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검은 10월단' 사건(일명 '야생화' 사건)으로 잡혀 고문을 당해 오랜 기간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영래 부이사장의 이야기다.
"고문의 후유증이 집단적으로 나타났을 때 그 결과는 참 심각하다. 유대인 학살에서 일어났던 고문을 보면 고문을 받은 사람이나 고문을 한 사람이나 둘 다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받은 사람이 더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반대로 저쪽도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고문은 공동체 전체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서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다",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라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란 질문에 "박근혜 하면 박정희, 박정희 하면 유신, 유신하면 내가 고통 받았던 것이 떠오르면서 개인적으로는 치욕과 비통함을 느낀다. 과거의 문제를 풀 때는 그때마다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번 18대 대선이 그 계기가 될 것이다. 역사 문제를 지난 산업화 세대 또는 민주화 세대 입장에서 푸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든 사람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가치를 가지고 공감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이 민주 대 반(反)민주 구도로만 사회를 바라보려는 것에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약간의 저항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라는 질문에 "산업화, 민주화가 3~40년이 되면서 이들도 마찬가지로 기득권화된 부분도 있다. 그렇다 보니 이 기득권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하여 자기의 권리와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의 장을 주장하는 것이 '안철수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들을 혁명적 세력이기보다는 현실세계에 충실하고자 하는 희망적인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민주화 정신이 '안철수 현상'을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다.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사람들을 규정하면 안 된다. 인간정신에 충실하고 자연과 우주질서에 따르는 그 무엇을 가져야 한다. 여야의 문제, 진보 보수의 진영 논리가 아니다. 고고한 한국 정신의 발로여야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나는 고문을 받았던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후유증도 참았고 고문에 대한 고통과 기억에 대하여 자제를 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까 고문의 기억이 살며시 찾아오니 나의 평정심을 잃게 하는 것 같다. 몇 년 전, 정신과 의사 정혜선 씨가 "고문은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 '받을 사람도 있고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있지'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런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받았던 사람에게 꼭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내일을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고, 내일은 어제와 오늘의 내일이다. 어제의 고통으로 누군가 오늘도 내일도 고통스러워한다면, 그 사람에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고통 속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고통으로 인해 우리들이 오늘과 내일을 살고 있다면, 우리 사회는 그 사람의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것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를 다잡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 "이번 18대 대선이 그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 앞으로의 역사가 고통의 시대를 지나온 이들에게 고통의 회귀가 아닌 치유의 역사가 되어주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 유영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오랜만의 인터뷰다.
우리는 보통 과거의 굴레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매달릴 때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과거란 현재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는가, 지금 나의 삶을 얼마나 풍부하게 하고 인간답게 사는가가 중요하다. 과거는 담담하게, 현재는 활력 있게 살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갖고 사는 것이다.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가 탁 트인 전망 좋은 집에서 하는 기분이었으면 한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조직국장을 하면서 민통련 조직을 실질적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이야기가 궁금하다.
민통련은 전두환 정권 하의 엄혹한 시절 1985년도에 출범했는데 정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지하에서 활동했다. 민통련은 문익환, 계훈제, 백기완 선생님을 공동의장으로 모시고 이창복 선생님을 사무총장으로 했다. 기독교 진영은 민청련과 가까웠고 민통련은 가톨릭 진영과 함께했다. 당시는 탄압이 심해서 모두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조직표는 있었으나 실제 조직 활동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지하 활동 반, 공개 활동 반 정도였다.
공개된 자리에 직함을 맡는 것 자체가 정부의 표적이 되는 상황이었을 텐데, 조직부장이면 실무자로서 중책이었는데 겁나지는 않았나?
