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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촛불이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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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촛불이 세상을 바꾼다

[화제의 책] <그래도 희망입니다>

"미래란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입니다. 희망 역시 아이들 삶이 어떻길 원하는 바람이고 그에 대한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이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것도 아이들을 바로 볼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보호자입니다. 영혼의 보호자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진실한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현재를 사는 것은 아이들의 미래를 일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른들도 성장합니다."


오늘과 같은 사태를 미리 예견하였을까요. <그래도 희망입니다>(현암사)에서 문규현 신부는 아이들을 어른의 보호자라고, 영혼의 보호자라고, 아이들 때문에 어른들도 성장한다고 잠언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문규현 신부의 산문시같은 짧은 묵상 글과 홍성담 화백의 너무나 부드러운 그림을 다시 꺼내 읽고 보면서 저는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혼자 보는 세상에서는 내 것만 보이고 마주 보는 세상에서는 서로의 얼굴만 보입니다. 하지만 함께 보는 세상에서는 더 큰 풍경, 더 큰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내 안에 다른 이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힘들고 주저앉고 싶어도 희망을 잃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비춥니다... 각자 파편처럼 선 사람들은 바람에 쉬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더불어 손잡고 우뚝 서면 바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옆 사람이 내미는 손을 꼬옥 붙잡는 것이 함께 사는 길입니다."


촛불집회의 빛이 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나날이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파편화된 개인을 넘어서서 청계천에 모인 사람들은 손잡고 우뚝 선 푸르른 촛불 숲입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함께 희망을 나누는 사람들의 촛불이 지금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촛불집회를 처음 제안한 사람도, 그리고 촛불집회에 대거 참여해 정치집회와 문화축제를 결합시킨 새로운 집회 시위 문화를 만들어 내는 주역들도 중고생들입니다. 노무현은 조중동과 싸웠는데, 이명박은 초중등과 싸운다는 말이 농담아닌 진담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 ⓒ프레시안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인 1960년 그때도 그랬습니다. 당시 이승만과 이기붕은 정상의 선거로는 결코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기기묘묘 기상천외한 부정선거, 관권과 금권을 동원한 공포정치를 통해 재집권하고자 했습니다. 야당의 선거 유세가 있는 날이면 이승만 정부는 일요일임에도 나이 어린 중학생들까지 강제로 학교에 등교시켜 영화관람과 토끼사냥 등에 동원하였습니다.

3.15부정선거로 알려진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는 4할 사전투표, 5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교체, 야당 참관인 축출, 피아노 투표 등등 역사상 모든 부정과 불의의 방식이 총동원된 부정선거 박람회같은 선거였습니다. 개표가 진행되면서는 자유당 표가 99%로 나오자 자유당과 관계장관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황급히 득표율을 조정하라고 전국 시도에 지시하는 웃지 못할 촌극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때는 한국전쟁 이후 무시무시한 반공 공포정치가 사람들을 자유롭게 숨도 못쉬게 할 정도로 짓누르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 어떤 사회운동도, 그 어떤 집회도 빨갱이들 짓이라고 금기시되는 거의 정신병동과도 같은 반공 알레르기 사회였습니다. 심지어는 '인민', '동무' 등의 말까지 빨갱이 용어라고 사용조차 못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런 잔재가 남아 있긴 합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철벽 감옥을 깨부순 것이 다름아닌 중학생들이었습니다. 눈 앞에서 뻔히 벌어지고 있는 너무나 명확한 부정과 불의를 피끓는 젊은 가슴들은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1960년 2월 28일 강제로 일요일에 학교에 등교한 대구의 중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학교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갔습니다. 순식간에 대구시내로 진출한 이들은 대구시 전체를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타도의 함성으로 뒤덮어 버렸습니다. 한국전쟁의 공포정치, 이승만 독재 체제에 쫙 금이 가면서 4.19혁명이 기적처럼 폭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다수 어른들이 권력의 공포에 짓눌려, 그리고 할 수 없다는 체념과 무력한 현실타협에 굴복하고 있을 때 오히려 나이어린 중학생들이 과감하게 현실의 벽에 도전하는 저항의 용기를 꺼내들었던 것입니다.

이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기간 내내 중학생들은 부정선거 규탄과 독재 타도 시위의 중심이었으며 대학생들은 뒤늦게 이 대열에 참여했음을 우리는 역사를 배워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인간관계가 사라진 사회입니다. 아니 사회도 없고 공동체도 사라지고 인간도 사라진 황량한 사막 모래밭입니다. 그저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과 살벌한 투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직 돈을 버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린, 매일매일 날이면 날마다 허덕거리며 돈을 쫓아 죽어라 달려가지만, 돈을 버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이상한 로또 사회입니다.

