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수몰민, 까닭 모를 '제주앓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수몰민, 까닭 모를 '제주앓이'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17> 내 마음의 고향, 제주 강정

"이 자의 두뇌를 20년간 멈추어야 한다"는 유명한 판결문과 함께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이 유명한 경구는 로맹 롤랑의 글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그람시가 요약한 것입니다.

제주도 강정마을의 600명이 넘는 주민, 평화활동가들에 대한 연행, 구속, 투옥, 벌금 사태 뒤에는 불법 공사 상황이 있습니다. 주민 협의를 거치지 않은 강제 과정, 전쟁을 도발하는 안보 기지, 민군복합항이 입증되지 않은 설계도, 환경문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공사, 인권 유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법 요인에 대해 제주 도지사를 중심으로 제주 주요 언론은 입을 다물거나 사실을 왜곡해 왔습니다.

제주해군기지는 미 해군 설계요구에 의해 미군 핵 항모가 입항할 규모로 설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2012년 9월, 장하나 국회의원이 밝혀냈습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시인과 작가들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후 대정, 세화 성산에 공군기지가, 산방산에 해병대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으며 제주도가 최전선화되는 것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대한민국 곳곳의 요지를 미군에게 내어준 형편임에도, 비무장 평화의 섬 한 곳 확보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조국은 무력한 나라인가에 대해 다만 슬퍼합니다.

군함에 의해 오염될 서귀포 바다와 기지촌으로 전락할 제주도의 고운 마을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제주도민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필자 주

내 마음의 고향, 제주 강정

달림은 수몰민입니다. 열다섯 살 되던 해 떠나왔으니까요. 중학교를 순천에서 다니느라 주말에만 찾아갔던 고향의 냇가가 파헤쳐져 시냇물이 흙탕물로 변하고 지형마다 다르게 흐르던 물줄기는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웅덩이가 되어서는 저 속에서 괴물이라도 튀어나올까 몸을 움츠렸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북적이던 동네 마을이 어느새 빈집들로 황량하게 변해 가고, 정들었던 곳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게 어린 나이에도 뭔가 마음에 남았던지 동네, 마을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하였지요. 음악을 하겠다고 상경해서 시작한 서울 생활은 쉽게 정을 붙이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담수가 되어 버린 고향을 찾기도 하였지만 적응 못 하는 생활만큼이나 낯설고 허망했습니다. 꼭 실체 없이 부유하는 자신 같기도 하여서 점점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더군요. 서울 생활 10여 년 만에 음악도 사람도 생활까지도 무너지던 찰나 저에게 나타난 곳이 제주도였습니다. 재즈아카데미에서 같이 수학하던 동무가 하는 공연에 게스트로 초대되어 제주를 찾았다가 이상한 마력에 이끌려 몇 날 며칠을 길도 없는 길을 따라 해변이며 산간이며 정처 없이 걷기만 하였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강촌에서 자란 기억에 바다가 낯설 만도 한데 굽이치는 파도가, 검은 바위가, 불어오는 바람이 사라진 내 고향을 다시 만난 양 몸에 감기는 것이었습니다.

ⓒ노순택

포기하고 싶었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모양새가 너무도 무던하여 가만히 눈 감고 있으면 숨 쉬어지는 공기와도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자연스레 제주 앓이가 시작되었죠.

유럽 배낭여행을 가서 찾은 그 유명하다는 나폴리 해변에서도 아름답다는 아말피 해변에서도 제주를 그리워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매년 단독 공연을 치르고 나서는 습관처럼 짐을 싸들고 제주로 향했습니다. 처음 여행했던 것처럼 정처 없이 걷다가 맘에 드는 곳이면 몇 시간이고 주저앉아 망중한을 즐기기도 했고요. 다리라도 아플라 치면 히치하이크 인심이 후한 덕에 차를 얻어 타고 다음 목적지를 향하는 맛도 그럴싸했습니다. 어느 도민께서는 혼자 하는 여행이 안쓰러웠는지 차를 태워주시는 와중에 맛난 식사까지 대접해 주시더군요.

한 번씩 그렇게 다녀오면 소진되었던 에너지가 거짓말처럼 충전되었습니다.

그 힘으로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버텨온 시간들 속에 '내가 왜 그렇게 제주를 좋아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새삼스레 해 보기도 하면서 받기만 하는 고마움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요. 그런 와중에 강정 마을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그 아름다운 곳에 해군기지도 요령부득이었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된 채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공사라니요.

어렸을 때야 고향이 왜 그렇게 잠기는지 영문도 모르는 채 국가에서 하는 일이니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로만 치부했겠지만, 이후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기억의 향수는 어디에도 보상받을 길 없었고, 곳곳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파헤쳐져 가는 자연의 아픔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던 터에 전쟁을 위한 기지가 제주에 들어선다니 그것도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는 강정에 말이죠. 참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문화제로 강정을 찾았을 때, 지역 주민 여러분들의 얼굴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었네요. 지루한 싸움에 지칠 만도 한데 밝은 표정으로 흥겹게 방문객을 맞던 그분들은 제주가 치유이고 평화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고 계셨지요 .

그 와중에서도 강정은 저에게 또 다른 삶을 선물해 주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같이할 옆 지기와의 만남입니다. 지금은 구럼비가 조금씩 파괴되고 곳곳이 공사로 신음하고 있지만 이 아픔이 지나가고 어느 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을 때 태어날 아기와 함께 강정천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수영을 하고 구럼비 바위 위에서 맨발로 춤출 날을 상상해 봅니다.

평화의 섬 제주,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강허달림

싱어송라이터. 정규 앨범 <기다림 설레임>, <넌 나의 바다>, EP 앨범 <독백> 등.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