글쎄다.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5.18 광주민주항쟁 이후에 운동의 기가 확 떨어졌다. 학교 다닐 때 반(反) 유신운동으로 감옥에 갔다 왔고 그 연장선상에서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 끝에 그냥 담담하게 갔다.(웃음)
문익환 목사님과 같이 활동했는데 문익환 목사님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문 목사님은 교수와 목회활동을 하시다가 50대에 늦게 운동을 시작하셨다. 당시 내가 함석헌 선생님을 좋아해서 몇 번 댁에 찾아갔었는데 거기에서 우연히 문 목사님을 뵈었고, 백기완 선생님을 통해서 운동과 관계없이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운동 초기 시를 쓰는 낭만적 성격의 자상한 인간상이었다. 문 목사님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데 1975년 어느 날, 마산에 강의가 있어 함께 내려갔을 때였다. 선생님이 오신 것을 알고 숙소로 검문이 나왔다. 아무래도 나는 겁을 먹어 마음이 움찔해서 불안해하고 있는데 문 목사님은 담담하면서도 아주 당당하게 일거에 호통을 쳐서 3∼4명의 형사를 쫓아버렸다. 그것을 보면서 그분의 평정심과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광장에서 투쟁하시는 모습들도 있지만 그날 보았던 그분의 내면이 갖고 있는 대범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프레시안(최형락) |
1973년 '검은 10월단' 사건(일명 '야생화' 사건)으로 잡혀 고문을 매우 심하게 당해 "재판 도중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나흘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면서 임사체험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나?
내가 복학한 70년도는 제 3공화국의 경제정책이 10년을 하고 나서 이후에 모순이 드러났던시기라고 보면 된다. '오적'(1970년 5월 <사상계>에 발표된 김지하의 작품이다. 담시(譚詩)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택해 전통적 해학과 풍자로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풍자시이다. 1970년대 초 부정부패로 물든 한국의 대표적 권력층의 실상을 을사조약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五賊)에 비유해 적나라하게 풍자함으로써, 문단에 파문을 일으키며 김지하라는 시인의 존재를 널리 알린 문제작이다. 이 작품을 발표한 <사상계>는 폐간되고, 작가와 편집인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구속되기도 했다)이 나오고 전태일 분신이 있으면서 시민들이 사회 경제적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시기였다. 72년도에 헌정 질서의 파괴라고 할 수 있는 유신이 선포되었는데 이를 통해 권력의 장기 집권이 가능해졌다. 이때 대학 내 이념동아리는 다 없애버렸다. 1973년 봄, '검은 10월단'이란 이적단체를 결성하고 '야생화'란 회보를 불법으로 뿌렸다고 체포되었다.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느니 북한사람을 만났다느니 횡설수설하면서 자기들의 시나리오대로 몰아붙였다. 그러니 고문이 자행될 수밖에. 고문은 때리면서 시작되고 심리적 공포로 몰아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 끝난다. 이 과정을 통해 육체와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다. 내가 나일 수 없고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것이 고문현장이다. 악령과 싸우다 보면 악이 측은지심으로 변하면서 나는 실루엣으로 사라진다.
고문이 어느 정도였나?
고문 속에서 취조(자술서)를 끝내고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팬티가 피로 뒤엉켜서 떨어지지 않았고 전신이 아파서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으니 철창 살에 매달려 4~5일을 지냈다. 그리고 검사 앞에 섰는데, 그 검사가 이한동 전 국무총리였다. 검사취조 하다가 다시 남산 시경 대공분실(치안본부 대공분실 전신)로 갔다. 두말없이 나를 간첩으로 몰아갔다. 맞고 치박이고 악을 쓰며 하룻밤이 지나갔다. 이후 검사가 최영광으로 바뀌었는데 말이 없이 천장을 쳐다보며 왔다 갔다 걸어 다녔다. 공포는 없어지고 무료함이 나를 덮쳤다.
