 어려운데 법학연구회나 중소기업연구원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좋은 법안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고 있다.
어떤 법안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가?
소규모 제조업에 대한 법이다. 그동안 정부에서는 제조업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정책도 많이 부실했다. 상인들에 관한 법이나 제도는 많지만 공장 제조업에 대한 것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소제조업은 상시근로 열 명 혹은 열 명 미만으로 고용돼 있는 소규모 제조 공장들인데, 이 공장들의 상황은 6~70년대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노동시간도 12시간 이상이고 근무환경도 너무 열악하다. 종로를 비롯한 강북지역에 수만 개의 봉제 공장이 있다.
예를 들면, 창신동만 해도 소규모 제조 공장들이 창신1, 2, 3동에 2500개 정도 있다. 한 공장에 평균 5명이 일한다고 하면 노동자가 1만 명이 넘는다. 그런 공장들이 강북지역 쪽에는 정말 많다. 전국적으로는 경기 남부, 부산, 대구 등 주로 대도시 도심에 공장이 있고, 거기에서 수십만 명이 아직도 열악한 제조업 환경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십대 때부터 지금까지 몇 십년간 이 분야에서 일을 해온 기술자들로,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위해 가장 밑에서 헌신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저 기술이 있어서 일 할 수 있는 것만으로 오히려 고맙다고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다. 국가가 이런 노동자들이 지속 가능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만약 이들이 직업을 잃고 실업자가 되어 국가에 의존하는 수급자가 된다면 국가 전체가 어려움을 겪을 거다.
이들 소규모 제조업을 위해 '도시형소공인 지원법'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도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소규모의 영세한 공장들이 조금이라도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생하면서 관련 산업의 근간을 이루며 모여 있다. 예를 들어, 종로에 귀금속이나, 성수동에 수제화 등을 만드는 공장들이 집적화되어 있다.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수 십 년씩 물품을 만들고 납품하는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장인들이다. 이들이 만든 물건의 공임은 몇천 원 정도에 납품이 되는데, 이것이 백화점에서는 20~30만 원 이상에도 팔린다. 이런 상황의 공장들이 부가가치를 올리고 소규모로 운영하고 있지만, 그 자체의 기술로도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경쟁력을 키워내는 개선책을 마련하고 싶다. 그러면 생산하는 사람들도 정당한 공임과 장인으로서의 자부심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또한 이러한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기술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가르칠 필요도 있다. 지난 6월 대표발의 한 '산업기술혁신 촉진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산업부가 산업을 위한 인력 인프라를 위해 산업기술 부분에 전문 인력을 양성하여 적재적소에 전문 인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그동안 기술자들이 암묵적으로 연마한 기술을 국제 표준에 맞는 기술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재교육받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런 법들을 통해 독일처럼 제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일하는 기술자들이 대우를 받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당하지 않는 환경을 차차 갖추어 나가려는 것이다.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제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학을 나온 사람은 깨끗하고 쾌적한 사무실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조업처럼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은 외국인 노동자가 와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독일은 그렇지 않다. 독일은 제조업 강국이다. 그것은 독일 사람들이 노동을 존중하는 가치와 철학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대우하고 기술자들을 인정해왔기 때문이다.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도 결국 사회의 일이고, 정책의 몫이다.
나는 앞으로 제조업을 통해 우리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조업은 기획에서부터 디자인까지 다양한 범위의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풍부한 산업이다. 때문에 제조업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제조업 환경을 다시 둘러보고 개선해야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왜 너희는 공장에 가서 일은 안 하고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직장이 없다고 하느냐?"라고 묻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젊은 사람들은 어디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면, 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이 (탁자 위 수공예 컵을 가리키며) 이런 컵을 하나 만들어도 '내가 이런 것을 예술적으로 만들 수 있구나. 노동환경도 이 정도면 할 만 하구나. 노동 시간도 괜찮네'라고 생각하면 어디든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국가가 먼저 청년들이 자기 꿈을 펼치면서 신 나게 일할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또한 대학은 나왔지만 결혼을 하면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을 활용해야 한다. 이들을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원 낭비다.
오빠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거하며 분신했을 때 16살이었다. 생계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당시 봉제공장 시다로 일을 시작했다던데,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의 삶은 어떠했나.
