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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권력, 그러나 꺼지지 않는 예술의 자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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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야만의 권력, 그러나 꺼지지 않는 예술의 자유혼

[김상수 칼럼] 베를린에서 음악가 윤이상을 말하다

이승만과 김일성,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이명박

이명박은 장차 대한민국의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오늘까지 그의 행태로 보아서는 그가 그렇게 주장하고 또 되고 싶어 하는 '한국경제를 살린 대통령'으로 평가되기에는, 그가 알고 있는 경제란 너무나 얕고 천박하며 협소하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경제란 무엇인가?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은 더 가난해지는 경제를 말하는가? 도대체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모르는데 어떻게 경제를 알겠는가? 경제에 대한 이해는 한없이 역부족일 뿐더러 그의 경제인식은 도리어 국토를 망가뜨리고 심지어는 민주주의를 후퇴, 파괴시킨 자로 냉정하게 평가될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못된 짓을 하는 경우를 야만적이라고 한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야만적인 집권자로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 전두환, 오늘에 와서는 김정일과 이명박이 역사에 엄중하게 기록될 것이라고 나는 내다본다.

특히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잘 지키고 잘 가꾸어 '통일한국'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서 도리어 민주주의 체제를 박살내고 있는 이명박과 이명박 집단에 대해서는 곧 엄혹한 심판이 현실에서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이게 현실의 당위이고 또 역사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10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된 박정희나 1994년 7월 8일에 죽은 김일성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는 철저하게 오욕(汚辱)의 역사를 만든 당사자들이다.

경제발전을 이끌었다는 이유만으로 박정희가,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단 사실만으로 김일성의 죄가 용서될 수는 없다. 지금 남한에서 크게 우려할 만한 박정희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의 우상화와 김정일의 아들에까지 이어질 조짐을 보이는 부자간 세습, 또 수많은 인명 살상과 학살에 대해서는 이제라도 그 진실과 허구를 드러내어야 하는 시점이지만 세상은 마냥 거꾸로 가고 있다.

박정희는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부쉈고 많은 사람을 함부로 죽여 인권을 유린했으며 김일성은 시대착오적인 세습왕조를 대물림, 김씨 일가의 영생을 꿈꾸면서 수많은 동족들을 죽음과 고통의 질곡으로 내몰았고 지금도 그런 현실이다.

이렇듯, 내 역사인식은 대한민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 이승만과 박정희, 김일성 김정일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에 그 기본이 있다. 하물며 박정희 '짝퉁'인 이명박이야말로 허위, 어리석음, 광기, 무자비, 심지어는 국가 헌법까지 무시하며 민주주의를 근본으로부터 왜곡하고 국가의 위기를 부추기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이제 국가 정체성의 위기까지 걱정하는 실정임을 목격하는 수많은 한국인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경일 것이다.

용산 시민학살은 제 2의 광주학살

특히 용산 철거시민 학살은 80년 5월 광주학살에 맞먹는 사태이고 국민을 노예로 여기는 부패권력의 야만적인 행위임을 나는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용산 참사 현장에서 매일 저녁 희생자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용산 참사의 근원적 해결은 정부의 정당성뿐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과도 직결된 문제"라고 지적했겠는가.

아직도 한국 사회는 청산해야 할 것이 너무 많고 실현해야 할 과제가 너무나 많다. 인간의 가치를 일상의 사회생활에서부터 구현하는 인간의 노력이 더 절실하고, 현실사회는 무엇보다 인권이 존중되고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를 옳고 바르게 지향해야만 하는 다급한 현실이다.

음악가 윤이상을 곡해하는 행위는

그런데 여기에 반하여, 새삼 음악가 고 윤이상(1917-1995)이 마구 훼손되고 있다. 과거 박정희와 김일성 사이에서 그 한 가운데 처해 사력을 다해 한 인생을 살다가 간 음악가 윤이상이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하찮게 마구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들려 온 소식이다.

경남 통영에 지어지는 음악당 이름이 윤이상국제음악당에서 통영국제음악당으로 고쳐진단다. 원래 통영에 음악당을 짓는 까닭은 2005년 경상남도와 통영시가 통영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세계적인 작곡가가 된 고 윤이상 때문에 음악당을 짓기로 했는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2008년 12월 17일 '국민행동본부'라는 단체가 <조선일보>에 "반역자 윤이상을 기리는 초호화판 음악당은 국민 세금으로 지어주기로 하고" 라는 광고성명을 내어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조갑제 닷컴'의 조갑제도 올 1월 "국가 예산을 투입하는 건물에 '국가반역자'의 이름을 붙일 수 있나"라며 '윤이상 기념 음악당 건립 중지(또는 명칭 변경) 요구'를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시비와 주장이 이명박 정권에서는 윤이상국제음악당 명칭까지 바뀌게 된다고 들린다.

