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 재생공장에서 일하는 시리왓은 한국에 온 지 2년 6개월째다.
그는 5년을 다 마치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기 귀국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콤바인으로 농사를 짓는 아버지가 기력이 쇠해서 대신 일해주기를 바라고 있고,
둘째, 선천성 소아마비로 장애인 학교에 다니는 열 살짜리 아들이 *배가 아파서 몇 달째 학교를 빼먹고 있기 때문이다.
애 엄마가 있으면 봐주겠지만, 이혼하고 가버린 여자 원망하면 뭐하나?
"내가 빨리 가는 수밖에 없어."
급한 마음에 시리왓은
1. 비행기 표부터 사고
2. 고용지원센터에 가서 출국예정신고를 해버렸다. 출국예정신고를 해야 국민연금을 환급 받을 수 있으니까.
▲ 고무 재생공장에서 일하는 태국 사람 시리왓 ⓒ한윤수 |
하지만 막상 국민연금 공단에 가서 환급 신청을 하려고 하자, 직원이 뜻밖의 말을 했다.
"*외화송금전용계좌를 갖고 오셔야죠."
그는 외환은행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비자 기한이 이틀 지났네요. 이러면 전용계좌 못 만들어요."
비자 연장을 안 한 게 잘못이었다.
그러나 후회하면 뭐하나?
버스 지나고 손 흔들기지!
그는 발안으로 달려왔다. 도와달라고.
나는 소리부터 질렀다.
"왜 태국 사람은 꼭 이러냐? 버스 지나기 전에 와야지!"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보았다.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1. 비자 연장 후 외화송금계좌 만들기
비자 연장하려면 출입국에 벌금을 물어야 하므로, 비용이 너무 든다.
2. 태국에 가서 국민연금 신청하기
이것도 어렵다.
벽지인 *이싼 촌 사람이 여권과 통장 사본을 가지고,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방콕으로 가서, <국민연금 일시금 반환청구서>와 <해외송금 신청서>를 작성하여, 공증사무실에 가서 공증을 받고, 한국 영사관에 가서 확인을 받고, 그걸 국제우편으로 국민연금공단에 보내는 것인데 이걸 촌사람이 할 수 있겠나?
어림없다.
앓느니 죽는 게 낫다.
된다 하더라도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이제 남은 방법은 은행과 직접 부딪쳐 외화송금계좌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나는 끈질기기로 유명한 L간사에게 부탁했다.
"외환은행 00지점 찾아가서 무조건 해달라고 해봐."
하지만 L간사가 자신이 없는 듯 미적거린다. 우리 센터에 협조적이던 J차장이 전출 간 이후 그 지점에서는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은행원 출신인 U간사가 나섰다.
"제가 한 번 해보죠."
한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길래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
"U간사, 어떻게 됐어? 외화송금계좌 만들었어?"
그녀는 기운이 하나도 없이, 마치 대입시험에 떨어진 재수생처럼 말했다.
".....만들었어요."
꼭 합격해놓고 사람 애간장 말리느라고 요렇게 대답하지!
"어떻게?"
"출국예정사실 확인서를 보여주며 사정했죠. 출국하는 게 틀림없고 이거 못 만들면 국민연금 못 받는다고."
"누구하고 얘기했는데? 팀장?"
"아뇨. 창구 직원이오."
"뭐라고 안 하던가?"
"출국하는 게 확실하냐고 묻데요."
"그래서?"
"못 믿겠으면 내가 보증 선다고 했죠."
"그래 선선히 해주던가?"
"예. 창구 직원한테도 재량이 있는 것 같던데요."
"재량이 있어도 그렇지, 좋은 사람 만났네."
"맞아요. 참 좋은 사람이더라구요."
버스 지나고 손들었지만 시리왓은 *버스에 탔다.
참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배가 아파서 : 소아마비로 다리를 못 쓰기에 소화가 잘 안 된다.
*외화송금전용계좌 : 국민연금은 출국해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외화송금전용계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민연금공단에서 이 계좌로 돈을 넣으면 노동자가 본국에 앉아서 그 나라 돈으로 받을 수 있다.
*이싼 : 태국 동북부, 라오스 접경지역인 벽지.
*버스에 탔다 : 외화송금계좌를 만들었다는 뜻. 그걸 만들었기에 시리왓은 단단히 덕을 보았다. 시리왓의 국민연금은 총 260만 원이지만, 사장님은 170만원 밖에 납부하지 않았다. 따라서 출국 직후 그가 받은 돈은 170만 원이 전부였다. 그러나 열흘 후 사장님이 나머지 금액을 납부하자, 자동적으로 그의 계좌에 90만원이 추가 입금되었다. 그는 태국에서 아무 신경 쓸 필요 없이 편하게 돈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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