당시 내 또래 아이들은 일하러 오면서 점심조차 못 싸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싸가도 먹을 시간과 공간이 거의 없었다. 조그만 공장에는 다락이 있었는데, 그 밑에서 어린 소녀들이 고개를 못 들고 구부리고 일해야 했다. 내가 지금도 조그맣지만 열여섯 살 때부터 지금 이 키였다. 아마 다락방에서 일한 탓이 아닌가 싶다. 동료 중 한 명은 열두 살부터 구부리고 일해서 지금도 어깨가 굽은 사람이 있다. 공장 안에는 먼지가 너무 많아서 도시락을 열어 밥을 먹을 때 옆 사람이 부스럭대기만 해도 내 밥으로 먼지가 떨어졌다. 전깃줄의 먼지가 마치 눈이 온 것처럼 쌓여 있었고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움직일 수가 없을 만큼 공간도 좁았다. 더 어린 시다 아이들은 옷 무더기 속에 파묻혀 먼지를 한껏 마시며 실밥을 따야 했다.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화장실도 하루에 한 번 밖에 못 갔다. 두 번 가면 사장님에게 혼나니까 참았다가 쉬는 시간에 몰아서 가는데, 점심에 밥을 먹고 나서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 앞에 이백 명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그 많은 공장들 사이에 화장실은 단 하나뿐이었다. 더군다나 남녀 화장실이 안에 같이 있었다. 그렇게 졸면서 순서를 기다리다가 종이 치면 그냥 돌아와야 했다. 그럼 애들은 일하다가 오줌을 싸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일을 했다. 아침엔 여덟 시까지 가야 하고 저녁엔 통행금지 시간인 열한 시까지 일을 했다. 나처럼 서울이 집인 사람들은 집에라도 갈 수 있었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애들은 그 좁고 먼지가 많은 공장 위 다락방에서 자야 했다. 그러면 새벽에는 외부로 물품이 나가야 해서 이른 아침에 일어나야 했다. 잠도 거의 못 자는 것이다.
두 번째로 취직한 공장은 부평에 있는 한 수출 공장이었다. 그 공장도 상황이 너무 열악하고 힘들었다. 열 몇 시간씩 일을 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주어진 휴일에 동료들과 밖에서 만나면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멍했다.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몰랐던 거다. 어딜 가야 할지도 서로 대화를 어떻게 할 줄도 몰랐다. 일만 그렇게 하다 보니 대화거리가 없었던 거다. 우리가 평소에 영화를 봤겠나, 책을 읽었겠나, 신문을 봤나, 할 얘기가 없었다. 그저 앉아서 "이 일 그만 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여름이 되면 "비가 억수로 많이 와서 홍수가 나 버스가 안 다녔으면 좋겠다. 다리가 다 끊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일도 하러 안 와도 되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수출 선적 날짜가 다가오면 날짜에 맞추기 위해 야간작업을 2주씩 해야 했다. 그런데 기숙사에서 나오는 밥은 형편없었다. 보리밥에 쌀은 하나 보일락 말락 했다. 콩나물국, 새우젓, 김치가 나왔는데 새우젓은 수염만 긴 대가리에 붙어 있고 몸뚱이는 하나도 없었다. 콩나물국도 콩나물 대가리와 껍질만 있고 몸뚱이는 누가 다 먹었는지 없었다. 김치는 완전 소금에 절인 게 고춧가루도 없는 것이 나온다. 더 힘든 것은 콩나물국을 담은 그릇에 구멍이 나서 물이 테이블로 계속 흐르는 것이었다. 먹다 보면 양말과 신발이 다 젖었다. 그것도 한참 부족해서 더 먹고 싶다고 하면 저녁에 일 끝나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그럼 누룽지를 조금 더 주었다. 당시 나도 17살이었고 대부분이 10대였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나. 야근을 하면 삼립에서 나오는 크림빵이 간식으로 나왔다. 기숙사에 살던 얘들 중에는 그걸 가지고 "우리 이걸 먹지 말고 빵 계를 하자"고 하면서 그걸 모아 자기네 집에 동생들에게 우편으로 보내는 애들도 있었다. 기숙사에 열두 명이 살았으니 빵 열두 개를 모아 그마저도 자기들은 먹지도 못하고 동생들 먹게 해 주려고 보내는 거다. 나는 그게 하기 싫다고 내 빵은 내가 다 먹었다.(웃음) 그때 나도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규율을 지키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안 시켜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할 건데 꼭 왜 시키려고 하느냐?"라고 언니들이나 반장에게 대들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공장에서 잘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어떤 상황이었나?