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

시대를 거슬러 가보자. 1967년에 '동백림사건'이라고 있었다. '동백림'은 당시 동독의 수도였던 동베를린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이다. 동백림 사건(東伯林事件) 또는 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대규모 간첩단 조작 사건이다.

당시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한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 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화가 이응로가 있었고 작곡가 윤이상이 있었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독일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단절 시비를 낳는 문제를 빚기도 했다.

1967년 12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윤이상은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어 다시 독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2006년 1월의 정부권고안은 휴지가 아니다

세월이 흘러 2006년 1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1967년 당시 박정희 정권이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히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뒤늦게나마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그리고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의 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부분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시 간첩사건으로 조작을 주도한 중앙정보부가 검찰과 재판부에 금품로비를 시도한 정황이 드러난 사실이다.

이는 나라의 법체계도 얼마든지 권력의 횡포로 매수와 조작이 가능하단 무서운 얘기이고 삼성 재판에서 보듯이 오늘의 현실에서도 크게 걱정할 일이다.

좀 더, 이 사건 '동백림' 사건을 살펴보자, 1967년 7월 19일 주독 대사관 이상옥 1등서기관이 당시 외무장관에게 보고한 '사후처리에 관한 보고'에 따르면 주독 대사관은 같은해 6월12일 본국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베를린에 도착하자 14일부터 일제히 행동개시에 들어가면서 관련자 거주주소확인과 행정적 지원, 이들이 필요로 한 광부 동원과 현지 차량 제공, 대사관 서기관급 3명의 교통편 제공 등의 활동 지원을 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같은 달 29일 정오 경 주요 독일 신문이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에 한국 학생들의 실종설에 대한 문의를 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자에 프랑크푸르트 및 하이델베르크의 5개 신문이 일제히 '한국 학생 실종'이 보도된 뒤 7월 4일자부터 독일 전국의 신문 방송이 실종사실을 보도하면서 사건이 확대됐다고 외무부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독일 대사였던 최덕신은 그 때 독일에 있던 자국의 동포를 박정희의 '빨갱이 만들기 제물'로 박정희에게 적극 협력했지만 이후 박정희에 반대, 미국으로 망명했고 1986년 4월에는 그의 아내 류미영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 여기서 잠시, 3년 전에 김창희 <프레시안> 전 편집국장이 쓴 "죽은 백남준'이 '산 윤이상'을 말하다"와 "동백림사건 관련자 "나는 오래 전에 용서했다"을 여기에 다시 링크한다-

어쨌든, 2006년에 발표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정권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뒤늦게나마 정부가 사과할 것을 권고한 문서는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정권이 바뀌자마자 '윤이상은 빨갱이, 간첩, 민족반역자'라는 낙인을 다시 찍으면서 오늘의 현실에서는 무용지물이 됐다.

그 결과가 윤이상국제음악당을 통영국제음악당으로 고친다는 얘기다.

독일 윤이상협회 회장을 만나다


나는 지난 7월 초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오자마자 베를린에 있는 독일 윤이상협회의 대표인 슈파러(Walter Wolfgang Sparrer)씨를 만났다. 독일 베를린에 '윤이상 기념관'이 곧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기념관의 책임자인 독일인으로부터 베를린에서의 '윤이상의 과거와 현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곡가 윤이상이 1971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지내며 130여곡을 작곡한 집이 기념관으로 바뀐다는 사실과 윤이상평화재단이 고인의 자택을 구입, 개·보수 중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그 기념관을 운영하며 독일인들에게는 그 기념관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묻고 싶었다.

아래 인터뷰는 베를린 시내 슈파러의 아파트에서 두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대담 내용이다. 이 날 통역과 사진촬영은 독일 교포 2세로 문화기획자(Culture Manager)로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팰릭스 박(Falix Park)이 도움을 주었다.


▲ 독일윤이상협회회장 슈퍼러씨(오른쪽)와 대담하는 필자 김상수ⓒFelix Park

김상수 – 어떻게? 기념관 개관 준비는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가?

슈파러 – 어려움이 많다. 공사도 여러 이유로 진척이 더디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개관이후 기념관 운영비 조달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금 고민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윤이상평화재단도 한국에서 정권이 바뀌자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단 얘기를 들었다. 당장 일 년에 일만 오천 유로(환율로 한국 돈 2800만원 정도)에서 일만 칠천 유로 정도의 관리비가 드는데, 이 돈을 어떻게 만들어 조달할 수 있을까를 지금 고민하고 있다.

