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피 묻은 돈으로 인문학 살리면, 세상이 바뀌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피 묻은 돈으로 인문학 살리면, 세상이 바뀌나?

[프레시안 books] 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우석영 옮김, 궁리 펴냄)에서 마사 누스바움은 인문학과 예술 교육을 통해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과 상상력, 세계적 시야를 갖춘 민주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이것은 현재 교양 교육의 전반적인 경향에 대한 그녀 자신의 비판적인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누스바움의 평가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는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 있게 하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내팽개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그것은 "인문 교양과 예술이 사실 상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초·중등교육 그리고 전문대, 대학 교육에서 잘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4쪽).

민주주의란 존경과 관심에 기초해서 세워지는 것이며, 존경과 관심은 다른 사람을 단순히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로 인식할 줄 아는 공감의 능력에 기초한다(29쪽). 누스바움에 따르면, 그런 능력들은 인문 교양과 예술 교육을 통해 배양된다.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지역적 차원의 열정을 뛰어넘어 세계 시민으로서 세계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사람의 곤경에 공감하는 태도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31쪽)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대학들은 '이익 창출을 위한 교육'에 매진한 나머지 '보다 전인적인 유형의 시민 정신을 위한 교육'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인문 교육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31쪽). 간단히 말해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을 위해 인문학 교육은 밀려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 교육을 통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며, 우리의 관계를 단순한 사용과 조작의 관계가 아니라 풍요로운 인간 간의 관계로 만들어주는 사고, 상상 능력"을 함양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필경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한다.

{#8958202165#}
▲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마사 누스바움 지음, 우석영 옮김, 궁리 펴냄). ⓒ궁리
이러한 위기의식에 입각해서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에 대립되는 것으로 그녀가 제시하는 것이 인간 계발(human development) 중심 패러다임이다(44쪽). 그녀가 말하는 인간 계발 중심 패러다임이란 자신이 속한 지역적 (국가적) 상황의 한계를 넘어서 책임 있는 세계 시민이 되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계발 모델은 모든 개인이 법과 제도에 의해 존중되어야만 하고, 그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한다. 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정책들의 선정 과정에서 일정한 목소리를 내는 일이야말로 존엄한 인간 삶의 핵심 요소이다. 따라서 인간 계발 모델은 민주주의에 절대적 관심을 둔다. 인간 계발 모델이 선호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란 "다수당의 변덕스러운 횡포가 사람들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근본 권리들이 강력한 역할을 하는 종류의 민주주의, 인간적이며 인간에 대해 세심히 배려하는 민주주의"이다(57쪽).

그리고 이러한 인간 계발 교육 모델을 위한 인문학 교육의 모범으로서 저자는 소크라테스를 내세운다. 그녀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수가 아니라 논리를 따르도록 훈련(99쪽)하며, 상대편 대화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와 완전히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논리 앞에서의 평등이다.

이렇게 평등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토론을 통해 각 개인의 입장이 무엇인지 드러나며, 그 과정에서 동료 시민들을 하나의 공통된 결론으로 나가게 하는 공통의 가정과 교차점이 드러난다. 즉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상대편 입장을 존중하고 양편의 논지와 공통점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과정이 정치적 타자를 인간화하며, 상대방을 우리 자신의 집단과 적어도 일부분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성적 존재로 여기게 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논리와 논쟁 능력에 기반을 둔 비판 정신과 공감의 능력은 강력한 국제 시장으로 둘러싸인 다정당 기반의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 기반을 둔 인문 교양 교육은 성공적인 혁신 문화의 지속에 필수 사항인 상상력과 독립적 사색 기술을 강화시켜주며, 민주주의를 위해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93~136쪽).

그러고 나서 누스바움은 소크라테스적 페다고지에 기초한 교육 개혁의 예들을 제시한다. 루소의 <에밀>, 요한 페스탈로치, 프리드리히 프뢰벨, 애모스 브론슨 올컷, 호레이스 만, 존 듀이 그리고 그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등이다. 이들은 특정 유형의 시민을, 즉 적극적이고 비판적이며 호기심에 가득 차 있고, 권위와 동료 압박에 저항할 줄 아는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적 가치들을 활용하는 살아 있는 전통을 보여준다(129쪽).

그러나 오늘날 다원적인 세계에서 사실적 지식과 논리적 지식만으로 민주적 시민을 양성할 수는 없고, 거기에 상상력이 보태져야 한다. 상상력을 기르는 데는 놀이와 예술이 대단히 효과적이다. 누스바움은 타고르가 인도에 설립한 학교에서 예술을 통한 교육이 어떻게 상상력을 함양시켰는지 보여준다(163~199쪽). 그러므로 놀이와 예술 교육을 통해 상상력을 함양하고 소크라테스적 페다고지를 통해 공감의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민주적 세계 시민으로 인간 계발을 하는 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기왕에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책들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띠는 점은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을 민주주의, 민주적 세계 시민 양성이라는 과제와 연결시키고,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 '이익을 위한 교육'과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서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는 데 있을 것이다. 또 민족이나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서 세계 시민 의식을 함양하는 것을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의 핵심에 있는 것으로 보고, 인문학 교육을 통해 공감의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그러한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것 역시 눈에 띠는 점이다.

