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역자들의 숙고에 의해 탄생한 '통섭(統攝)'이라는 용어는 그와 유사하게 진화해왔다. 포털사이트 검색 엔진에 이 단어를 입력해보라. 뉴스 항목에서만 매일 한두 건의 관련 기사가 검색될 정도다. '디지로그', '하이브리드', '노마드', '퓨전', '컨버전스'처럼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과 비교해보면, 통섭은 지난 수 년 동안 국내에서 벌어진 단어들의 생존 경쟁에서 가장 인상적인 성공을 거둔 용어다.
생존 경쟁에 내던져지는 것은 단어만이 아니다.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이 들고 나오는 가방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인기 '걸그룹'의 춤은, 심각한 변형이 일어나긴 하지만, 멀리 철책 군부대까지도 전달된다. 어떤 전자 제품은 빨리 구입하려고 매장 앞에서 진을 친 소비자를 기다리는가 하면, 다른 제품은 소리 소문 없이 시장에서 사라진다. 어떤 신을 믿는 이들은 새벽마다 특정 장소에 모여 큰 소리로 어딘가를 향해 부르짖고, 어떤 이들은 가부좌를 틀고 침묵의 시간을 즐긴다. 우리는 평생 헌신할 수 있는 가치를 찾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방황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투신한다. 이러한 인간의 행동과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물의 궤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 <밈>(수전 블랙모어 지음, 김명남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
저자는 인간의 마음 자체가 밈들이 뇌를 재편해서 자신들에게 더 나은 서식처로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난 인공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커다란 뇌는 모방의 산물로서 다른 영장류의 그것들과 구별된다. 우리의 언어도 밈이 더 많은 자신의 복제를 퍼뜨리기 위해 진화시킨 것이며, 밈은 자신의 경험과 소유물을 물려주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섹스)를 통해 자신을 맘껏 확산시킨다. 또 저자는 이타성과 종교와 같이 그동안 진화심리학적으로 설명되어온 인간의 본성도 밈 이론의 관점에서 재편한다. 예컨대 이타성의 경우, 이타적인 사람은 인기가 있고 따라서 그(그녀)의 행위는 모방되기 더 쉽고, 결국 그(그녀)의 밈이 다른 사람보다 더 널리 퍼진다. 종교적 밈의 경우에는 두려움과 이타성을 통해 자신의 밈을 더 널리 전파한다. 이때 종교적 밈의 확산은 세상에 대한 진실성과는 관련이 없다.
사실, '밈'이라는 밈은 원래 블랙모어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11장에서 인간의 문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유전자가 아닌 새로운 복제자(replicator)를 다음과 같이 도입한다.
"나는 새로운 종류의 복제자가 지구상에 최근에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눈앞에 있다. 아직은 유아기에 있으며 원시 스프 속에서 서투르게 해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낡은 유전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화적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새로운 스프는 인간 문화의 스프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복제자의 이름이 필요한데, 그것은 문화 전달의 단위, 혹은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표현해줘야 한다 (…) 이것은 meme이다." (192쪽)
도킨스는 밈의 사례로 선율, 아이디어, 캐치프레이즈, 패션, 주전자 만드는 방법, 문 만드는 기술 등을 들었고, 신념과 종교 등을 복제자의 관점에서 설명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오직 우리 인간만이 밈이라는 새로운 복제자를 진화시켰으며 그 밈들을 통해 유전자의 독재로부터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때문인지 그는 그 지점에서 밈에 대한 이야기를 멈춰버렸다. 블랙모어는 도킨스가 멈춰버린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하여 밈과 밈학(memetics)에 대한 한 권의 책을 완성했고, 추천사에서 도킨스는 밈에 대한 소박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일깨워준 그녀를 높이 평가해줬다. 그리고 여기서 도킨스는 밈 이론에 대해 유보적인 것처럼 보였던 자신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줄곧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이기적 유전자라기보다는 이기적 복제자였고, 유전자와 더불어 밈도 복제자라는 점이다.
이 책의 진정한 도발은 도킨스의 이런 뒤늦은(?) 인증에 있지 않다. 되레 그것은 밈 이론을 인간의 인지와 문화의 진화에 끝까지 적용해보려는 저자의 철저함과 진정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우리의 자아가 서로 다른 밈들의 복합체(memeplex)일 뿐이고, 밈을 전달하는 모방 능력 때문에 우리가 다른 동물과 뚜렷이 구분되며, 우리는 결국 '밈 머신(meme machine)'-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유전자가 우리의 배후에 있다는 것도 불편한데 우리의 본성을 틀 짓는 또 하나의 복제자가 있다고 하니, 또 한 번 자존심이 상할 노릇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나 블랙모어의 <밈>은 모두 유전자와 밈을 동시에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들에게 인간은 각각 유전자 기계와 밈 기계이다.
블랙모어의 밈 이론은 문화 진화에 대한 여러 자연주의적 접근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문화 진화에 대해서는 그동안 사회생물학, 이중 대물림(dual inheritance) 이론, 진화심리학, 생각 전염학(epidemiology of idea)과 같은 접근들이 있었는데, 밈학은 복제자의 관점에서 문화의 기원과 전달을 설명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이론들은 미묘한 차이를 갖는다. 가령, 사회생물학에서 문화는 인간 개체의 유전적 적응도를 높이는 '행동'의 결과물이고, 진화심리학자에게 문화는 개체의 유전적 적응도를 높이기 위한 '정신 메커니즘'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적 적응도와 상관이 없거나 오히려 그 적응도를 낮추면서까지 종(세대로 이어지는 수직적 대물림)과 횡(동세대의 다른 개체들에게 전파되는 수평적 대물림)으로 전파되는 문화 아이템들을, 그들처럼, 단지 부적응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문화에 대한 충실한 설명이 아니다.
한편, 성인의 젖당 소화 능력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유전자(젖당 소화 유전자)와 문화(가령, 낙농 문화)의 공진화 모형을 발전시킨 이중 대물림 이론가들은 문화적 적응도가 유전적 적응도를 때로 능가할 수도 있음을 보였다. 하지만 이 또한 유전자의 고삐에서 풀려 자율성을 획득한 문화에 대해서만큼은 침묵한다.
밈 이론은 유전자와 밈을 모두 동등한 자격의 복제자로 간주하고, 양쪽 모두를 통해서 문화가 생겨나고 전달된다는 주장이다. 또 생각 전염학자들은 문화가 복제 과정보다는 변형 과정을 통해 전파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문화를 인지 적응이나 인지 부산물에 묶어 놓는다. 따라서 밈학을 제외한 다른 문화 진화 이론들은 죄다 유전자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문화만을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블랙모어의 이 책은 언젠가 유전자의 사슬을 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게 된 새로운 복제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복제자의 실체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적극적인 해명의 글이기도 하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인간 본성과 문화의 진화에 대한 책들은 주로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쓰인 것들이었다. 이제 밈학의 바이블에 해당되는 이 책도 출간되었으니, 서가에 책이 꽉 찬 느낌이다. 진화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금방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진화학도만이 독자는 아니다.
모방이나 문화 전달에 관한 이 책의 도발적인 내용은, 어떤 생각이 다른 생각들에 비해 더 널리 퍼지는가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의 두뇌를 뜨겁게 달굴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통섭'이 우리 사회에 화두가 된 이유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뭔가를 따라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것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김명남 씨의 번역 또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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