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쯤에 그의 <공감의 시대>(이경남 옮김, 민음사 펴냄)가 국내에서 나왔을 때,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리프킨에게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고 떠들고 다녔었다. 그가 드디어 인간 본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며. 거기서 그는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공감 능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라며, 공감의 진화와 신경 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 분량의 3분의 1이상이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 해당될 정도였다.
물론 내가 그의 팬이 된 것은 훨씬 더 전이다. 거의 20년 전쯤에 그의 <엔트로피>를 처음 접했을 때, 엔트로피 개념이 물리학이나 화학의 울타리를 훌쩍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은 감동적이었다. 영국의 이언 윌머트 박사의 복제양 돌리(Dolly)가 언론에 공개된 이후로 국내에서도 생명공학의 사회적, 법적, 윤리적 측면에 관한 논의가 막 시작되었을 때, 그의 <바이오테크 시대>(전영택·전병기 옮김, 민음사 펴냄)는 딱 반 발짝 앞서 시대를 진단하고 처방책을 모색한 미래서의 모범이었다. 그의 문제작 <유러피안 드림>(이원기 옮김, 민음사 펴냄)은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고하고 대안적 정치 경제 체제를 모색하려는 이들에게 도마복음이었을 것이다. 밑줄을 그은 이단자가 어디 고(故) 노무현 대통령뿐이었겠는가?
▲ <3차 산업 혁명>(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
그러나 당일 아침에 응급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그가 그날 아침에 과로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강연 1시간 전에야 북 토크를 취소한다는 공식 통보가 전달이 되었다. 1시간 전쯤에 강연장에 도착해보니 그때도 이미 적지 않은 이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이내 주최 측은 행사 자체를 취소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감지하고는 대체 강연이 있을 것이라고 강연 참가자들에게 알렸다.
앗, 감히 누구를 지금 누가 대체한단 말인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고산 대표가 미웠지만 나는 이미 그들과 한 배를 타 버렸다.
이렇게 하여 나는 세계 최초로 리프킨 '빙의 강연'을 시작했다. 나는 맨 먼저 리프킨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이 이 자리에 왔다면 내가 그에게 물었을 질문들을 털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리프킨의 입장이라면 내가 한 질문들에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도 이야기했다.
이게 될까 싶었는데, 질의 응답까지 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심지어 어떤 청중은, "리프킨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하며 아예 대놓고 내게 리프킨 되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내 빙의가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었나 보다.
여기서 나는, 그때 내가 한 1인 2역을 재구성함으로써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따라서 다음에 등장하는 리프킨은 진짜 리프킨일 리 없다.
사회자 : <3차 산업 혁명>의 핵심 주장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리프킨 : 그동안 인류가 경험한 산업 혁명들은 모두 당대의 고유한 에너지 체제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융합되어 나타났다. 가령, 1차 산업 혁명은 석탄(증기기관)과 인쇄술의 융합으로, 2차 산업 혁명은 석유(내연기관)와 전자통신기술(전화, TV)의 결합으로 일어났는데, 이 두 혁명은 수직적 경제 구조 하에게 진행되었다.
이제 제 3차 산업 혁명이 시작되려는데, 그것은 재생 (가능) 에너지와 인터넷 기술의 융합에 의한 것으로서 수평적 경제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즉, 화석 에너지를 수직적으로 공급받는 분배 방식에서 탈피하여 태양광과 같은 재생 에너지를 각자 생산하고 수평적으로 공유하는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3차 산업 혁명이다.
사회자 : 이게 정말 가능할까?
리프킨 : 물론 아직 조건이 다 만족되진 못했다. 다음과 같은 핵심 조건들이 모두 만족될 때 3차 산업 혁명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첫째, 화석 에너지에서 지속 가능한 재생 에너지로 전환해야 하고, 둘째 이 재생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니 발전소를 각 건물마다 설비해야 하고, 셋째 각 건물의 남는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저장 기술의 발명과 보급이 필요하고, 넷째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여 에너지를 공유하며, 다섯째 교통수단을 수소 연료 차량으로 대체하여 에너지를 수송해야 한다. 이 조건들이 만족되면 재생 에너지가 인터넷 네트워크를 통해 수평적으로 공유되는 혁명이 시작된다. 가령, 서울의 63빌딩에서 생산한 재생 에너지 중에 남는 것을 시차를 이용해 하노이와 공유하거나 싸게 팔 수 있게 된다.