병보석으로 나왔다는데 그 일은 어떻게 된 것인가? 지인의 표현으로는 당시 중정이 사망한 줄 알고 서울 영등포 병원에 치료라는 명목으로 갖다 버렸다고 하던데?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성경을 보는데 코에서 피가 흘렀다. 같이 있던 목사가 소리쳐 사람이 와 문을 열고 나를 업고 갔는데, 그 이후 정신을 잃었다. 처음에는 머리가 터질 듯 너무 아팠는데 이후 혼절해버렸다. 그리곤 조금 뒤 흰 구름 사이를 나르는 듯 평화로운 상태가 이어졌는데 내가 하늘을 나는 환상이 보였다. 그렇게 임사체험을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누군가 '깨어났구나'라고 한 말을 희미하게 들었는데 그리곤 또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혼령이 왔다 갔다 했는가. 이후 현재 용산경찰서 자리에 있는 남부시립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거기에서도 4~5일간 정신이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특히 코와 입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담당 의사가 무척 고생했었는데, 당시 병원에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이 없어 밖에서 약을 사오라고 하며 어떻게든 이 학생을 살려보겠다며 무척 애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누님과 동아리 후배였던 아내가 지금도 그 의사를 그리워한다. 그 이후 고려대 병원으로 옮기려 퇴원 수속을 밟던 중 고대 총장이 정보부 당국에 학생을 죽여 놓고 시체를 받으라는 짓이니 못 받겠다고 거절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 고대병원으로 가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치료를 받았는데 6번의 재판 중 4번은 결석재판을 받았다.
김근태 고문도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병마와 싸우다 돌아가셨다. 본인도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궁금하다.
지금은 좋다.(웃음) 지금까지 나는 고문을 받았던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후유증도 참았고 고문에 대한 고통과 기억에 대하여 자제를 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까 고문의 기억이 살며시 찾아오니 나의 평정심을 잃게 하는 것 같다. 몇 년 전, 정신과 의사 정혜선 씨가 "고문은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 '받을 사람도 있고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있지'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런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받았던 사람에게 꼭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만약 고문의 후유증이 집단적으로 나타났을 때 그 결과는 참 심각하다. 유대인 학살에서 일어났던 고문을 보면 고문을 받은 사람이나 고문을 한 사람이나 둘 다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받은 사람이 더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반대로 저쪽도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고문은 공동체 전체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다. 아직까지 이스라엘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경험을 빌미로 해서 보복 내지는 복수로 국제사회에서 무엇인가 더 얻으려고 하는 것은 인류에게 정말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순리적이고 정상적으로 치유하고 풀어가야 한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독재자는 한 사회에 정말 해가 된다.
이야기한 것처럼 암흑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고문당한 사람도, 고문을 한 사람도 모두가 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잘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사회의 고통으로 남아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민주화의 가치와 경험을 가지고 출발해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문제들을 법적조치, 위원회 등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풀어가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워낙 광범위한 역사문제가 되다 보니 단기간에 한번으로 전체를 잡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양심세력과 민주세력이 이러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난 잘못된 역사문제와 맞물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남북문제이다. 남북이 공존공생의 길로 가면 개인의 치유는 물론 세상의 치유도 될 것이다.
고문 후유증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것 같다. 고문의 기억이 스스로를 파괴시키지 않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것이 있다면?
결핵과 신경통 디스크를 달고 살았다. TB는 8∼9년 앓았으니 몸이 약해졌고, 신경통 디스크는 고통과 짜증이었다. 살다 보니 병과 타협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병과 대화하고 양보하며 살았고 그러다 보니 건강이 좋아지더라.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 민주 대 반(反)민주 구도로만 사회를 바라보려는 것에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약간의 저항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민주 대 반민주 틀 안에는 이미 다변화된 사회적 요구를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민주화세력들이 그들이 만들어낸 민주화 과정을 잘 전달하면서도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욕구를 잘 받아 안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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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세대와 뒤 세대가 서로 밀고 올라가면서 역사가 전진해 나간다. 서로가 극단적인 대립이나 반목이 아니라 서로 건설적인 비판을 하면서 조화를 만들어서 가려면 서로가 어떻게 해야 하나?