김상수 – 작곡가의 음판 판매 수익금이나 기타 저작권료 수입으로는 해결이 어려운가?

슈파러 – 그 돈은 유가족에게 지급되고 있다. 그리고 유가족들도 윤이상 기념사업을 위해서 이미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

김상수 – 기념관 개관 일정과 용도를 얘기해 달라.

슈파러 – 원래는 5월 중에 공사를 마치려고 했지만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개관하면 시민들이 드나들 수 있는 기념관이 된다. 생전에 고인이 작곡할 때 사용한 악기나 여러 가지 비품들, 작업공간은 그대로 보존된다. 음악인들이 단기간 숙식하며 창작할 수 있는 공간도 기념관 안에 새로 마련된다. 그런데 이 기념관은 윤이상이 유럽에 와서 작곡한 150여 곡 중 1958부터 70년의 초기작품 20여 편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이 완성된 윤이상 음악이 만들어진 곳이다. 따라서 개관 후에는 일반에 공개돼 윤이상이 작곡하던 작업실 등을 직접 방문하여 한 예술가가 살았던 삶의 현장을 보면서 한 예술가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김상수 - 당신은 언제, 어떻게, 윤이상을 만났나?

슈파러 - 내가 윤이상을 처음 만난 때는 1976년 9월 7일 SFB 라디오의 그랜드홀에서 열린 그의 첼로 콘서트 첫 연주에서였다. 그것은 SFB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현재 독일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였는데 당시 나는 23세였고 베를린예술대학에서 음악교육과 음악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나는 1977년과 78년 겨울학기에 윤이상의 세미나를 들었다. 윤이상과 좀 더 가까워진 것은 80년대 초반부터이다. 윤이상의 학생 중 한명이 내게 찾아와 윤이상이 일본에서 출간하는 음반에 들어갈 음악 해설 서문을 나에게 부탁했다. 이 음반은 카메라타 레코드(Camerata Records)에서 출간되었고 음반회사의 사장인 일본인 이사카(Isaka)씨는 윤이상의 친구였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윤이상과 오래된 인연을 맺게 된다.

김상수 - 여기 베를린에 있는 윤이상 협회는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가? 또 자체적인 사업은 어떤 사업들이 있나?

슈파러 - 윤이상협회는 1996년 2월 16일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씨의 생일에 창립되었다. 협회 설립의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한국적 음악 스타일을 유럽에서 보전하는데 있었다. 이는 음악회나 심포지움을 통해서 음악가들에게 알려지고 파급될 수 있다. 2007년까지 음악회를 매년 열렸고 심포지움은 2년에 한번 씩 개최했다. 현재는 재정적인 이유로 이러한 사업들을 추진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그리고 북한에 인도적인 도움을 주고자 한 것도 협회설립의 중요 이유였다.

김상수 - 윤이상은 현대 음악 작곡가로 유럽과 독일에서 어떤 인물로 이해되고 있고, 현대음악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슈파러 -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윤이상은 아주 창의적인 작곡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신음악(Neue Musik, New Music)에 자신의 뚜렷한 컬러를 입혔다. 그는 현대음악 역사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음악을 결합시킨 주도적 인물로 얘기될 수 있다. 서양에서 백남준과 윤이상은 20세기 예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한국인 예술가이다. 백남준과 비교하면 윤이상은 민족적 색채가 좀 더 짙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 Walther Wolfgang Sparret ⓒFelix Park

김상수 - 윤이상은 한국의 분단상황에 처해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생을 살았다. 독일의 경우에도 예술가로 윤이상처럼 동,서독 분단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은 대표적인 음악인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겠는가?

슈파러 - 물론 독일에도 분단으로 인해 고통을 겪은 예술가들이 많다. 동독에서 추방된 작곡가이자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이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필자주- 1936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비어만은 유태인이며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가 히틀러의 파시즘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1943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당한다. 어머니 역시 독일공산당 당원이었다.

이런 부모의 가정에서 자란 그는 전쟁이후 서독 자본주의 사회에 부적응, 16살 때 자신의 사회주의적 희망을 실현할 꿈을 품고 동독으로 스스로 건너간다. 그러나 동독의 실상은 그가 기대했던 사회주의와는 큰 격차가 있었다. 그는 스탈린주의에 의해 망가져가고 있는 동독의 체제현실을 비판하는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 동독정부는 1965년 비어만을 가택에 연금시킨다. 10년간 그는 세상과 고립되었지만 그의 시와 노래는 서독에서 출판되고 불리어지면서 동독지역으로 파급된다.

