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통일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이런 사업을 진행하는 동안, 실제 6자회담의 문제와 남북관계의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어갈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들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통일기반 조성 프로젝트에 쏟아붓는 시간과 비용만큼, 현재의 국면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마땅하지 않을까?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몇 가지 장면들을 펼쳐보면서 따져보자.
■ 장면 1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과 귀환, 서울에서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한미 양국에 대한 북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조건 없는 정상회담을 제의했다는 사실도 알려왔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간 건 차디찬 냉소였다. '그의 역할이 끝났다'거나 '그가 현재 한반도 실정을 모른다'는 식이다. 나아가 일부 신문은 그에게 '색깔론'의 비난마저 내비쳤다.
1994년 카터가 평양을 방문하고 당시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 제안을 알려왔을 때,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이를 즉시 환영하고 수용했다. 지금의 정부가 '진정성'을 운운하며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몰아치는 것과 비교된다. 도대체 '진정성'은 어디에서 나오고, 또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까? 북한의 진정성 확인이 그만큼 중요하다면 직접 만나 확인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그런 후에 판단해도 결코 늦지 않을 것이다.
■ 장면 2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방한이 있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북핵문제에 대한 한미 공조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본 <아사히신문>은 후에 클린턴 국무장관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남북대화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고 전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예로 들면서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대화에 나서기 어렵다고 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이를 오보라고 공식 부인했지만, 북핵 문제와 6자회담이 의제의 하나였다면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보도라고 판단된다.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의 남북 대화에 대한 부정적 의견 또한 북한의 진정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 진정성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제시한 전제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면 북한의 진정성은 결코 인정될 수 없는 문제처럼 보인다. 이는 사실상 북한의 굴복을 요구한 것이다. 대화는 난망해 보인다.
■ 장면 3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9일자 사설을 통해 미국 정부의 즉각적 대북 식량지원을 촉구했다. 신문은 남한이 식량지원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오바마 행정부는 식량지원에 나서야 한다며, 정치적 문제와 인도적 지원은 별개라고 주장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명박 대통령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곁들였다.
그리고 때를 같이해 세계식량계획(WFP)은 북한에 대한 긴급 식량지원을 개시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어떤 식으로든 WFP에 동참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정부는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 장면 4
월간 <민족21>은 5월호에서 세계적 호텔 기업인 켐핀스키 그룹이 금강산 특구에 진출한다고 보도했다. 켐핀스키 그룹은 원산공항의 현대화 및 호텔·도로 건설 등을 통해 금강산 관광지를 현대적으로 개발할 예정이라고 전해졌다. 이에 앞서 북한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는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 독점권 취소를 발표했다. 켐핀스키 그룹의 투자에 앞서 관련 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또한 북한의 라선 특구에 중국의 대대적 투자 계약이 이루어졌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투자 금액은 약 2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에 국제무역센터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역시 중국계 기업 및 은행의 투자다. 그동안 말로만 떠들썩했던 북중 간 투자·경제협력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해 착공식만 했던 압록강대교 공사도 날씨가 풀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온다. 북중 경제협력은 구체화되고 있지만 한국 정부의 금강산 관광 재개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의 대북 봉쇄망은 아무 효과도 없는 듯하다.
▲ 지난달 26일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 어린이로부터 환영의 꽃다발을 받고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제의를 전했지만, 한국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카터의 방북은 민간 차원의 활동'이라고 의미를 축소하면서 '북한이 남쪽에 제안할 게 있으면 직접 해야 한다'고 일축했다. ⓒ연합뉴스 |
위의 장면들은 최근에 나타난 몇 가지만 추려 본 것이다.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 조짐 및 북‧중의 6자회담 재개 추진 움직임 강화, 그리고 이와 관련된 민간 트랙의 활발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태도는 거의 변화가 없다. 카터 전 대통령의 서울에서의 기자회견에 대한 반응에서도 나타났듯, 그저 '우리가 주도한다'는 일관된(?) 입장과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가 전제가 돼야 한다는 주장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물론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한국은 북한과 중국이 던진 '남북 수석대표 회담-북미회담-6자회담'이라는 기본적인 프로세스에 합의했다. 정부는 이에 대해 한국이 일관되게 주장한 '남북 대화 우선'이라는 원칙이 관철된 것이라며, 위의 프로세스는 원래부터 우리 정부의 안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꽉 막힌 상태에서 접점을 찾아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정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입지가 자꾸만 줄어드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흘러가는 정세의 변화에 올라타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오히려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는 인상이다. 위의 장면들은 한국이 고립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아닐까?
문제는 이런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는데도 정작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연구하고 정리해 정책화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북한 및 6자회담 관련 정책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면을 헤쳐가기 위해 적극적인 안을 고안하고 머리를 맞대기보다 '내부를 향한 시선'이 훨씬 더 앞서 있다는 점이 문제다.
즉 이명박 대통령의 지난해 '8.15 축사'의 내용에 기반해 '통일기반 조성'이라는 사업이 중심 사업으로 제기돼 있고, 그것도 국민적인 공감대의 형성과는 거리가 먼 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중장기적 변화를 예측하고 여러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며 통일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당면 문제의 대안을 제시하고 국민적 설득력을 갖추어 나가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지금처럼 6자회담과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변화가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정부가 내놓는 것이 고작해야 '진정성'과 '5.24 조치'에 갇혀 '원칙'만을 반복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자칫 현안은 내팽개치고 통일·북한 문제를 국내정치에 동원하려는 것이라는 오해만 살 수 있다.
사실 현안에 대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면서 중장기적 대안을 어떻게 수립할지도 의문이다. 당면한 북핵 문제와 6자회담의 향방이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북한에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선(先) 사과와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만을 말하고 있을 때, 중국, 북한 그리고 미국은 서서히 다양한 접촉을 통해 서로 다가서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출발점에 서지도 못한 채 다른 선수의 자격만을 문제 삼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 열심히 응원하라고 독려하고 있지만, 출발점에 서있지도 않은 선수를 응원하려는 관객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정부는 사태의 전개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안 하고 있거나 못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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