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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조사의 '작전지휘권'도 미국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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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조사의 '작전지휘권'도 미국에 있었나

미국 조사단과 '한몸'이고자 했던 국방부 '백태'

국방부가 2000년 노근리사건 조사 당시 진상규명 보다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기에 급급했음을 보여주는 내부 지침이 12일 공개됐다. (하단 관련기사 참조)

이에 <프레시안>은 국방부의 그같은 태도가 미국과의 공동 조사와 협력 과정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주는 대미(對美) 서한 3편을 추가로 입수해 공개한다.

2000년 6월 21일 국방부 노근리 조사반의 이 모 대령이 미 조사단의 아이릭 대령에게, 6월 26일 김용길 대령이 아이릭 대령에게, 8월 21일 미상의 국방부 관리가 미 조사단의 그루퍼 대령에게 보낸 3통의 편지는 국방부가 진상조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미국의 조사를 보조하는 한국 내 '정보통' 혹은 '미디어 담당관' 역할에 치중했음을 보여준다.

서약서 방불케 하는 서한…'진상보다 동맹' 또 강조

편지가 오가던 당시는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 <더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 등 미국 언론들이 <AP> 통신의 99년 노근리사건 특종 보도를 반박하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상황 반전을 시도하고, 미 조사단도 애초 약속했던 조사결과 발표 시한을 일방적으로 연기하며 시간벌기에 나서던 때다.

이에 <AP> 통신은 자신들의 보도가 옳았음을 재확인하는 기사를 작성하는 등 추가 보도를 준비했고, 노근리 피해자 단체도 미국 조사단이 진상을 축소하려 한다며 항의하는 등 피해자와 미국, 그리고 양측을 대변하는 언론 간의 공방이 가열되던 시점이었다.
▲ 한미 양국 국방부의 노근리 조사반이 2000년 4월 현지를 방문해 협의하고 있다.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보고서

김용길 대령의 6월 26일자 편지는 그같은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 국방부의 태도를 의심하는 반응을 보이자 그 의심 사항을 풀어주기 위한 것으로, 국방부가 과연 누구의 편이고자 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편지에서 김 대령은 아이릭 대령에게 당시 <AP> 통신의 추가 취재를 "의심을 전제로 한 취재"라고 규정하고 "한미 양측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서로를 불신하게 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김 대령은 또 <AP> 기자에게 받았던 질문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고 기자의 추가 질문을 차단키 위해 취재에 응하던 중 거짓말을 했다고 밝히는가 하면, 피해자들의 항의를 "억지 주장"이라고 단정하는 등 미국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김 대령은 이어 피해자 대표인 정구도 씨의 행태를 언급하며 "한미 양측을 이간하려는 의도"라면서 "상호 오해를 예방하고 이들(언론과 피해주민)의 움직임에 올바로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김 대령은 "사건의 조사와 처리에 있어 무엇보다도 한미간 군사동맹 정신과 우호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며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상호 신뢰를 깨는 언행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자질'과 '서약서'를 방불케 하는 이 편지는 한국 조사반이 미국 조사단과 철저히 '한몸'이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미국과의 협조에 있어서도 진상규명보다는 한미동맹이라는 정치적 고려가 우선했음을 드러낸다.

<프레시안>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김 대령이 아이릭 대령에게 보낸 6월 26일 서한 전문을 게재한다. 서한 중간의 번호와 해설은 기자가 써 넣은 것이다.
아이릭 대령께

지난 토요일 이환준 대령1 앞으로 보낸 서신내용 잘 전달받았습니다. 먼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조사 작업에 여념이 없는 귀 조사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 특히 조사실무총괄 책임을 지고 고생하는 당신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도 한측 실무총괄 책임자인 본인이 잘 헤아리고 있으며, 이유야 어찌되었든 오해가 생기게 한 점 대단히 유감스럽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AP통신의 입장에서는 데일리2 씨가 증언을 번복한 이후 이의 만회를 위해 우리 양측 조사반 이상으로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을 것이며 일단 우리 양측 조사반의 활동을 견제 감시하기 위해 '의심'을 전제로 한 취재를 적극화해나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미 양측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 양측이 서로 불신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어떤 이득'을 취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서신 내용을 전달받는 순간 본인은 더욱더 확실하게 이점을 확인하고 이러한 오해의 불식을 위해 금하게 답신을 보내게 되었음을 알려드리면서 AP 최상훈 기자3의 전화 취재와 관련한 상황을 설명해드리고 제 의견을 밝히고자 합니다.