그의 시집과 음반들이 복제되어 동독의 대학생들과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 은밀하게 읽혀지고 불려졌다. 동독정부는 비어만을 제거하려는 시도 중에 마침 1976년, 서독 금속노조가 비어만을 서독으로 초청하자 출국을 허가한 동독정부는 그의 동독 시민권을 박탈하면서 재입국을 금지시킨다.

이 조치는 서독에서 뿐만 아니라 동독 내에서도 엄청난 반발과 반향을 일으켰다. 동독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비어만의 시민권 박탈에 저항하면서 동독에 더 이상 사회주의 사회건설 기대나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동독을 떠나는 사태로 이어진다. 그 사건 이후 약 10년간 약 400명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여하히 동독을 떠나게 된다. 비어만 시민권 박탈사건은 '동독체제몰락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서독으로 추방당한 이후에도 비어만은 사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지키면서 반핵반전 운동, 녹색당 참여, 통일 이후문제 등 국내외 중요한 사회 정치적인 사건들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관여해왔다. 그의 시집으로는 '철사줄 하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혀' '프로이센의 이카루스' '거꾸로 도는 세상, 나는 그것을 보기가 즐겁다'등이 있고 게오르크 뷔히너 문학상(2001), 하인리히 하이네 문학상(2003) 등을 수상했고 2007년에는 독일통일에 기여한 공로로 국가로부터 '독일연방철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김상수 – 동서독의 정치적 갈등에서 윤이상에게도 중요한 일화가 있었다고 들었다.

슈퍼러 – 그렇다. 윤이상은 동독의 하프연주자 마리온 호프만(Marion Hoffmann)이 서독의 초청을 받아 서독에서 연주를 하려고 했을 때 동독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이상은 호프만이 서독지역에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동독관청에 나가서 자신을 인질로 잡고 연주를 허락하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다.

김상수 – 연주를 허락하라고 '인질'을 하겠다고 스스로 나섰다고?

슈퍼러 – 그랬다. 당시 윤이상은 음악 연주에는 절대로 정치적인 올가미를 씌워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상수 - 당신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을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리고 당시 윤이상은 어디에 있었는가?

슈퍼러 –장벽이 무너지던 날, 난 베를린 시내 거리 쿠담(Kuttam)에 나갔고 거기서 막 동독을 탈출한 동독 시민들을 만났다. 그 당시 윤이상은 음악회 개최문제로 북한에 가 있었다. 그가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장차 베를린이 통일 독일 연방국의 수도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의 말처럼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됐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있을 때 항상 베를린장벽이 열리는 것을 꿈꾸어 왔다. 1986년에는 장벽이 있는 곳에서 경계콘서트(border concert)를 주관하는 것을 그는 계획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 계획을 북한에 가지고 갔고 실제로 1988년 남북한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논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한국식'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가 두 발짝 뒤로 물러서는 그런 식 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윤이상의 인생과 음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러 번 그는 아주 깊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그는 이것을 되풀이해서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이상 ⓒ독일윤이상협회

김상수 –전형적인 '한국식'이라고?

슈퍼러 – 냉탕, 온탕, 또 냉탕식을 나는 말한다.

김상수 (웃음) - 한국 통영에서는 윤이상 음악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서울에는 윤이상 평화재단도 있는 등, 여러 가지 윤이상에 대한 한국의 기구들이 있다. 당신이 볼 때 한국에서 윤이상과 관계하는 여러 단체들은 어떤 역할들을 하고 있다고 보나? 그리고 당신이 본 통영의 윤이상 음악회는 어떻게 생각하나?

슈퍼러 – 세계적인 음악가의 성과를 같이 나누기 위한 한국의 노력들에 나는 존경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좀 더 체계적으로 많은 일을 더 할 수도 있지 않을까를 나는 기대한다. 여러 기구들과 음악회 등의 이벤트들을 통해 윤이상의 작품세계를 더 보급하고 또 계승해나갈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다. 몰론 윤이상 음악회가 많이 열려야 한다는 소망도 있지만 음악적 측면에서는 연주의 질을 특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김상수 - 1967년 6월 17일, 윤이상 선생은 한국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베를린에서 납치되어 서울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예술가나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서울구치소에 갇혔다. 그 때 독일에서는 윤이상을 다시 독일로 데려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안다. 당신은 그 사건을 기억하는가?

슈퍼러 - 당시 난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또렷하게 기억한다. 매스컴을 통해 사건의 진행을 들었고 그 때 처음으로 윤이상의 사진을 보았다. 난 그 때나 지금이나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떻게 한 예술가를, 음악가를, 간첩으로 내몰 수 있는가는 지금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김상수 - 북한은 가 보았는가?

