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편협한 눈이라니
음흉한 웃음을 짓는 노파로도, 예쁜 옆얼굴을 가진 언니로도 보이는 신기한 착시 그림들을 기억하는가. 어릴 땐 이 그림들이 정신과 의사 뺨치는 권위의 심리 테스트로 활용되곤 했다. 예쁜 언니가 보이면 마음이 평온한 상태라느니, 노파가 보이면 불안한 상태라느니 아무렇게나 결과를 갖다 붙이기만 하면 그만이었지만, 무엇이 보이는가를 통해 마음의 상태를 가늠하고자 하는 것, 그 자체는 상당히 일리 있는 통찰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인간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이다. 보이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인식 속에 이미 그려져 있는 익숙한 뭔가를 따라 보는 것이다. 군중 속에서 너만 보인다던 남학생의 머릿속엔 정말로 '하나의 얼굴'밖엔 없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여기 토스트, 즉 구워진 빵 조각이 있다. 그 속에서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보인다는 이유에서, 2005년 영국에서 무려 2만8000달러의 거액에 경매 출품된 어마어마한 빵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흘끗 보고 '심하게 탔구먼' 하고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로 보인다는 얘기를 듣고 나면, 기묘하게도 탄 부분과 덜 탄 부분의 조합이 진짜 성모 마리아의 얼굴로 보이기 시작한다. 기차나 외제차의 앞부분이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일은 다반사고, 언젠가 우주 탐사선이 촬영한 화성 표면에서도 얼굴이 보인다며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는 우연의 결과나 불규칙한 것들 속에서, 기가 막히게도 '그럴듯한' 패턴들을 발견해 낸다.
다른 착시 현상들을 떠올려 보자. 흑에서 백으로 이행하는 농담의 계조 변화를 잘게 쪼개 이어붙인 그러데이션 막대('마하 밴드', 아래 사진)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경계선을 본다. 반대로 불연속적인 점과 선을 이어서 연속된 모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착시라고 볼 순 없지만 무수한 점으로 연결된 인쇄물이나 픽셀의 조합인 웹 화상이 바로 그 원리를 따른다. 우리가 보는 그림이나 문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 마하 밴드. ⓒdessin.art-map.net |
이처럼 '본다'는 행위는 우리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수로를 따르는 것이다. '얼굴'은 탄 빵이나 화성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인식 속에 존재할 뿐이다. 제각각 다른 얼굴 속에서 좋아하는 여자라는 익숙한 '패턴'을 추출할 줄 알았던 그이 역시, 아예 무시하긴 곤란한 소리를 했던 셈이다.
흔히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말한다. 어떤 현상을 부분으로 파악하지 말고 전체를 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익숙한 형태를 지닌 부분과 그것들이 이루는 인과 관계에 집착하게 되면, 내 머릿속으로 자연히 현상을 '그러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는 그저 인간의 시각이 지닌 한계이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세계관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전체에서 부분을 찾아내는 능력, 연속된 것에 경계를 넣는 능력은 무지개를 여섯이나 일곱 빛깔로 파악하는 문화적 관습은 물론, 우리의 생명관에까지 폭 넓게 영향을 미쳤다. 몸의 어딘가를 잘라 내 이어붙이는 장기 이식과 같은 일들이 바로 그런 결과다. 어떤 기능을 하는 기관 일부를 다른 곳에 이어 붙이면 그 기능이 살아날까?
'코 이식 수술'을 생각해 보자. 코라고 여겨지는 부분, 얼굴 중앙의 돌출된 부분을 정교하게 잘라낸다고 잃은 후각을 재생시킬 수는 없다. 콧구멍 안의 후각 상피에 연결된 신경섬유, 여기서 나오는 신호들이 뇌의 후각망울로 이어지는 과정을 어느 한 군데에서 절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쪼개도 알 수 없지만, 쪼개 볼 수밖에 없는 세상
지금부터 얘기할 일본의 한 분자생물학자는 인간의 눈이 관계없는 것들에 인과 관계를 부여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속을 분절하고, 경계를 강조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서 보는 것이 유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나아가 "원래 불규칙적으로 추이하는 자연현상을 억지로라도 연관 지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며 그렇게 세계를 도식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원래는 '보이지 않는 것'들 혹은 전체로서만 존재하는 것들을 나누고 쪼개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며, 나아가 그 조각을 이어붙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명관은 "이처럼 생명을 작은 부품들로 이루어진 기계 장치로 보는 발상에 의해 뿌리 깊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설명에 이른다.