사회자 : 꿈같은 이야기인데 과학기술의 발전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 같다. 가령, 재생 에너지 기술과 에너지 저장 기술 그리고 수소 연료 차량 기술 등이 아직도 지지부진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그런 기술들을 독점하거나 지나치게 분점하는 기업들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수평적 경제 구조가 그렇게 쉽게 생겨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리프킨 : 흠…. 우선, 나는 이런 유의 기술들이 발전할 가능성에 상당히 긍정적이다. 즉, 재생 에너지 기술 개발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특히 화석 에너지의 고갈이 점점 가시화되고 있는 마당에 그것을 대체하려는 기술적 노력은 가속화할 것이다. 다만, 그런 기술에 대한 독점과 지나친 분점 문제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진짜 대안 기술들이 나오면 너도 나도 달려들어 참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제품 경쟁력과 가격 경쟁력이 상승할 것이다. 어찌되든 지금과 같은 지나친 에너지 독과점은 개선될 것이다.
사회자 : 당신은 어떤 인터뷰에서 "삼성 같은 회사가 재생 에너지 산업에 뛰어 들지 않고 뭐하냐?"고 했다. 어떤 뜻으로 한 말인가?
리프킨 : 삼성그룹 같은 초일류 기업이 최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재생 에너지 산업에 뛰어들면 기술의 발전 속도가 증가하여 3차 산업 혁명이 하루라도 빨리 올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LG그룹이나 현대기아자동차그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사회자 : 정부에 대해서는 어떤가?
리프킨 : 이게 좀 민감한 사안이지만 솔직히 말을 해보겠다.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녹색 성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3차 산업 혁명을 재빨리 준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을 냉정하게 보면 진정성에 다소 의심이 간다. 한국은 석유와 핵에너지 의존도가 너무 높다.
한반도는 태양 에너지뿐만 아니라 풍력 에너지, 조력 에너지도 잘 활용할 수 있는 자연 조건인데도 진지하게 재생 에너지에 대해 고민하고 실행하는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현재 한국이 재생 에너지를 활용하는 수준은 겨우 2퍼센트다. '녹색 성장'이라는 표어가 민망하다.
게다가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일본이 핵발전소 가동을 전면 중단하고 대체 에너지 원을 찾고 있는데 비해, 인접한 한국은 아직도 핵에너지를 마치 그린 에너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핵에너지는 그린 에너지가 아니다.
사회자 : 정부 이야기가 나왔으니, 정치적 지향과 3차 산업 혁명 간의 관계에 대해 묻겠다. 당신은 3차 산업 혁명이 정치적으로는 중립적인 것이라고 보는가? 다시 말해, 이른바 진보든 보수든 모두가 같은 친숙함을 가지고 추구할 수 있다고 보는가?
리프킨 : 3차 산업 혁명의 도래는 정치와는 관련이 없다. 보수든 진보든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하루라도 앞당기려고 함께 노력해야만 하는 그런 미션이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사회자 :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에너지의 수평적 권력을 싫어하는 세력들이 존재하지 않은가? 가령, 핵에너지 신봉자라든지, 풍력, 조력, 태양 에너지, 수소 에너지 등에 시큰둥한 기업들은 여전히 에너지의 수직적 분배 구조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리프킨 : 바로 그런 세력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다. 나는 에너지에 관한한 좌와 우가 모두 평등주의자여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자 : 아는지 모르겠지만, 올해 12월에 한국에서는 대선이 있다. 여야 모두 '경제 민주화'를 중요 의제로 놓고 있다. 하지만 대권 후보 중에 그 누구도 당신이 제기한 문제를 진지하게 꺼내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좀 황당한 질문을 해보자. 당신이 만약 한국의 대권 후보로 출마한다면 어떤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내걸 것 같은가?
리프킨 : 글쎄…. 참 어려운 질문이지만, 아시아를 향한 나의 꿈을 잠시 말하는 것으로 대신하련다. 나는 유럽연합(EU)의 리더들과 3차 산업 혁명의 꿈을 공유하기 위해 그동안 적지 않은 노력을 해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프로젝트이다. 나는 이 일을 아시아에서도 해보고 싶다.
아시아에서 에너지 네트워크를 만들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선도하는 허브의 역할을 한국이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제발 '녹색 성장'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다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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