수출 공장에서의 일은 너무 힘들었는데 월급이 삼 개월 정도 안 나왔다. 사장이 선적한 회사에서 돈을 안 줬다면서 월급을 안 주니까 애들이 집에도 못 갔다. 그래서 내가 월급을 받기 위해 데모를 하자고 했다. 이미 청계노조가 만들어졌을 때라 당시 청계노조의 조직국장을 하는 언니를 찾아가 상담을 하고 우리도 파업에 들어갔다. 당시 그 공장에서 800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400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기숙사 생활을 한 사람들은 거의 다 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첫날에 식당에 모여 우리끼리 "월급을 받을 때까지 일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내가 한 가지 행동을 옮기자고 한 것이 "우리가 밥 먹을 때마다 양재기에 난 구멍 탓에 국물이 줄줄 흐르는데 이걸 없애는 게 어떠냐? 양재기를 다 모아서 발로 밟아버리자"라고 했다. 그래서 모두가 식당에 모여 구멍 난 양재기들을 다 모아 신 나게 밟았다. 다음날 엿장수에게 그것을 다 내주고 엿을 바꿔서 먹어 버렸다. '이것을 다 없애면 그릇을 새로 살 거고, 그러면 구멍이 안 난 그릇에 국을 담아 줄 테지? 그러면 양말이 안 젖고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기물 파손이라고 해서 회사 측으로부터 벌을 받았다. 결국 나와 내 친구들 네 명 정도가 완전히 잘렸다. 월급 삼 개월 못 받은 것은 양재기 값으로 해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나왔다.
그렇게 인천을 떠나 다시 서울에 와서 취직한 게 창동에 있는 남영물산이었다. 가죽을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였는데 그 공장도 장난이 아니게 힘들었다. 잔업이 있는 날이면 타이밍 약을 많이 주었다. 그걸 먹고 새벽 네 시까지 일을 했다. 그렇게 한 열흘 정도 일하면 화장실을 가려고 복도를 걸을 때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안 든다. 붕붕 떠서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힘들게 일했다. 야근을 할 때면 새벽 두 시 쯤 라면을 끓여 주는데, 그것도 회사에서 끓여 주는 게 아니라 애들 몇 명을 뽑아서 끓이라고 했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을 큰솥에다가 물을 끓이기 위해서 가스로 불을 붙여야 하는데 불을 지피기 위해서 어떤 기구를 계속 돌리고 있어야 했다. 그걸 하다가 내가 불을 확 꺼버린 적도 있다. 같이 돌리던 동료들에게 "차라리 이거 먹지 말고 우리 그냥 가자"라고 하고 일하러 가버렸다. 나중에 난리가 났다. 다른 사람들은 라면을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을 다 꺼놓고 애들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날 불을 피우려는데 한 친구가 "나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저기 보이는 사층 건물에 올라가서 떨어져 죽어버리겠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아이를 보니 얼굴이 완전히 샛노랗게 떠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도 아팠지만 무서웠다. 걔가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불도 다 끄고 이거 끓이지 말자고 했다. "넌 방에 들어가서 자라. 내가 알아서 책임지겠다"라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거기서도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 시도했는데 무산됐다. 같이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 중에 한 남자애가 회사 쪽에 정보를 줘 버린 거다. 결국 나는 또 잘리게 되었다.
그 당시 여공들에게 '결혼이 유일한 탈출구'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혼 시기를 놓쳤다.
당시에는 스무 살만 조금 넘어도 결혼을 못 하면 손가락질을 받았다. 내 주변의 여성들은 거의가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이나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동료들, 재단사, 공장장들하고 결혼을 많이 했다. 일하면서 친구들과 모여서 할 수 있는 대화가 겨우 결혼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친구들은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키우고 어떤 집에서 살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한테는 그런 일들이 전혀 상관없는 말로 들렸다. 나에게는 결혼해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꿈도 없었고 그저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만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당시에는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여성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공부를 많이 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웃음) 집에서도, 주변에서도 결혼하라고 압박이 있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이십대 중반부터 꾸준히 연애는 했다. 그런데 당시 1977년에 어머니는 이미 구속 수감 중이였고, 나를 중앙정보부에서 미행하니 연애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어느 날 데이트를 하고 오면 나중에 중앙정보부 담당이 "그날 어디서 누구 만났지? 그 사람 누구냐?"라고 물어봤다. 나중엔 내가 만나던 사람이 민주화 운동하다가 수배자가 되는 바람에 서로 만나는 게 더 힘들어졌다. 나는 24시간 사생활이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고, 만약 그 사람이 나를 만나면 잡히니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 것 때문에 내 청춘이 손해 본 것도 많다.
