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부터 기획하고 준비한 진화론 관련 대담집을 이번에 겨우 출간하게 되었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휴머니스트 펴냄)라는 제목으로, 역사학자 임지현, 생물학자 전방욱, 인문의학자 강신익, 동양철학자 김시천, 4명의 학자와 대담한 내용을 실은 책이다. 신간이 나오면 서평이 따라 나오듯 이번에 장대익 선생의 서평을 접하게 되었다.
원래 서평이란 비평을 기반에 둔 것이어서 내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비판적으로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프레시안>에 실린 이번 장대익 선생의 서평은 비판을 넘어서 편협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책의 내용을 책임질 필자가 나서서 서평자의 편협한 시각을 지적하고 싶었다. 서평자가 말했듯이 독자를 위해서 말이다.
필자는 생물학에 관련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생물학자가 아닌 철학자의 분류에 속한다. 그 말은 일선의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을 해석하고 비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류의 지식인 그룹을 인문학자이면서 동시에 메타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과학철학자나 과학사회학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서평을 쓴 장대익 선생도 마찬가지다.
메타과학자들은 과학을 해석할 수 있지만 일선의 현장 과학을 이끌어 갈 수 없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현장 과학은 항상 사실의 세계를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장 과학자가 획득한 사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은 억지이다. 과학자 스스로 자신의 과학적 성과가 깨지지 않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 사이비 지식에 해당한다. 우리들은 황우석 사태를 통해 그런 사이비 과학의 오류를 접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또한 다른 방식으로 현장 과학을 해석하는 메타과학은 진실 여부를 난도질해 한마디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은 과학과 달리 해석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과학은 사실의 세계를 일차적으로 다룬다. 반면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은 사실을 직접 대면하지 않지만 사실을 다루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양성과 창조성을 발효시키는 지식의 효소이다.
장대익 선생의 서평에는 자신의 시각만이 사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배어 있어, 이 책 속에서 다룬 해석의 발효가 담겨져 있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하려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서평 전반부는 실증 자료의 검색 수준이었다. 나는 그가 지적한 사실 관계의 오류들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수용한다. 외삼촌이 아니라 외할아버지라든가, 이빨이 아니라 이빨과 발톱이라든가, 부인의 도움이 아니라 외가의 도움이라든가, 140억 년이 아니라 45억 년이라든가 등의 지적은 전체 원고를 완전하게 감수하지 못한 필자의 전적인 책임이다.
필자가 반론을 제기하는 점은 진화론을 바라보는 서평자의 시각에 있다. 교양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그 누구라도 생물학이 다른 여타의 개별 과학과 달리 사회적 상관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게 된다. 거창한 세계 혹은 우주를 다루는 물리학과 달리 생물학은 일상의 주변 생물이나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생물학은 과학이기는 하지만 인간을 다루기 때문에 사회적인 섭동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뜻이다. 배아 복제와 같은 어려운 과학 용어가 일상적인 지식이 되기도 하며 나치의 참혹한 대학살이 생물학적 우생학과 관련된다는 말을 매스컴에서 간혹 듣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 논란들이 바로 사회생물학이라는 표제어로 엮어지고 있다.
상대 수혜 과장의 오류
▲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최종덕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
이런 식의 논리는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전형적인 말투에 해당한다. "요즘 여권이니 평등이니 뭐니 해서, 우리 같은 남자들이 정말 힘들어서 못 살겠어", "지방 분권이니 하도 떠들어대니 요즘은 정말 중앙 역차별이 심해 서울서 살기 힘들어" 이런 투의 말들이 우리 주변에 횡행한다. 최근 들어 그것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기 시작한 성 평등 의식이나 지역 균형 행정을 싹부터 싹둑 잘라내자는 생각들이다. 상대가 수혜 받고 있는 최소한의 혜택을 확대 과장 표현하여 상대를 부당한 위치로 몰고 가는 방법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연봉이 8000만 원을 넘어선 일부 노동자 그룹이 있을 때, 기득권자는 노동자 전체가 관리직보다 연봉이 더 높아서 한국 경제가 무너지게 되었다고 엄살을 극대화한다. 온갖 엄살과 왜곡을 노동자 전체에게 투영함으로써 생산 부문 한국 산업 시장의 구조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는 둥 위협적인 논리를 동원하기도 한다.
