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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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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한윤수의 '오랑캐꽃']<52>

캄보디아 노동자 소펙은 전라북도 김제에서 일했다.
퇴직금 131만원을 받지 못해 센터에 왔다.
직원 한 사람이 끈질기게, 두 달 반 동안 회사와 접촉하여 그 돈을 받아주었다.
소펙이 일요일날 인사차 발안에까지 왔다. 귤 한 박스를 사가지고.

하지만 그날은 굉장히 바빠서 나는 고맙다고 간단히 인사만 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귤 하나를 먹으려고 박스를 풀어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귤에 시퍼런 곰팡이가 붙어서 절반 정도가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급하게
"소펙 불러!"
하고 소리를 질렀다. 썩은 귤을 반품시키고 새 귤로 바꿔 먹을 생각으로.

직원 하나는 소펙을 잡으러 쫓아나가고 다른 하나는 핸드폰으로 급히 소펙을 호출했다. 5분쯤 후 무기수가 탈옥했다가 잡힌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소펙이 끌려 들어왔다.

▲ ⓒ프레시안

나는 조근조근 물었다. 마치 유력한 용의자를 심문하는 수사관처럼.
"이거 어디서 샀어요?"
"안산에서요."
"오늘?"
"아뇨. 일주일 전에요."
나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은 것처럼 의기양양해서 소리쳤다.
"그러니까 썩었지!"

귤이 썩기 쉬운 봄철에 일주일씩이나 귤을 방치했다면 썩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과일가게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 결국 반품 교환의 희망은 사라졌다. 나는 새 귤로 바꿔 먹겠다는 헛된 희망을 버리고 소펙을 방면하기로 했다. "그러면 가요."

하지만 소펙은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오히려 직원들이
"괜찮아! 괜찮아!"
하며, 미안해하는 소펙의 등을 억지로 떠밀어 보냈다.

그리고는 소펙이나 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일요일이라 상담자가 계속 밀려들어서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하지만 반시간 쯤 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소펙이 다시 나타났다. 무슨 시커먼 블랙박스 같은 것을 들고서.
"이거 잡수세요."
하는데 보니까 그건 검은콩 두유 한 박스였다.

순진하기도 하지! 그는 귤이 썩은데 대한 미안함의 표시로 두유를 또 사온 것이다. 131만원에서 귤 사오고 두유 사오고 뭐가 남니?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00식품이란 상표를 보고는
"뭐 이런 걸 다!"
하며 얼른 그 박스를 받아두었다. 그건 나한테 돈을 꿔준 친구가 장복(長服)하던 그 두유였으니까. 혹시라도 꿔준 돈 내놓으라고 할까봐 그거 한번 먹어보자 소리도 못하고 침을 삼키던 00식품 검은콩 두유!

그래서 퇴근할 때 아무도 몰래 블랙박스를 들고 나왔다. 센터에는 들어오고 나가는 먹거리가 워낙 많기 때문에 직원들은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현재 내 상황은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두유?"
"조오치!" 하는 두 마디로.

감쪽같이 빼돌린 소펙의 두유로 현재 나는 살찌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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