1989년 35세가 되던 해에 영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공장에서 일을 할 때 틈틈이 공부를 했다. 천자문을 펴놓고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을 매일 외우고 썼다. 그러면 애들이 나에게 "넌 그걸 왜 하니? 너는 학생이 될래? 박사가 될래?" 하며 물었다. 실은 나는 오빠가 죽은 뒤, 장기표 선생님(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재야운동가)을 만나면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당시 신문마다 한문이 많았기 때문에 옥편을 사다가 한자를 찾아가면서 읽고 거기에 나온 이야기들을 애들에게 얘기해주곤 했다. 그러면 사장님이나 반장 언니들은 "그런 쓸데없는 일 말고 어떻게 하면 시다를 잘 할 지나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경이 어렵더라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면서 계속 일하는 중에 한국에서의 노동문제는 국내 차원의 활동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기업들이 자꾸 더 저렴하게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이 나라 저 나라로 공장들을 옮기다 보니 국내 공장 노동자들이 직업을 잃어갔다. 그것을 보면서 이러한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이루려면 우선 나부터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유학을 결심한 것이다.
언어도, 금전적 문제도 모든 것이 막막했을 것 같아 보인다. 두렵지 않았나?
당시 없는 형편에 동료 노동자들이 어렵게 돈을 모아줬다. 그걸로 편도 항공권만 사들고 영국 유학길을 나섰다. 처음 영국에 들어갈 때는 국제테러조직원으로 의심받고 공항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국에 들어가는 게 지금 우리나라에 제3세계 노동자들이 들어오는 것보다 아마 더 힘들었을 거다. 영국 공항에서 쫓겨나 한국으로 돌아갈 티켓값이 없어 그나마 가까운 독일로 갔다. 다행히 그곳에 있던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영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돈도 없고 말도 안 되고 하니 걱정은 되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가기 전에 한국에서 한 수녀님이 영국의 가톨릭 단체를 하나 소개를 해 줬다. 그쪽에서도 좀 도와주기도 하고 일자리도 알선해줘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6개월을 계획하고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결국 11년 5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어학만 마치고 바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가톨릭 단체(CIIR) 아시아담당인 친구가 영국노동운동사를 배울 수 있는 야간 2년제 전문대학을 추천해 줘 일을 하면서 야간에는 공부할 수 있었다. 학기가 끝날 무렵에 이 학교 선배 한 명이 나에게 영국의 노동당 당수들이 많이 졸업한 학교인 러스킨 컬리지(Ruskin College in Oxford)에 와서 1년만 디플로마 과정을 공부하고 가면 좋겠다고 추천해 또 공부를 하게 되었다. 돈이 없어 독일의 미제리오(Misereor)라는 가톨릭 단체에 장학금을 신청했는데, 인생이 피는 건지 꼬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웃음) 서류상 오차가 생겨서 1년이 아닌 2년 치 장학금을 받게 되어 2년 과정을 하게 되었다. 다시 학기가 끝날 무렵에 지도교수가 불러서는 노사관계로는 유럽에서 최고인 워릭대학교(University of Warwick)가 있는데 거기서 석사를 하고 가라며 추천을 해줬다. 장학금을 위해 지도 교수(Denis Gregory)가 이전에 장학금을 받았던 미제리오 재단에 편지까지 써주었다. '이 학생이 꼭 석사만 하고 돌아가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럼 한국에 돌아가서 노동운동 분야와 관련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추천서를 써주어 또 장학금을 받게 됐다. 석사 이후엔 지도 교수(Richard Hyman)가 박사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젠 정말 한국에 가야 합니다. 돈도 없고요" 하고 말했더니 이 교수가 나를 또 같은 대학 사회학과 교수(Peter Fairbrother)에게 소개를 시켜주고 장학금을 받아주어 박사과정까지 시작하게 되었다.