▲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모두 김소연이 번역하고 모두 은행나무에서 펴낸 그의 한국어 번역서 <생물과 무생물 사이>, <동적평형>, <모자란 남자들>을 차례로 읽었다. 마침 출판사에서 네 권을 함께 '후쿠오카 신이치 컬렉션'으로 내놓은 상태였다. 소설 같은 과학책인 '후쿠오카 월드'에 빠져 있는 동안엔 다른 책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균형 잡힌 독서고 뭐고, 보고 싶은 게 생기면 그놈 밖에 안 보이는 법이다.
그의 책은 마이크로 단위에서 벌어지는 생명 활동을 날실로, 과학계의 스캔들부터 남자의 사정(射精) 쾌감이 남다른 이유와 같은 솔깃한 이야기들을 씨실로 해 한 가지 주제의식으로 촘촘히 짜여 나간다. 그것은 생명 현상을 부분의 합으로 파악하는 사고에 대한 경계다. 나아가 유전자를 변형·조작한 먹을거리나 생명 공학까지, 생명 활동은 결코 산업상의 규격품이 될 수 없다는 경고도 담고 있다.
후쿠오카는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동적(動的)인 평형 상태에 있는 시스템'이란 답을 내놓는다. 생명 현상은 물질의 합이 아니라 '시간'이 개입하는 끊임없는 흐름이란 것이다. 각 생체는 분자 단위로 보면, 환경으로부터 흘러 온 분자들이 잠시 머무르며 일시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는 '상황' 그 자체다. 이 시스템은 구성 분자 자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이 유발하는 '효과'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상, 먹고 싸는 활동을 예로 드는 게 가장 쉬울 것 같다. 우리는 하루에 60그램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고 그중 대변으로 10그램을 배출한다. 이것만 보면 사람은 50그램을 그대로 소화관에서 흡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60리터 연료를 넣은 자동차가 50리터로 열심히 달리고, (실제로 그렇지는 않지만) 10리터의 찌꺼기를 내뱉는 경우와 같다고 할까.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생화학자 루돌프 쇤하이머(1898~1941년)는 자동판매기에 주화를 넣고 껌을 뽑는다 해도 동전이 껌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라며 이런 허점을 '페니와 검(penny gum)' 사고라 부르며 비판했다.
쇤하이머는 아미노산에다 분자의 행방을 좇는 동위체 표식을 집어넣은 뒤 그 표식 아미노산을 사흘 간 쥐에게 먹여보았다. 그는 쥐가 섭취한 아미노산이 마치 연료처럼 에너지로 변한 뒤, 연소된 가스만 신속히 배출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표식 아미노산은 쥐의 온 몸으로 퍼져 뇌, 근육, 소화관, 비장, 혈액 등 모든 장기와 조직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먹은 것이 몸의 일부가 되고, 몸의 일부는 떨어져 나간 셈이다. 분해와 재생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췌장에서는 하루 60~70그램에 육박하는 대량의 소화 효소를 분해한다. 이것이 일제히 음식에서 얻은 단백질에 달려들어, 서로를 단백질의 기본 구성 단위인 아미노산으로 마구 분해한다. 분해된 아미노산은 우리가 음식물을 통해 얻은 것인지 소화 효소의 그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며, 혈류를 타고 온 몸의 세포로 흡수되고 나서야 새로운 단백질로 재합성된다. 후쿠오카는 이를 "아미노산이라는 알파벳에 의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애너그램(철자 바꾸기)"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파도가 올 때마다 모래를 빼앗기지만 휩쓸려온 새로운 모래가 빠진 자리를 끼워가며 원래의 모양을 유지하는 바닷가 모래성에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는 1년 만에 사람에게 '어머, 하나도 안 변했네'라 말을 걸지만 1년 전의 그와 현재의 그는, 분자 단위로서는 전혀 다른 사람인 셈이라는 비유도 덧붙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힘
▲ <동적 평형>(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이야기를 다시 본다는 것의 의미로 돌려보자. 앞서 우리의 시각은 우리 내부에 있던 인지의 수로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반대로 얘기하면, 애초에 수로가 없었던 것은 아무리 보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가서, 곁눈질로 보면 고양이 얼굴이 드러나는 착시 그림을 보여준다 한들 아무리 해도 그 고양이 얼굴이란 패턴을 상상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 내게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어때, 세포핵이 보이니? 하고 묻는다 한들… 그냥 배만 더 고파질 것 같다.
