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관전평은 물론 월드컵을 둘러싼 정치·사회 문제, 역사, 국제정치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담을 '월드컵 감아차기'에는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 이정우 성균관대 스포츠과학부 선임연구원이 참여할 예정입니다.
<프레시안>은 또 월드컵 특별취재팀을 구성해 일반 언론들의 보도와는 다른 각도로 월드컵을 조망할 예정입니다. 한국과 북한 대표팀의 경기 직후에는 경기인 출신인 국내 최고의 축구전문가들이 내놓는 심층적인 관전평도 보실 수 있습니다.
스포츠 문제에 관한 성역 없는 비판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정희준 동아대 교수의 칼럼 '어퍼컷'과 이종성 객원기자의 '프레시안 스포츠'도 월드컵을 맞아 보다 자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남아공 월드컵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보여주었던 열정적인 거리응원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한국-그리스 전이 열리는 토요일 밤에 서울광장을 비롯해 전국의 도심 거리를 붉게 물들일 붉은 악마들의 스펙터클한 퍼포먼스를 즐겁게 상상할 것이다.
무더운 여름의 한가운데로 접어들기 시작한 주말 밤 펼쳐지는 한국-그리스 전은 거리응원을 펼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번에도 거리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모두 '대한민국' 구호와 노래를 외칠 것이다. 그러나 월드컵 거리응원을 놓고 벌이는 이상한 투전 양상은 자발적인 서포팅, 거리응원의 카니발 문화를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실 복잡한 도심에서 축구 서포팅을 한다는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전만해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광적인 축구 서포터스들 외에 유니폼을 입고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면서 응원한다는 것은 일반 시민들에게는 쑥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가대표 서포터스 '붉은 악마' 수백 명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한국-우즈베키스탄 전에서 광화문 거리에서 응원할 때 많은 시민들이 이상하고 낯설게 느꼈던 것도 불과 10년이 조금 넘은 시절의 일이다. 대형 전광판을 보고 응원해야하는 거리 응원의 특성상 도심에서의 서포팅은 당시로서는 정말로 낯선 풍경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내세운 "Be the Reds" 캠페인 이후 시민들의 도심 거리응원은 자연스런 현상이 되었고, 한국 대표팀의 승승장구로 전국의 거리는 붉은 열정으로 채워지면서 전 세계 축구 서포팅 역사상 일대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자사 상품을 광고하고 있는 한 기업의 모델들 ⓒ뉴시스 |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로 국제축구연맹(FIFA)의 상업주의가 극에 달한 이래, 월드컵 특수를 노리는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은 거리응원을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 한일 월드컵에서 서울광장 광고사용권을 획득했던 SK텔레콤이 당시 기준으로 300억 광고 및 이벤트 행사 투자에 4000억 원 이상의 광고 효과를 올리면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거리응원은 그 자체로 훌륭한 CF 콘텐츠가 되었다.
SK텔레콤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서울광장 거리응원에 필요한 대형 전광판과 경기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을 즐겁게 달래줄 수 있는 인기가수의 이벤트 쇼, 경기 응원전 이후 들어가는 청소 비용을 넉넉히 지불하고도 크게 남는 광고 특수효과를 거두었다.
당시 국가대표 서포터스 붉은악마 운영진 역시 거리응원을 선도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기업에서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서울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거리응원의 열정을 계승하기 위해 2004년에 시청광장을 잔디밭으로 조성해 서울광장으로 새롭게 오픈했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도 여지없이 서울광장에는 거리응원이 펼쳐질 것이지만, 거리응원을 둘러싼 서울시와 기업, 붉은악마와의 소모적인 신경전은 계속되고 있다. 서울시는 서울광장의 상업적 이용을 막기 위해 조례를 만들어 기업의 로고 사용을 금지하도록 하고 있지만, 광장 사용신청서를 제출한 현대자동차와 후원사인 SK텔레콤은 기업의 광고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다른 전략들을 내세울 것이다.
광장 안에서 기업 로고 노출은 어렵겠지만, 시청 지하철역 벽면, 광장 인근 주변 빌딩을 이용한 대형 현수막, 서울광장에 진입하는 거리, 시청 주변의 대형 전광판을 이용해 최대한 광고를 노출할 것이다. 여지없이 광장에 대형 무대가 만들어지고, 경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인기 아이돌 그룹 위주의 이벤트 쇼가 벌어질 것이다.
붉은악마는 광장에서의 자발적인 응원이 훼손당한다는 우려로 당초 계획했던 서울광장 서포팅을 철회하고 코엑스로 응원 장소를 변경했다가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중재로 다시 서울광장에서 서포팅을 한다고 발표했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는 "2022년 월드컵 유치를 시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축구의 최대 히트상품'인 거리 응원이 삐그덕대면 되겠냐면서 당사자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이제 거리응원은 순수함이나 자발성과는 거리가 멀게 되었다. 거리응원은 기업의 상품 판촉, 서울시의 광장사용조례, 문화부의 월드컵유치 계획, 붉은악마 운영진의 응원선도라는 이해관계들이 경합하는 세력장이 되었다.
월드컵 거리응원이 도대체 뭐 길래 서로 이렇게 얼굴을 붉혀가면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축구 서포팅이라는 게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꼭 기업이 돈을 대고, 서울시는 규정과 조례를 들이대고, 붉은악마는 꼭 응원을 선도해야하는 것인가?
물론 상업성을 경계하려는 노력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응원 장소를 계속해서 변경하는 붉은악마 운영진들의 전략적 판단도 상업성과 규정의 덫에 걸린 거리응원의 딜레마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기업이나 붉은악마, 그리고 시민들 모두 서울광장에서의 월드컵 거리응원을 보이콧하고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이 알아서 자발적으로 거리든, 호프집이든, 극장이든, 팬션이든, 그냥 집에서든 삼삼오오 즐기면 안 될까?
굳이 꼭 서울광장에 나가서 사람들의 안파에 밀려다니며, 확성기 앰프의 기계음에 시달리고, 보고 싶지 않은 광고 판촉전에 피로감을 가중시키면서 거리응원을 할 의미가 있을까?
혹시나 거리응원을 하고 싶은 시민들 안에서도 2002년 한일 월드컵 거리응원의 일치단결된 대학민국의 열정을 전 세계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가? 거리응원에 기업들이 돈을 만이 내서 유명 가수를 많이 초청하고, 양질의 대형 LED 스크린에서 실감나게 보는 것이 꼭 좋은 일일까?
말도 많고, 탈고 많은 서울광장에서의 월드컵 거리응원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모른다. 한국팀의 선전에 따라 거리응원이 2002년처럼 타오를지, 아니면 본선 조기탈락으로 그 열기가 바로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광장에서 수십 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거리응원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비용 문제와 기업의 스폰서 참여 방식은 거리응원의 본래의 의미에 역행한다는 점이다.
이제 거리응원만큼은 어떤 집단성에 대한 강박관념이나 사전에 설정된 포맷에서 벗어나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분화되었으면 한다. 한국 축구의 미래와 시민들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자발적인 서포팅을 위해 기업이 돈을 대고 인위적인 이벤트가 벌어지고, 특정한 서포터 그룹이 응원을 주도하고 월드컵 중계방송사 그것을 카메라에 담아 방송 소스로 활용하는 방식의 인위적인 서울광장에서의 응원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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