힘들지 않았나? 한국에 오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사실 나는 빨리 한국 가고 싶은데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었다. 고향에 가고픈 마음으로 무엇을 새로 시작할 때는 '이것 때문에 못 한다, 저것 때문에 못 한다'라고 핑계를 대었는데 그때마다 동료들이고, 교수들이 다 해결해 주었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 들어가니 굉장히 힘들었다. 방법론 1년을 통과하지 못하면 박사 과정에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그게 너무 힘들어서 그냥 그만두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편지를 썼는데 '그래, 너무 힘들면 돌아와라. 그렇지만 기왕 시작한 거 박사까지 했으면 좋겠다'라는 답장이 왔다. 처음 내가 영국에 갈 때 후배들이 나에게 '사대주의자'라고 하면서 욕을 많이 했었다. "어머니도 거리에서 투쟁하다 잡혀가시지 않았느냐"라면서 내가 유학을 가는 게 말도 안 된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전태일 동생이 투쟁을 해야지 영어 배우러 가서 뭐 할 거냐"라고 했다. 그때가 1989년도이니 한참 분위기가 그럴 때였다. 그랬던 후배들에게 편지가 왔는데 '언니, 언니도 기왕 갔으니 우리를 대신해 박사를 하고 오세요'라고 하더라. 이렇게 되니 오히려 어깨가 무거워지고 공부하기가 더 싫어졌다. 그래서 안 할 궁리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한국의 여러 경제학자들과 연구진들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분석했는데, 전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정책이 좋아서였지 노동자들이 어떤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다. 화려함 뒤편에서 숨죽이며 일하던 노동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경제성장은 이뤄질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박사과정을 했다.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누구도 밝히지 않은 사실을 말하기 위해 소명감을 가지고 했다. 그때 쓴 논문이 "한강의 기적은 누가 만들었나"이다. 공부하던 시절 아시아에서 온 정부 기관 사람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정부의 정책과 추진 방식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들 했다. 물론 한 나라의 경제성장에 있어 정책적 리드와 방향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하는 데 있어서 노동자들이 국가의 컨트롤을 받으며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에 대한 인식 없이 단순히 '경제성장 5개년 계획'을 가져가서 모델링을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라고하면 인식이 안 좋다. 누구나 노동자가 되기 싫어한다. 노동자는 더럽고 힘들고 임금이 적은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제조업이나 공장노동자만을 상상한다. 정부가 그렇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식민지하에서 전국노동자평의회(전평)가 있었다. 그런데 해방과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와서는 전평을 다 없애고 빨갱이로 만들어 버린 후, '대한노총'이라는 것을 새로 만들었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산업화 시대의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탄압했다. 노동조합을 모두 해산시켰고, 노동운동을 하는 자들을 빨갱이라고 선동하면서 짓밟았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보면 내가 고용하지 않고 고용되어서 임금을 받으면 다 노동자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으면서도 '내가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기업에 고용되어 있는 88%가 지식인 노동자다. 제조업이나 공장노동자는 훨씬 더 많다. 이렇게 보면 한 3%~5%만 빼면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다. 우리가 노동하는 사람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야 이 사회가 건강하다. 그런데 경제를 안정적으로 성장시킨다는 명분하에 노동자들을 그냥 순응하면서 일만 해야 하는 도구로 만들어 버렸다. 노동자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계몽해 왔고, 그렇게 노동의 가치를 부정했다.
영국에 있을 때 놀란 것 중에 하나가 어느 날 지하철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데, 그날은 영국에서 수능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온갖 신문들이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중요한 학생들의 시험을 발목으로 잡고 자기네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 독단주의 집단'이라고 쓰고 매도했을 거다. 그런데 거기서는 그런 논조의 신문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런던지하철 노동자들이 민영화에 반대하면서 파업했다. 파업으로 학생들이 시험에 늦었다'라고만 썼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신문이고 언론인 것이다. 우리처럼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네들이 해석하고 주 달고 해서 완전히 소설을 쓰는 언론과는 다르다.