자유롭고 풍부한 담론이 중요하다. 플라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철학은 대화의 산물이었다. 이해관계와 권력관계가 치열한 때일수록 대화가 중요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대화의 풍토와 문화가 옹색하다. 현장에서 공동체 일원들과 구체적으로 경험해서 가치가 확인된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책에서 보고 외국의 이론을 받아들여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말이 많고 액션이 없다. 2~30대들은 앞 세대보다 덜 각박했다. 경제수준이 나아지고 자유스럽게 자란 뒷 세대들은 자신감으로 자유스런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 이들의 기를 살리고 지원해야 한다. 흔쾌해야 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나. 특히 지금의 2~30대들은 구체적인 것 같다. 이러한 구체성들이 앞으로 우리민주주의와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보는데 여기서 구체성이라고 하면 자기 삶의 문제들이다.
구체성이라는 것을 조금 더 설명해 달라.
우리는 모두 경제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2만 불을 넘었다. OECD에서 몇 번째로 잘살게 되었다고 하면서 경제적 파이를 국민들과 어떻게 하자는 말이 인색하다.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는 시점에서 이제는 우리나라의 파이를 어떻게 균형감 있게 배분하느냐가 중요하다.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공의 힘, 권력의 힘으로 어떻게 배분하느냐는 것이 지금의 최대 이슈이다. 이것이 바로 경제민주화 아닌가. 그리고 지속 가능한 생태환경을 살리는 일, 이 두 가지 문제는 우리나라는 물론 인류의 문제이다.
젊은 시절 정치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와 싸웠는데 지금은 모두가 경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Democracy'를 번역할 때 '민주주의'보다는 '민권주의'가 나은 것 같다. 인권 신장의 의미에서 민이 권리를 갖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의 삶이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다.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의 문제이다. 각 시민들의 역할과 능력을 적재적소에 위치시켜 국부를 늘리고 고르게 배분하는 것이 정치다.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정부가 좀 더 윤리적이고 공공의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보다는 독일을 참고로 우리식 사회 민주주의를 실현시켰으면 한다.
서울시 별관 등으로 쓰는 남산 옛 중정 자리에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었나?
서울시 별관 자리에 민주화운동기념관을 세우는 사업은 당시 이재오 권익위원장과 민주화운동 원로들이 모인 민주전당공동추진위원회장 모임에서 처음 논의되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는 어려웠고 이후 이재오 의원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있을 때 시장과 위원장, 행정안전부 장관들과 대화를 추진 중에 행안부 장관이 경남지사 선거에 출마해 논의가 중단됐다.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고 난 이후에 박형규, 함세웅 전 이사장과 현 정성헌 이사장이 함께 박 시장님을 방문해서 성사되었다. 지금 국회예산결산위원회에 계류 중에 있다. 예산이 통과되면 기념관을 만들어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전당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다.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사람들을 규정하면 안 된다. 인간정신에 충실하고 자연과 우주질서에 따르는 그 무엇을 가져야 한다. 여야의 문제, 진보 보수의 진영 논리가 아니다. 고고한 한국 정신의 발로여야 한다.
꼭 건립되었으면 좋겠다.
될 것이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정신이 바른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되지 않으면 비정상적인 나라가 아닌가. 싸이 같이 대한민국의 문화가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데, 문화 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게 역사 아닌가? 민주화운동기념관을 만든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빛나는 역사와 전통, 혼을 불러일으키는 세계 최고의 브랜드를 만든다는 일이다. 민주화 운동이 세계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동방의 등불과 같은 브랜드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민주화 운동 시기 가해자 입장에 있었던 이들이 고문의 역사를 수치로 생각해서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을 반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죽일 놈 살 놈 할 게 아니라 반성해야 한다. 살아가는 인생의 길목과 대목에서 자기반성과 성찰, 자기체득이 필요한 것 같다.
고(故) 김근태 고문의 영화 <남영동 1985>가 상영되고 있는데, 이것이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 사업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다.