좀 엉뚱한 비유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실제로 메타과학의 해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위험이 있다. 현장의 일선 과학계에는 생물학적 결정론, 좀 더 선정적 표현으로는 DNA 결정론이 단연 지배적이며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당연한 현실을 모른 체하고, 과학 결정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몇몇 지식인 그룹이 이 세상의 지식을 독점한다고 거꾸로 비난한다면, 과학기술의 실질적인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
과학을 보는 선형적이며 단면적 시선은 정말 현대 과학 지식의 대세인 기계론적 사유 방식이나 결정론적 의식 구조에서 드러난다. 서평에서 적시된 굴드나 르원틴 같은 학자들의 목소리는 세계적으로나 한국에서 아주 제한된 수준으로 논의되는 소수인데도 불구하고, 서평자는 이런 사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왜곡하고 있다. 학계에서 굴드나 르윈틴이 진화생물학의 다수 그룹이라고 평가한다면, 그런 말은 정말 해도 너무 한 왜곡이다.
나는 서평자 장대익 선생이 그렇게까지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손해 보는 것은 그런 서평을 무심코 읽는 일반 독자들이다. 사회생물학을 보는 테두리를 국내로 좁혀보자. 구체적인 이름을 들먹이자. 사회생물학을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라고 많이 알려진 사람들은 기껏해야 김환석, 김동광 그리고 소수의 사회과학자들, 그리고 이 책의 대담자인 강신익이나 전방욱 그 외 몇몇 자연과학 관련 학자들이 있다.
세계적으로 볼 경우, 2002년 스티븐 굴드가 죽은 이후 이런 비판 지식인 그룹조차 급속하게 희미해져 가는 상황이다. 그런 지식 구도의 상황에서 소수의 비판들을 다수의 횡포라고 거꾸로 말하는 것은 상대의 기본 입장을 호도하여 상대 논리를 허구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서평자는 편의상 A팀과 B팀으로 나누어 한 편을 나쁜 놈, 다른 편을 '좋은 녀석들'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 이 책의 큰 흐름이라고 하는데, 그런 서평자의 시각은 상대의 이익 구조를 확대하여 상대가 지나치게, 그것도 과분한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그런 과대한 혜택을 받는 상대의 입장이 부당하다는 과대 논리에 기반을 뒀다. 나는 이런 논리를 '상대 수혜 과장의 오류'라고 보통 부른다.
현장 과학자가 갖는 과학 결정론의 생각들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은 플라톤에서 뉴턴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 기초론 및 과학적 인식론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과학 탐구 방법론에서 과학적 결정론을 무조건 무시하고 과학을 우연의 인식론으로 간주하면 안 된다. 이런 오판은 1970년대 신과학 운동에서 이미 발생했었음을 잘 알고 있다. 자연과학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과학의 결정론적 사유 구조를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단지 과학의 결정론적 사유가 현실 사회에 적용되어 사회결정론으로 탈바꿈되는 역사의 오류를 직시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점이다. 후자에 대하여 사회과학자들이 나섰다는 점은 오히려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회생물학자 및 관련 실증주의 해석학자들은 이러한 사회과학적 비판에 대하여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과학의 결정론적 사유 구조는 오히려 자연과학의 가장 큰 긍정적 측면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에 자연과학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자연과학적 성과들이 가치중립적이라는 명제를 빨리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가치중립성 논제는 이미 오래되고 수없이 반복된 이야기지만 여전히 많은 논란을 일으킨다. 가치중립성 논제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 결정론이 사회결정론으로 탈바꿈되는데 있어서 가치중립성 주장이 그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는 데 있다.
이점에서 과학은 비판의 여과지를 통과해야 한다. 특히 생물학 분야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메타과학자들은 과학 지식의 태생을 긍정적 시선과 함께 비판적 시선으로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이 책 <찰스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에서 바로 그런 양면의 시선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서평자는 거의 일방적으로 이 책을 한 쪽의 시선으로만 읽고 있었다.
철학적 사유의 필요성
서평자의 글 가운데 철학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말꼬리를 잡는데 주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중 하나는 다윈과 라마르크의 관계이다. 분명히 다윈의 진화론과 라마르크의 진화론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다윈은 기존의 비과학적 진화론과 질적으로 다른 라마르크 진화론의 사유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때문이었다.