2001년쯤에 리버풀에서 소방대원들이 파업을 했는데 마침 그 주변에서 불이 나 집에 남아 있던 아이 두 명이 죽었다. 이것에 대해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이야기했을지 상상해 봐라. 우리는 소방대원들이 원래 파업도 못할뿐더러 만약에 파업으로 아이들이 죽었다면, 그 노동조합은 완전히 매장되었을 거다. 영국에서는 '봐라, 소방대원들의 일이 너무 중요하다. 이들이 하루만 파업해도 사람이 죽지 않았느냐'라는 반응이 나왔다. 이런 부분들이 우리나라와는 다른 노동에 대한 인식이고 개념의 차이다. 그들은 노동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그 가치와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쌍용차나 현대차와 같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2년 이상 근무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음에도 현대차 사측은 불법파견을 계속 부정하면서 법원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응집된 바람을 담아, 지난달 20일 현대차 비정규직 철탑 농성 현장으로 '희망버스'가 출발했다.(최병승, 청의봉 씨는 지난 8일 296일간의 철탑농성을 해제했다 - 편집자 주)
나도 가려고 신청했었는데 그곳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 듣고서 대신 후원금을 보내기로 했다. 지금 언론이 지난 집회 중 일부 과격 시위만을 확대 보도하면서 일방적으로 시위대를 매도하고 있다. 평화적으로 문화 집회를 했다는 사실은 보도조차 되지 않는다. 경찰의 진압 방식에 대해서도 입을 닫았다. 때문에 그 곳 사람들이 지금 굉장히 위축되어 있다. 현대자동차에서도 '자기네 생산을 방해했기 때문에 고발하겠다, 손해배상을 물리겠다'라면서 협박을 하고 있고 정부와 경찰도 '엄정하게 대응하겠다'라고 강경하게 나가고 있다. 여론의 반응도 좋지 않다. 사람들은 왜 그들이 이 힘겨운 싸움을 끈질기게 이어 나가고 있는지, 왜 두 명의 젊은 노동자가 300일이 다 되도록 그 높은 철탑에서 내려오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의 인식 밑바탕에는 노동자들이 사회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권리를 주장하면 폭도로 모는 짙은 경향이 있을 뿐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다.
현대차 집회 중 한 노동자는 작업장에서 '너희는 무식하고 못 배워서 이런 일을 하는 거다'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를 희생시키고 묵인하는 것이 진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사회는 여전히 '너희는 못 배워서 우리가 이거라도 직업을 주는 것 아니냐, 우리가 직장을 주고 벌어 먹고살게 해주는데 어디다 대고 감히 투쟁이냐'라는 계급적인 사고방식이 굳어져 있다. 더불어 대학교육도 문제가 많다고 본다. 사회는 '너희가 배우지 못했으니 이런 일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라고 하면서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인간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모두가 대학을 가려고 발버둥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식의 교육을 받고 같은 분야의 일만 찾는다면 그 사회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글 쓰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옷 만드는 사람, 집짓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구성원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을 때 그 공동체가 건강할 수 있다.
1987년 대우조선 파업 때, 이석규 노동자가 죽은 뒤 대파업이 일어났다. 그때 이소선 어머니가 "여러분들아, 주눅 들지 마라. 비행기도 배도 여러분이 만들었다. 심지어 내가 식당에 가서 밥 먹고 이를 쑤시는 이쑤시개도 노동자들이 만들었다. 기업가들의 돈만 가지고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때문에 회사가 수출하고 성장하는 거다. 그러니까 절대로 기죽지 말고, 하나로 단결해야 된다"라는 연설을 하셨다.
이 사회에는 사람마다 각자의 역할이 있다. 한 사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도 필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고 다른 사람도 다른 그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사람도 나와 같이 사회의 중요한 일을 하는 구성원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옷 만드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입을 옷이 없을 것이고, 초콜릿 만드는 사람이 없으면 초콜릿을 못 먹는 거다. 나는 미용실에 가면 머리를 잘라주는 게 너무 고맙다. "원장님이 안계셨으면 내가 어디서 머리를 자르겠어요"라고 하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많이 한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담당하고 충족시키는 공동체에 대한 존중함이 있어야 이런 문제들이 풀린다고 본다. 우리는 혼자 살수 없는 사람들이다.