좋은 거다.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순리적 트렌드(흐름) 속에서 좋은 움직임들이 조화되어 분위기가 상승되고 상생하는 것이 좋다. 김근태 고문은 민주화 운동, 특히 학생 청년 운동의 상징이지 않나. 이런 가운데 다양한 요소와 가치들이 상호관계를 맺고 결합한다는 것은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다",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라고 이야기해 크게 문제가 되었었다.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탄압에 의해서 실제 죽음 직전까지 갔었던 당사자로서 박근혜 후보의 발언 혹은 역사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박근혜 하면 박정희, 박정희 하면 유신, 유신하면 내가 고통 받았던 것이 떠오르면서 개인적으로는 치욕과 비통함을 느낀다. 역사의 문제가 왜 어려운가 하면 그것이 개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공동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문제를 감정적이 아닌 이성적으로 풀어가야 하는데 이성적으로라는 것이 원리·원칙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또 간단치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문제를 현실의 시점에서 현재 우리 공동체와 시민들이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풀어갔으면 좋겠다. 과거의 문제를 풀 때는 그때마다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번 18대 대선이 그 계기가 될 것이다. 역사 문제를 지난 산업화 세대 또는 민주화 세대 입장에서 푸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든 사람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가치를 가지고 공감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박근혜 후보에게 아버지 문제가 걸려 있는데 이 문제를 바라볼 때 사사로운 아버지의 문제로써가 아니라, 역사와 현 정치의 지도자로서, 대통령 후보로써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번 대선을 계기로 박근혜 후보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양심적이고 도덕적으로 과거의 문제를 봤으면 한다. 우리 모두가 미래로 전진하는데 걸림돌을 최소화시켰으면 좋겠다. 그렇게 풀어가야 본인도, 우리 국민도, 역사도 좋다.
청년 시절, 매우 엄혹한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 가운데서도 낭만이 있었을 것 같다. 지금도 가슴 설레는 기억들이 있다면?
큰딸 낳고 얼마 안 있다가 광주항쟁이 터졌다. 배후인물로 수배되어 1년 동안 숨어 살았다. 그런데 형사들이 수시로 집에 와 괴롭혔단다. 심지어 술 먹고 와서 행패를 부리니 어찌할 수 없어 애를 많이 울렸다고 한다. 그래서 딸한테 지금도 너무 미안하다. 고통의 기억은 낭만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트라우마다.
부인에게 프러포즈는 어떻게 했나?
못했지. 고문당한 것이 계기가 됐다.(웃음) 병원생활을 할 때 시골에서는 가족들이 겁이 나서 서울에 면회도 못 왔는데 이 친구가 종종 나를 돌보면서 가까워졌다.
산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그냥 다니다 보니 30여 년 동안 일주일에 한두 번씩 가게 됐다.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같이 다녔다. 중학교까지 매주 다니다 고등학교 가니 엄마가 가지 말라고 해서 그때는 겨울방학에는 설악산, 여름방학에는 지리산을 갔었다.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대간을 탔으니 내년부터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타려 하고 있다. 영국의 유명한 등반인 멜로리가 기자들이 왜 산에 가느냐 묻자 "산이 거기 있으니까 간다"고 했듯이 내가 살아 있으니 가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주로 혼자 간다. 혼자서 바람 따라 걷다 보면 자유의 기운이 솟는 것 같다. 홀연히 다니는 길에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원래 산길은 바람과 물의 길이었다. 그 길을 짐승들이 다녔고 뒤따라 약초꾼, 나무꾼, 사냥꾼들이 다니다 보니 길이 났다. 그러하니 산길은 마음길이며 그냥 걸어가면 길이다. 아무도 없는 산속 산천초목이 즐거워하는 순간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으면 신명이 난다. 무념무상의 경지, 야생의 혼이 솟아난다. 산신의 소리에 감흥이 흐른다. 이때가 카이로스의 순간이 아닐까.