슈퍼러 – 가봤다. 모든 생활여건이 굉장히 어렵다. 북쪽 사람들에게 자유와 음식이 허락되길 나는 바랄 뿐이다.

김상수 – 윤이상의 음악을 북한사람들은 어떻게 듣고 이해하고 있던가?

슈퍼러 - 사실 윤이상의 음악은 북한에 너무 어렵다. 또 북한체제를 지배하는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할 만큼 충분히 긍정적인 음악도 아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음악은 그들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음악, 그런 음악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윤이상의 음악은 현대음악으로 너무 수준이 높다. 차라리 윤이상의 음악은 반항, 그리고 저항의 공간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틈새'를 만든다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김상수 – '틈새'를 만든다고?

슈퍼러 – 나는 윤이상의 음악이 북한에 자유의 기운을 불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굳어있는 체제에 '틈'을 만드는 너무나 중요한 역할이다. 윤이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북한의 콘서트에서 난 지극히 한국스러운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빠져나가고 음악이 아주 매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소프트아이스크림과 같이 내 귀에는 들렸다. 이는 윤이상이 살아있을 때 북한 연주자들에게 음악의 부드러움을 상당히 강조한 사실 때문에 그 까닭이 있다고 느껴졌다.

▲ 윤이상의 악보 ⓒ독일윤이상협회

김상수 – 북한에서 윤이상 음악회의 청중은 어떤 사람들인가?

슈퍼러 - 콘서트는 동원된 관중들이 대개였다. 표를 사서 자발적으로 콘서트에 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장 같은 곳에서 동원된 단체들이었다. 이들은 사실 음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극도로 산만하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콘서트 장에 간다는 건 아무리 어려운 현대음악회라고 하더라도 즐거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윤이상의 음악회는 북한을 부드럽게 하는 것에 일조를 했다고 나는 본다.

김상수 – 박정희는 간첩으로 모함하여 윤이상을 죽이려고 했다. 북한은 1979년에 김일성이 윤이상을 초청하여 연구소도 만들고 오케스트라도 만들고 음악당도 지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김일성이 윤이상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생각하나?

슈퍼러 –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작곡가인 윤이상을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테고. 나는 김일성이 윤이상의 음악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윤이상은 자신의 고향이 있는 남쪽을 생전에 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윤이상은 운명하기 직전 한 15년간 남한과 소통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런 희망은 어떤 때는 이루어질 듯했지만 끝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상수 –윤이상이 북한을 간 것은 독재 체제를 찬성해서 간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북한도 같은 민족의 땅이고 그에게는 같은 조국이었다. 20대에 항일 운동을 했고 감옥을 갔던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갈라져있는 조국의 슬픈 현실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비좁았다고 나는 보였다.

슈퍼러 – 내가 만난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 사이의 정서는 아주 유사하다. 그래서 문제를 토론하고 어떻게 해결하는지는 거의 똑 같은 방식으로 한다고 느낀다. 단지 이데올로기가 다르다. 그러나 음악은 이데올로기를 훨씬 뛰어 넘어선다.

김상수 – 윤이상의 제자들 중에는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서울로 돌아간 한국인들이 더러 있다. 그들의 근황을 아는가?

슈퍼러 – 대단히 조심스럽지만 나는 한국의 국립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내고 정년을 끝낸 윤이상 제자 중에 현대음악 작곡가 K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재능은 윤이상에게서 왔다. K는 음악의 추상적 아이디어를 건축적인 구조적인 방식의 음악보다 선호했다. 그는 지난 한국의 정권에서 윤이상을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의 스승인 윤이상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는 큰 유감이다.

김상수 - 최근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뀐 이후에 통영에 건축하려고 했던 윤이상 음악당이 그 명칭에서 윤이상을 빼버리고 통영국제음악당으로 할 것이란다. 윤이상을 빨갱이라고 얘기하면서 윤이상을 이데올로기적인 인물로 말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슈퍼러 – 한국 정부의 조치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건 너무 어리석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다면 남한정부는 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윤이상은 민족주의자였고 한국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의 음악적 자산은 한국인을 넘어 세계인의 것이지만 막상 한국인들만이 그의 음악을 외면하겠다는 형편없는 이야기로 내게는 들린다. 한국의 귀중한 음악가를 외면하면 한국에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만약 한국에서 윤이상을 한국음악가 또는 민족음악가로 당당하게 인정한다면 그의 음악을 통해 한국은 빛이 날 것이다. 나는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한국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믿고 싶다.

베를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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