지금의 노동운동은 어떻게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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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내서 말해보자면 노동자들도 너무 한 방향으로 가는 측면이 있다. 지금 현대차의 대법원 판결 이행을 요구하며 최병승, 천의봉 동지가 송전탑 위에 올라가 있다. 벌써 290일이 넘었다. 이제는 내려 올 때가 되었다. 가족과 떨어져 얼마나 힘들고 외롭겠는가. '저러다 생명에 지장이 생기면 어쩌나? 목숨을 잃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제 내려오고 싶어 할 거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직접 내려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것을 우리 노동운동에서 헤아려줘야 한다. 물론 우리가 희망버스를 타고 가서 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지만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두 사람 앞에 가서 다 함께 "제발 내려와라. 그동안 아무것도 못해서 미안하다. 일단 내려와서 같이 싸워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이야기하고, 그들을 내려오게 하는 것이다. 이번 집회에 참석한 3500여 명 중에 노조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니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이제껏 함께 동참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생길 것이고, 회사 쪽에서도 어느 정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저렇게 있는데 자기네는 집에 들어가 발 뻗고 자고,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자식들이랑 밥 먹고 웃으면서 생활한다는 것에 대한 반성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격돌하는 모습보다는 동지들을 내려오게 하는 게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얻고 내려오는 게 어렵다면 단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 어찌 보면 수정주의자나 타협주의자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회사와 협상을 해야 한다. 즉, 단계적으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에 대해 협상을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내가 이런 고민을 친한 동생에게 말했더니 "누나, 이런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마요"라고 하더라. 사람들이 그런 생각이 다 있지만, 말을 하면 욕을 먹으니까 말을 못한다는 거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 있어야 되는데 못하니까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중재와 조정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능이나 리더가 없다보니 현대차 외에도 재능이나 쌍용차, 충청도의 유성 등 장기 파업장은 늘어나고 있는데 도통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서로가 너무 적대적이다. 이 문제는 누가 지고 이기는 게 아니라 같이 해결할 문제이다. 어찌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은 "정치권에서 도와줄 테니까 무조건 싸우세요! 투쟁하세요!"라고 말하는 게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못한다. 노동자들은 정말 내놓으려고 해도 내놓을 게 없는 약자임이 분명하고 넘치게 가진 자본가가 더 많이 내려놓고 양보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이런 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이 많다. 해법이 생긴다고 해도 또 양쪽 노사를 설득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늘 당하기만 하고 살아온 사람들(어쩌면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난데)에게는 감정의 골이 깊을 대로 깊다. 어쨌든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열심히 노력할 거다.
교육 시기도, 결혼한 시점도 이 사회가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기준에 많이 벗어나 있다. 주변에서 나타내는 걱정, 염려, 압력 등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하다.
보통은 사람들이 가고 싶은 길이 있어도 주변을 의식해서 그 길을 가지 못한다. 나는 솔직히 주변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 충실하고, 내 감정에 충실하는 게 가장 잘 사는 거라고 본다. 전순옥이 뭘 원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지 항상 자신에게 물어본다. '전순옥'은 전순옥이지만 내 안에 전순옥이 몇 개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전순옥은 이런 걸 원하고, 어떤 전순옥은 다른 걸 원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하는 질문을 하면서 원하는 것을 찾는다.
주변에서부터 전순옥은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동생이기 때문에 "네가 지금 이런 것들을 하면 어떻하냐? 네가 감히 외국에 유학을? 외국 남자와 결혼을? 다른 사람은 해도 너는 안 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럼 나는 "당신들이 내 인생을 살아 줄 건가? 책임져 줄 건가" 하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 거슬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선배들도 "그래, 네가 맞았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나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웠고 크게 구애받고 살지 않았다.
그럼에도 47세의 나이에 외국인이랑 결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시에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1992년도에 유학 당시 만난 한 후배가 영국 사람과 결혼을 한다고 하기에 나조차도 '이건 아니다. 어떻게 감히 외국 사람이랑 결혼을 하냐?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런 내가 2001년도 10월에 영국 사람과 결혼을 했다.(웃음) 많은 사람들이 내 결혼에 반대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내게 딱 세 가지를 물어보셨다. "너는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니?", "너는 네가 영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너의 말이 아닌데 그 언어로서 서로의 문화와 가치를 충분히 소통 할 수 있겠니?" 그리고 "너는 결혼을 하게 되면 어디서 살 거니?"(웃음)였다. 나는 "정말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다시 "너는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니?"라고 하셔서 나는 "이 사람이 아니면 결혼을 안 하고 아마 혼자 살 거예요. 근데 이 사람이라면 나도 결혼이란 걸 한번 해 볼래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그러면 결혼해라. 사람들이 욕을 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자"라고 하셨다. 결혼할 때 사람들을 다 초청해서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게 하는 건 겉치레 같아 너무 싫어서 가족들만 모아놓고 우리끼리 간단히 식을 드렸다.