민방요법으로 어머니의 암을 낫게 했다고 들었다. 의사도 쉽게 치유하지 못하는 암을 어떻게 낫게 했는지?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녔다. 어머니는 농사일을 하시느라 고생을 하셨다. 대학을 나왔는데도 호강도 못 해 드렸으니 마음이 무척 아팠다. 여동생이 다니는 병원에 한 달가량 입원했는데도 확실한 병명도 없었다. 서울 연세의료원에 와서 진단해보니 위암 말기로 판정났다. 마음이 당황스럽고 무거웠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의료기관에서 의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효도의 방법이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꽉 차있는 어머니의 신심(神心, 母心), 나를 있게 해준 신령스러운 기운 덩어리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퇴원을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니 미국의 정치학자 라즈웰의 '조직이나 공동체에 위기가 닥치면 원칙으로 가라'는 명제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암이란 무엇인가를 조사했다. 암균은 산소와 열에 약하다는 내용에 따라 민간요법을 했다.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주로 해 암균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쑥뜸 질을 했다. 인산 김일훈의 '신약'의 내용 따라서 조금씩 강하게 10여 일 동안 계속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입에서 요강에 2/3정도의 양의 피를 토하셨다. 기진맥진 상태에서 다시 뜸을 떳다. 다시 피를 토했다. 그 이후는 비몽사몽 상태가 되셨다. 돌아가실 것 같아서 고향으로 모셨는데 그 후 당신 일 보시며 7년을 더 사셨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생각도 들고 다정불심이란 것도 있는 것 같다. 산다는 것은 치밀한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신심(神心)같은 것이 있는 것도 같고 바람 부는 대로 사는 것도 같다. 그 내용이 신동아 1995∼1996년 동안 2번 기사화됐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 같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누구나 그렇듯 마음이 짠했다. 나도 어머니만큼 살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
유영래에게 자유란?
'농조득탈(籠鳥得脫)'이라는 말이 있다. 새장에 갇힌 새가 문을 열어주면 창공으로 '탁∼!' 날아갔을 때의 기분을 말한다. 자유라는 것은 이성적인 것보다 감성적인 부분이 많고 정적인 것 보다 아주 동적인 것 같다. 공자의 말 중에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있는데 '군자는 고정됨이 없고 언행에 따라서 통의 크기가 다양하다'는 말로 자유는 융통자재, 자유자재 함이다. 공자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날 그의 제자 중 하나가 공자에게 "선생님, 어떻게 사는 게 제일 잘사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그가 "중용으로 사는 것이 가장 잘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중용으로 사는 것이 참 어렵다. 그러니 광자로 살아라"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광자'란 진취적이고 자유롭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옆 사람이 고통과 불편함이 있는데 자기 혼자 자유롭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바람같이 살다가 바람같이 사라지는 것, 바람에 영감이 있느니 자유롭게 살아라.
이 시대에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지금은 세계화 시대다. 세계화라고 하면 활동공간이 세계화됐다는 것이다. 경제활동의 시장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놀 공간이 넓어지고 생각할 범주가 지구적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자기의 놀 장이 넓어졌다는 것, 자기가 갖고 있는 개성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의 혼과 민주화운동의 정신, 즉 한국콘텐츠로 뭉쳐 나아가면 굴기 할 수 있다. '군자불기'처럼 테두리를 치지 말라는 것이고 '만리행'이라는 말처럼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가서 몸으로 체험하고 부딪치라고 하고 싶다. 지금의 한반도는 남북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답답하다. 젊은 사람들이 이것을 '탁~!' 털어야 한다. 지금의 부국의 의미는 우리나라가 가진 잠재력을,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으로 나아가라. 자기 영역을 넓혀라. 지금의 세계는 대륙에서 바다로, 지구에서 대기권 밖까지 진출했다. 젊은 세대는 무한한 공간을 넓혀 나가야 한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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