아마도 이러한 통찰은 타고르의 교육 개혁 운동을 누스바움이 연구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령 잔혹한 기계와 같은 현대 국가에 의해 사회적 삶이 관료제화 되고, 사람들의 도덕적 상상력이 살해당하는 데 대한 타고르의 비판을 저자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가 그 부품으로 개인들을 이용하는 사태에 맞서서 강력한 비판적 대중문화를 형성하여 그러한 악마적 흐름을 저지해야 한다는 타고르의 주장 역시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저자는 '국가라는 기계'를 넘어서는 교육에 대한 타고르의 생각을 '세계 시민 양성을 위한 교육'으로 변화,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 '이익을 위한 교육'은 안 된다는 누스바움의 확고한 신념 역시 영성을 중시하는 타고르의 사상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통찰력 있는 언급들이 자주 나오는데, 가령 그리스 고전 전문가로서 그가 소크라테스를 교육과 연결하여 '소크라테스적 페다고지'를 생각해내고, 이것을 독립적이며 공감하는 사고 능력으로 이해한 것 역시 흥미롭다. 나아가서 주요 교육 사상을 소크라테스적 페다고지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거기에는 많은 유익한 정보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을 통해 누스바움이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기존의 세계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 안에서 다원적 세계 의식을 가진 엘리트 시민을 길러내는 것을 인문 교양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을 추구하는 이 책을 읽고 떠오르는 질문은 저자가 전제하는 '민주주의'가 정말로 철저한 민주주의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여러 차례 중요한 통찰을 보여주면서도 이 책에서는 오늘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인문학적 교양 교육을 위한 배경으로서 존재할 뿐, 그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접 대면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은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과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을 대립시키고 암묵적으로 인문학 교육이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지만, 사실은 인문학 교육이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의 인문학 자체가 바뀌어야 하고, 비판적으로 성찰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 부분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마치 인문학 교육이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소크라테스적 페다고지가 정말로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 되려면, 아무리 위축되었다 하더라도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인문학 교육 자체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진정한 대립은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과 '인문학 교육'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국가의 악마적인 지배를 유지하는 인문학 교육과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인문학 교육 사이에 있다. 만일 누스바움에게 이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면, 미국의 교양 교육이 유럽과 아시아 나라들에 비해 우월하고, 답답한 관료가 아니라 이해심 넘치는 부자들로부터 인문학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데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태평하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대목이 미국의 교양 교육에 대한 누스바움의 믿음과 자부심을 여과하지 않은 채 드러내는 발언들이었다. 그녀는 수차례에 걸쳐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하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의 경우, 우리는 우리의 업무에 그 어떤 공감도 하지 못하는 정부 관료들과 굳이 공조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그들의 교육관이 우리의 교육관과 꽤 잘 맞는 부유한 졸업생을 찾으면 그만이다. 대체로 그들은 다른 분야는 어땠는지 몰라도 자신들의 학부 시절 인문 교양 교육만큼은 사랑했던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정신의 삶을 사랑하며, 다른 이들이 정신의 삶을 즐기기를 희원한다. 다른 어떤 나라가 이러한 미국의 시스템을 갖추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교육 시스템의 근간에는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미래 세대에 전하길 원하는 것에 대한 여러 학부 소속 교육자들의 개인적 관심과 더불어 학부 과정의 폭넓은 인문 교양 교육이, 자선 기부금에 주어지는 세금 혜택이, 나아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박애주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어떤 나라가 이러한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러한 과업의 달성에는 숱한 세월이 소요될 것이다. 미국인은 미국의 행운에 대해 감사하는 편이 좋겠다." (219~220쪽)

이것은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민주적 세계 시민'인 누스바움이 오늘날 미국이 세계에서 하고 있는 역할, 미국이 전 세계에 가져오는 폭력과 파괴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부터 출발해서 인문학 교육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생각의 방향은 거꾸로 되었을 것이다. 즉 '이익을 위한 교육',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을 비판하면서 인문학 교육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오늘날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이러한 파괴적인 세계 상황을 가져온 사태의 근저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사실에 근거해서 미국의 인문학 교육의 문제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데서 출발해야 했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인문학 지원 시스템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그 돈이 어디서 오며, 어떤 돈인지, 대학의 평가 시스템과 그 안에서 인문학의 위치는 어떠한지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할 내용이 너무나 많다. 그런 분석 없이 내놓는 인문학 교육 강화란 공허하다.

사실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육은 국가적 차원에서건 개인적 차원에서건 애초부터 현실적인 이익 추구로서 존재했고, 그렇지 않은 적이 없다. 다만 오늘날 세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나 각 개인의 이익 추구는 극단적인 경쟁과 물질주의의 경향을 띰으로써 결국은 자기 파괴적인 경향을 노정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리고 돈과 권력, 숫자가 판을 치는 자학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인문학 교육을 포함해서 교육 체계 전체가 동원이 돼서 일조하고 있다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이 자학적인 시스템과 직접 대면해서 성찰하는 태도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미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그다지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자학적인 시스템 안에서 교양 있고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인식을 갖춘 민주적 세계 시민으로 '인간 계발'을 하는 것은 자학적 시스템 자체를 멈추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인문학과 인문학자들이 삶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삶의 바닥으로 더 내려가야 하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배움으로써 진정한 삶의 세계에 발을 디딘 인문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인문학은 인간을 교육을 통한 '계발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주체'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고, 보다 철저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