ⓒ프레시안(전순옥) |
우리 어머니는 사랑이 참 많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분이셨다. 그리고 참 총명하셨다. 남의 말을 잘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머니는 또래 친구보다 초등학생에서 대학생까지 그런 친구들이 더 많았다. 젊은이들이 엄마를 너무 좋아해서 일요일만 되면 우리 집에 바글바글 모여서 같이 밥해 먹고 놀았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굉장히 재밌게 잘하셨다. 지혜가 있는 분이었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내 안에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 분이었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순옥아, 너는 잘할 수 있어"라고 많이 말씀하셨다. 유학시절에도 공부가 너무 힘들고, 장학금도 안 될 거 같다며 이런저런 걱정을 풀어놓으면 "아니야 잘 될 거야. 너는 지금까지 모든 게 다 잘됐잖니. 너는 다 잘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는 너를 믿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것들이 쌓여 지금껏 여러 고생들을 했지만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가만 보면 어머니의 여장부 같은 면을 많이 닮은 것 같다.(웃음)
예전에 어린 여공들이 좁은 공장 안에서 폐병으로 죽어갔다면 지금은 경제적으로 그 당시와 비교할 수 없는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의 폐병을 얻어 죽어간다. 목적과 방향을 잃은 세대다. 2013년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줄 수 있을까?
청년들한테 무조건 '힘내라, 청년의 때는 아프다'라고 하는 것은 좀 가혹한 것 같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겨 내라'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사실 기성세대로서 젊은 친구들에게 비전을 가지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젊은 세대를 알면 얼마만큼 아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한 가지 메시지를 준다면 '내가 태어나는 것은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닌, 뭔가 뜻이 있어서 태어나는 것이다'라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려면 굉장한 경쟁에 의해서 수만 마리 정자를 뚫고 태어나는 거다. 그렇기에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생명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한번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내가 스물 두 세살쯤 어느 미국인 선교사님 아이를 돌봐주는 일을 했었는데, 그 일이 너무 힘들고 매일 그 집에 가기가 싫었다. 아침 8시까지 아이를 데리고 학교로 가야 했는데, 말도 안 통했고 참 힘들었다. 그렇지만 아침에 거기에 가기 위해 집 밖을 나가면 햇빛이 비치고 그것이 참 아름다웠다. 그때 '세상이 참 아름답구나. 이런 걸을 볼 수 있다는 것, 내게 생명이 있다는 것이 참 좋다'라고 느꼈다(웃음).
세상을 성공적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나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을 의식하지 말고 그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정말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생각해 보면 비전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다른 사람 사랑하는 건 나중에 하면 된다. '나'를 많이 사랑해 주길 바란다.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전순옥'이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렇게 내 친구들도 같이 행복하면 좋겠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 신 나게 일하는 것, 노동의 가치를 모두가 공유하고 인정해주는 그런 사회를 가지는 것이 꿈이다.
'전순옥'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나처럼 자유분방하게 사는 거다. 다만 존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자유는 또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서 내 부모나 형제를 괴롭히거나 이 사회에 해를 주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자유만큼 남의 자유도 보장해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내가 언론의 자유를 갖고 싶으면, 다른 사람의 언론의 자유도 허용해야 한다. 영국에 살면서 무정부주의자 친구들을 많이 만났었는데, 문뜩 '그들이야말로 진짜 자유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보통 무정부주의자들을 볼 때 그들은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네들 스스로 이 사회로부터 방치되어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자유를 한껏 누리면서 동시에 남들에게 전혀 억지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볼 때 그들은 공동체에 살면서도 남한테 피해 주지 않고 제 임무를 다 하면서 살 수 있는 지능을 가졌다고 본다. 너무나 많은 사회의 법과 제도들이 인간의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차단시키기에 그것들을 거부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 자연히 타고난 것들에 대해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웃음)
ⓒ프레시안(최형락) |
(인터뷰 담당: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전공 김예리, 인터뷰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조경일)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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