서평자의 매서운 지적처럼 다윈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이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윈의 후기 저작에 그런 라마르크 친화적 발언들이 간혹 나오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문자적 차원의 관련 지식인들은 다윈과 라마르크의 관계를 여기까지만 들여다보고 있다. 외연의 과학적 명제 이면에 배선된 철학적 존재론의 지평에 놓인 다윈과 라마르크의 결정적 차이를 보질 못하기 때문이다.
실은 <종의 기원> '자연선택' 4장만 들춰봐도 그 확연한 차이를 읽을 수 있다. 단지 철학적 사유가 연습되어야만 그 차이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다윈은 라마르크 진화론의 한계가 용불용설이 아니었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라마르크 진화론의 한계는 라마르크가 철저한 목적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다윈은 라마르크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화론에서 목적론이란 진화의 끝이 사전에 설정되었거나 설정될 수 있다는 믿음 체계를 뜻한다. 다윈 진화론의 요체는 변화의 존재론이다. 변화의 존재론은 기존 목적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지평선을 폐기하는 데서 비로소 가능하다. 라마르크 저서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종의 기원> 4장을 읽었다면 다윈의 철학적 존재론에 접근할 수 있다. 진화의 목적점을 완전태 (towards perfection in all organic beings)에 설정한 라마르크의 입장을 다윈은 4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여러 생물학자들이 다윈과 라마르크의 유사성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그 유사성의 기준이었던 용불용설 이론이 다윈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반면 목적론의 기준에서는 다윈과 라마르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생물학자라면 이런 존재론의 차이를 놓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철학자가 이런 차이를 놓친다면, 그는 철학적 훈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철학적 사유는 추상적 형이상학의 유희가 아니다. 특히 과학에서 철학적 사유의 깊이는 과학의 성과를 더 상승시키는 실용적 가치가 있다. 철학은 과학 안에서 할 일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서평자가 이 책을 처음부터 편견을 갖고 읽었다는 것은 그의 짧은 서평 원고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기독교와 진화론 사이에서 드러난 다윈의 심리적 갈등에 대한 부분이다. 서평자의 말 그대로 다윈은 죽기까지 교회와 자신의 진화론 사이에서 심한 세계관의 충돌과 심리적인 갈등 때문에 마음 아파했다. 심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말이다.
<종의 기원> 출간 이후 그런 심리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속적으로 동식물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던 심리적 배경을 종교와 과학의 분리론이라고 필자는 표현했다. 다윈의 처 엠마와의 사랑을 존중하는 마음에서라도 다윈은 잠정적으로 자신의 과학적 세계관과 당대의 종교적 분위기를 심리적으로 떨어뜨려 놔야 했었다. 이런 역사적 현실과 달리 서평자는 이 책에서 거론된 심리적 분리 구조를 마치 이론적 분리설로 과장하여 해석한 듯하다. 그렇다면 서평자의 오해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의 부제에서 보듯 진화론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재론되는지를 따져보자는 것이 이 책의 방향이기도 했다. 이 책 전체에서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과학이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어떻게 선호되며 어떻게 반성되는지를 따지면서 대담을 끌어갔다. 그런데 서평자는 진화론을 공부하는 현존 학자군의 지식 분포도를 다루지 않았다고 생뚱맞게 뭐라한다. 전형적인 범주 오류를 일으킨 지적이다.
일반 독자를 위해 여기서 말하는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가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하고 싶다. 범주 오류를 소개한 현대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예시를 통해서 말이다. 부산대학교를 방문한 방문자에게 인문관, 자연관, 도서관, 산학지원관 등, 교내 건물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다 안내했는데도, 부산대학교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방문자가 다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일은 범주 오류를 원래 캠퍼스 개념이 없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을 예시하여 설명했지만 결국 대학교라는 상위 범주와 대학교를 구성하는 하위 범주를 직접 비교할 수 없다는 간단한 논리적 제안을 한 셈이다.
서평자는 진화론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필자에게 해답을 요구하는 것인지 그 의중을 잘 모르겠다. 이 책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 인문학의 책이어서 그런 해답을 요구할 수 없음을 서평자도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서평자의 글이 인간에 대한 질문, 역사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5명의 대담자들이 숙고한 대화 내용을 무시하고 지식 권력의 구조에만 관심을 둔 글쓰기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에 대한 재반론을 서평자가 보여줘야 한다.
이 글은 지난 8월 27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5호에 실린 장대익 서울대학교 교수(자유전공학부)의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서평에 대한 반론이다. (☞관련 기사 : 진화론 '제자백가'…다윈의 선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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