과학사의 위대한 장면은 대부분, 누구도 '보아주지' 않았던 것을 본 순간들이다. Y 염색체가 최초로 보인 순간도 그러했다. 네티 마리아 스티븐스라는 한 작은 대학의 보조 교원이 밀가루 속에서 꿈틀대는 작은 곤충을 쉼 없이 틈만 나면 관찰한 결과, 정자 속에는 9개의 커다란 염색체와 작은 1개의 염색체가 있음을 '보았다'. 성 결정 메커니즘은 스티븐스 이전의 유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도 명백히 지속되어 왔지만, 그 열쇠를 '본' 사람이 없기에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스티븐스 이후에는 스티븐스에만 보였던 것들을 누구나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발견'이라고 부른다.
흔히들 독서를 통해 시야를 넓힌다는 말을 한다. 실제로 시력의 범위가 커지는 것은 아니지만 은유로서는 참 명제라 할 수 있다. 빙빙 돌았는데, 실은 후쿠오카의 글이 내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열어준 현미경과도 같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아미노산이니 단백질이니, DNA의 이중나선 구조니 하는 것들이 200X 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종료와 함께 내 시야에서 깨끗이 사라졌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전에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들었던 수많은 비유와 예는 대부분 그의 책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세포의 움직임을 사람의 행동에 빗대고 직소 퍼즐처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에 비유한다. 세포들이 "너는 간세포가 될 거니? 그럼 나는 뇌세포가 될게"라며 자리를 찾아간다는, 메신저 대화 같은 설명을 통해 '세포'라는 글자가 비로소 'ㅅㅔㅍㅗ'의 조합을 넘어 뜨겁고도 생생한 무언가로 다가온다.
그는 물론, 의인화와 비유가 과학과 생명의 거대한 프로세스를 너무 단순화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한다. 하지만 그런 도구가 없다면 이 책도 다른 '과학책'들과 마찬가지로 시야 바깥으로 내팽개쳐졌을 것이다. 생명 현상처럼 흔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이거다' 하고 보여주지 않는 이상 "내가 보는 게 보는 게 아니다". 어차피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다루기로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서적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 나는 진짜 가시성이 아니라 머릿속에 없던 개념을 상상하거나 추론하는 능력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아랍 문자를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분자 단위의 생명 현상도 세상 저편에 있던 것이라 여겼던 내 앞에 작게나마 신비로운 세상이 열렸다.
물론 듣도 보도 못한 시약들이나 원소를 들어가며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또 다시 시야 협착이 나타난다. 어떤 내용들은 덮는 순간 증발해버린다. 이런 주제에 좀 더 쉽게 써 달라고, 과학 지식을 더 많은 대중에게 설명해 달라고, 과학자들에게 조르고 싶으니 더 면구스럽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프레시안 books' 39호(2011년 5월 13일자) 서평으로 접한 <말문 트인 과학자>(랜디 올슨 지음, 윤용아 옮김, 정은문고 펴냄. ☞관련 기사 : 성공하는 과학자는 대중과 아랫도리로 교감한다!)가 바로 과학자들에게 이런 능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책인 듯하다. "인류의 미래는 과학자들의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의사소통 능력에 달려 있다"는 구절까지 있다니 말이다.
▲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정준호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글을 읽는다는 행위의 의미는 다른 게 아니다. 우리의 인지 수로에 새겨져 있지 않은 일들은, 어떤 계기가 없는 이상 영원히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일, 그것이 바로 발견이며, 그 발견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바로 독서라는 행위일 것이다. 이번 독서 목록에 포함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의 저자 유홍준이 18년 전, 시리즈의 1권에서 유행시킨 말이 떠오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흔히 '보면 안다'고 하지만, 반대로 '알고자 하니 비로소 보인다'는 말도 가능하다 하겠다.
하지만 읽은 다음의 깨달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 돼야 하지 않을까. 후쿠오카는 예전에 한 어린 독자로부터 '왜 공부를 해야만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지면을 빌어, 질문을 받은 당시 충분히 하지 못했던 대답을 한다.
"우리는 보려고 하는 것밖에 보지 못한다. 그리고 봤다고 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헛것인 것이다. 우리는 한눈에 세상 전체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다.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이 현실의 실상을 알기 위함이다."
이런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 달에도 11권을 읽었습니다. 2011년 목표 100권 가운데 40% 달성. 목록은 가장 최근에 읽은 책들부터입니다.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정준호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잃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 <언어의 감옥에서>(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돌베개 펴냄) <모자란 남자들>(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문학동네 펴냄) <동적평형>(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번역에 살고 죽고>(권남희 지음, 마음산책 펴냄) <생물과 무생물 사이>(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숨 쉬러 나가다>(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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