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재주가 남다르리라는 것은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 <서재 결혼 시키기>(정영목 옮김, 지호 펴냄)의 앤 패디먼이 지은이다. 그렇다고 그이가 이토록 뛰어난 논픽션을 써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전문 용어가 넘쳐나고 특정 집단의 우월의식이 걸림돌이 될 분야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다. 논픽션 작가를 꿈꾸거나, 탐사 보도에 관심 있는 기자라면 만사 제치고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물론, 이 책을 먼저 보아야 할 이는 의대생이거나 의사일 터. 정말, 이 책이야말로 의대의 필독서가 되어야 마땅하다.
9년간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82년 10월 24일, 태어난 지 고작 석 달 된 한 몽 족 소녀가 MCMC(머세드 커뮤니티 의료 센터) 응급실로 실려 왔다. 부모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병원에 통역해줄 사람은 없었다. 아이가 왜 병원으로 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증상은 기침을 하고 호흡이 거칠다는 것이었다.
당직 의사는 차트에 이렇게 기록했다. 기관지 폐렴 또는 기관지염 초기. 불행의 시작이었다. 라오스에서 살던 몽 족인 리 부부의 열네 번째 아이인 리아는 심한 발작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의사들은 이를 알 수 없었다. 1983년 3월 3일, 세 번째로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는 발작이 멈추지 않은 상태였고, 영어를 좀 할 줄 아는 사촌이 같이 왔고, 가정의학 전공의가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일까?
▲ <리아의 나라 : 몽족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윌북 펴냄). ⓒ윌북 |
신생아는 혼을 잃을 가능성이 더 크다. 어찌 그러지 아니하겠는가. 그 혼은 아직 이승에 굳건히 뿌리내리지 못했으리라. 막 떠나온 세계와 살아있는 이들 사이에 애매하게 놓여 있으니 말이다. 아이가 슬프거나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혼은 떠나버린다. 심지어 "큰 소리가 나도 겁이 나서 떠나버릴 수 있다." 리 부부는 그렇게 믿었다. 리아의 언니인 여가 아파트 현관문을 세게 닫은 다음에 사단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은 않은 생각이다.
그러나 서양 의학에서 이런 동양의 전통적 사유 방식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리아의 증상은, 최초 응급 상황에서 정확히 알았다면 치유 가능한, 간질병에 불과했다. 적절한 응급 조치와 지속적인 치료, 그리고 적절한 투약으로 증상을 완화하거나 치유할 수 있다.
의학 지식을 벗어난 것은 틀린 것이며, 치료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여겼다. 전통적인 치유 방식이나 샤먼의 의례는 한낱 미신에 불과했다. 오히려 이런 조치들이 증상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여겼다. 이런 관점을 리 부부는 물론, 몽 족이 받아들일 리 없다. 난민 시절부터 서양 의학에 불신이 싹튼 바 있다. 불쾌하고 불안하고 불만으로 가득했다. 갈등의 불씨는 여기서 비롯한다.
앤 패디먼은 리아와 관련한 자료를 뒤적이고, 이를 바탕으로 치료에 참여했던 의사와 간호사를 심층 면접한다. 당연히 리 부부와 몽 족 사회도 조사한다. 의료 문제를 둘러싼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만큼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은 금세 깨진다. 조금 과장하자면 메디컬 드라마보다 쉽고 흥미롭다. 흡인력이 강해 책을 좀처럼 손에서 떼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몽족 아이와 미국인 의사들 사이에 벌어진 첨예한 문화 충돌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다. 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대목은 '5장 지시대로 복용할 것'이다.
리 부부의 처지에서 보자면, 약을 지시대로 먹일 수 없었다. 약의 종류가 너무 많았고, 처방이 자주 바뀌었다. 정확한 복용량을 지키는 것도 어려웠다. 단지 영어를 못한다는 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더욱이 약을 먹으면 후유증이 심하게 나타났다. 약이 아이를 낫게 하기보다는 죽게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지시대로 약을 먹일 수 없었다. 아예 안 먹이기까지 했다. 대신, 전통 의학에 대한 의존은 높아졌다. 의사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계속 응급실로 실려 왔고 차도는 없었다. 그 이유가 약을 제대로 먹이지 않은 것에 있다고 보았다. 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대로 두면 간질 중첩으로 리아가 죽을 수도 있는지라 6개월간 양육권을 박탈했다.