학교는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사육장이 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젊은이들은 기업체의 노예가 되기 위해 죽도록 영어 공부하고 취직 시험 준비를 합니다. 결국 그 가운데 정규직이 되는 젊은이는 열에 한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그나마 정규직이 된다 한들 언제 구조 조정될 지 늘 불안하기만 합니다.

한마디로 돈이 사람의 주인이 되고, 자동차가 사람을 운전하고, 아파트가 사람을 노예로 부리고, 기계가 사람을 조작하고, 컴퓨터가 가족과 친구를 대신하는, 거꾸로 된 뿌리뽑힌 삶들의 세상입니다.

촛불집회는 다른 새로운 사회, 다른 새로운 가치를 꿈꾸는 사람들이 만나는 이전과 전혀 다른 광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래서는 안된다는 자각과 공명이 울려 퍼지는 새로운 광야입니다. 기계나 가면이 아니라 맨얼굴의 낯선 사람들이 함께 모여 다양한 얼굴들을 마주 보게 되는 새로운 아고라입니다. 여중생과 어머니들뿐만 아니라 아이 어른 모두가 모여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용광로입니다. 새로운 공동체 형성과 재건의 새싹이 돋아나는, 새로운 사회의 육묘장입니다.

공동체가 해체된 한국 사회에서 가족과 친구들의 모임, 수없이 다양한 학교와 고향 모임들, 취미 모임들이 그나마 인간관계를 지속시켜주는 공동체의 잔재들이었습니다. 인터넷 카페와 인터넷 토론장이 그나마 사람들을 이어주는 공동체 형성의 씨앗들이었습니다. 이제 광우병 소고기를 넘어서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을 활짝 열어젖힐 때입니다.

과거 이승만 시대와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학생들 통제 방식이 다시 부활했습니다. 교장과 교사들은 촛불집회 참석 학생들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청계천 촛불광장에 줄지어 선 교사들이 학생들의 이름을 적고 학교에서는 촛불집회 참석하면 징계하겠다고 협박하는 일까지 있다고 합니다. 경찰은 수업 중인 학생을 잡아다 조사하고 이게 과연 학교인지 군대인지 헷갈립니다. 21세기의 학교가 다시 1960년이나 1980년의 학교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교육 문제만 얘기하면 세상의 모든 부모는 이중인격자가 된다고 합니다. 경쟁을 반대하면서도 내 아이만큼은 일류 대학에 보내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을 비난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적 때문에 아이들이 자살하는 사회는 결코 정상의 사회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돈을 버는 데 삶의 전시간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자신의 삶을 누리는, 그런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다름아닌 부모와 어른들이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영혼에서 배우는, 지금의 현실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른들이 촛불을 들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른들이 광우병 쇠고기 반대를 넘어서서 새로운 공동체를 재형성하기 위해 나서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청계천 촛불을 가슴에 담고 어른들이 앞장서서 새로운 사회를 풀뿌리부터 만들어 나가기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미래세대와 싸우는 어리석은 이명박 정부와 조중동에 대해 비판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와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는 명백한 근거지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문규현 신부는 그런 어른들의 의무를 용기와 희망, 그리고 사랑과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용기는 소망을 현실로 만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용기가 변화와 변혁을 만듭니다.

새만금 갯벌을 살려달라 호소하며 부안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하던 그 때, 사실 참 행복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쁘고 황홀했던 순간은 제비꽃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이마를 내리고 절하는 순간 아스팔트 길 틈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보라색 제비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도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기도는 나를 움직이게 하지만 기대는 타인을 향합니다. 기도는 나를 변화시켜 길을 찾게 하지만 기대는 다른 이가 해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분명히 미래는 여성이 만드는 세상입니다. 어머니의 심성이 세상을 바꿉니다. 촛불을 든 여중생, 어린 자식과 함께 촛불을 든 어머니를 보고 제 눈에서 저절로 불그레 물든 언어가 튀어 나왔습니다.

그래도 희망입니다.

"어머니, 이 단어를 들으면 가슴이 저립니다... 억압과 죽음 아래에서 그 어머니들이 자식들의 생존과 생명의 소중함, 인간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들의 목소리가 이기심이 아닌 공존으로, 지배가 아닌 돌봄으로, 분열이 아닌 화해로, 그리고 거짓이 아닌 진실함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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