이 극단의 대결은 리아의 대발작으로 파국에 이른다. 1986년 11월 25일 리아는 열여섯 번째로 입원했고, 생명이 위험한지라 밸리아동병원으로 옮겼다. 다시 MCMC로 돌아왔을 때는 혼수상태로, 의학적으로는 사망이 선고된 셈이었다. 앤 패디먼이 당시 치료에 참여했던 의사들을 인터뷰할 때 리아가 사망한 것으로 여기는 듯한 증언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사들은 리아가 금방이라도 죽을 줄 알았지만, 부모는 보란 듯이 리아를 살려냈다. 단, 죽지는 않았지만 사지마비와 뇌성마비에 대소변을 못 가리고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른바 '식물인간' 상태였던 것이다."
수많은 질문이 터져나올 만한 결론이다. 누구 때문일까? 밸리아동병원의 허친슨은 놀랄 만한 증언을 한다. 리아의 뇌가 망가진 것은 폐혈성 쇼크 때문인데, 이것은 지속적으로 투약했던 데파킨이 면역 체계를 약화시켜 리아가 녹농균에 감염된 탓으로 볼 수 있단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문제는 리아의 가족이 처방대로 데파킨을 착실히 먹였다면 오히려 패혈성 쇼크가 오도록 도와준 셈일 수 있다는 점"이다.
리아가 식물인간이 된 것은, 상식에 기초한 예상과 달리, 가족 탓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았고, 어느 쪽이 그른 것인가? 리아는 전적으로 미국 의료 시스템 탓에 식물인간이 된 셈인가? 그럴 리는 없을 터다. "리 부부가 계속 라오스에 살았더라면 리아는 계속되는 대발작으로 영아기나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 리 부부와 리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것은 분명하다.
이제 또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리아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대안은 있었는가, 라고. 앤 패디먼에 따르면, 있었다.
"프란체스카 파는 MCMC에서는 대체로 하지 않던 것, 특히 리아에 대해서는 더욱 안 하던 것을 여러 가지 시도했기 때문이다. 먼저 그녀는 가정 방문을 했다. 그리고 유능하고 적극적인 통역자를 대동했고, 단순한 통역자(즉 열등한 이)가 아니라 문화 중개인으로(개념상으론 대등하나 이 경우엔 우월한 이로) 대우했다. 또 그녀는 그 가족의 신념 체계 안에서 소통했다. 교섭하기 위해 자신이 신념 체계(이를테면 여성주의적 입장으로 볼 때 아내 대신 남편을 상대해야 한다는 불쾌함)를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위협하지도 비판하지도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서양 의학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계획에 의존한 게 아니라 면담 시의 직감에 따랐던 것이다. 더구나 프란체스카 파는 몽 족을 '좋아하기도' 했다. 아니, 사랑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1980년대 중반 프레즈노의 센트럴 캘리포니아 다민족 서비스 센터는 몽 족 샤먼을 고용한 적이 있다. 샤먼들은 250명에 이르는 환자를 치료했는데, 미국인들이 알면 경악을 금치 못할 치료가 시행되었다. "악귀 쫓는 의식,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의식, 큰 전자레인지 위에 사는 신령을 달래는 의식이 포함된 18가지의 치유 의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결과는? 때로는 의식 자체만으로 효과를 보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일단 의식이 거행되고 나면, 의뢰인은 정식 의료 서비스 제공자의 수술이나 약 같은 의료 행위에 대한 권고를 더 잘 받아들였다"고 보고되었다.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다. 그런데 왜 몽 족인가? 앤 패디먼은 결코 이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았다. 몽 족은 문화 충돌의 희생자이기 전에 베트남 전쟁의 희생양이었다. 여기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몽 족의 역사와 문화는 리아 사건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기에 <리아의 나라>는 홀수 장은 리아 이야기에, 짝수 장은 몽 족 이야기에 할애되어 있다.
이 책은 미국에서 벌어진 어느 소수 민족의 불행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당장, 개항기에 우리 선조가 서구 문명과 충돌하며 벌였을 고통스러운 저항과 힘겨운 적응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전통과 서구 문명이 맞서며 벌였던 숱한 일화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이 값진 것은, 오늘 우리가 다문화 사회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프고 아픈 역사를 지닌 우리는, 과연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알고,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있는가? 이주노동자들이 박해받고, 다문화 가정이 차별받는 현실을 직시하노라면, 새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가 또 다른 리아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니가? 라고.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