AP 최상훈 기자가 전화를 통해 질문한 내용을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① 로저스 대령4 관련 문건을 CBS 보도 이전에 미측으로부터 받았는가? (미측 조사단에 확인했다고 전제) ② 미 정부가 갖고 있다는 6.25 당시 북한 신문의 노근리 보도내용 번역 보고 문건을 한측도 보았는가? ③ 미측은 왜 일방적으로 조사5를 연기했으며 한측은 이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④ 미측 증언청취록은 계속해서 받고 있나? 주요 인물들이 포함되었나? ⑤ 미측이 보내준 항공사진6에는 사건의 흔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 사진으로 어떻게 조사를 하는가? (미측 조사반은 사건 흔적이 표시된 사진을 가지고 조사를 하고 있다고 정통한 소식통으로부터 들었다고 언급) ⑥ 그렇다면 미측은 사건의 존재 자체도 인정 안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 조사 시작한 지 8개월이 되었는데 주간 발표도 없이 결국 사건은 없다는 말인가? 등이었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최초에는 언급 자체를 거부하려 하였으나 우선 귀 조사단이 오해를 받는 것 같고 피해주민측에도 의혹을 증폭시킬 소지가 있어 아래와 같이 답변 및 설명을 하였음.

① 로저스 대령 문건은 CBS 보도 이전에 미측으로부터 이미 제공 받았다고 답변하자, 최 기자는 미측 조사단에서도 안 보냈을 것으로 확인했다 하여 분명히 그 이전에 받았고 번역해서 우리 조사 팀장들간 회담까지 했다고 재강조 하였음.

② 북한 신문 건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북한 신문 보도 내용은 다 갖고 있었고, 미측도 북한 신문은 한측 조사반이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답변.

③ 미측 조사 일방 연기 건에 대해서는 우리측이 6.25 50주년 이전까지 조사를 끝내려고 했고 미측에서도 그렇게 요청했으나 미측은 최대한 노력하겠다 했을 뿐 6월 이전에 끝내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미 조사단은 당신네 AP통신이 1년 반 동안이나 조사한 사건이고 철저하게 '증거주의' '법정주의' 원칙을 적용하므로 조사의 신중을 기할 입장이고 사실상 처음부터 시간이 많이 걸린다 했다. (이 부분에서 'O. J. Simpson' 사건 예를 들며 한미 간 사건을 대하는 문화의 차이를 설명했고, 최 기자도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

④ 미측 증언청취록 인수 건에 대하여는 1차로 100여 명분(최 기자는 70명분으로 알고 있었음)을 받았고 그 이후 증언 받는 대로 추가적으로 계속 제공받고 있다. 데이리를 비롯해서 주요 인물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고 답변

⑤ 항공사진 건에 대하여는 그 사진은 미측도 의문을 갖고 재조사 중이며 우리측에게 필름 원본을 보내주기로 했다. (이미 받았으나 추가 질문 차단 위해 받을 예정으로 답변했으며 미측 조사단이 별도로 갖고 있다는 사진 건에 대해서 정확하게 확인 경위와 근거를 대라고 추궁하자, 그냥 전해 들었다고만 답변)

⑥ 사건의 존재 자체 문제에 대해서는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사건이 있으니까 미측도 지금까지 조사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몇 달 후면 조사가 종결될 터이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보라고 했으나, 최 기자가 한측 조사단은 사건 당시 피해규모도 아직 파악이 안 되었냐고 질문, 이미 알고 있듯이 피해주민측은 175명으로 자체 집계하고 있고 영동군청을 통해 신고 접수건은 246명이다. 이밖에 북한 신문에 100명, 400명 등 보고된 것도 있고 심지어 300명이다, 700명이다, 1000여명이다 등등이 얘기가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모든 기록, 증언들과 당시 상황의 재연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사 기법을 통해, 최초 출발 피난민 대열을 약 500여 명으로 상정해서 피해 상황을 압축해가고 있다고 답변하였음. (특히 최 기자가 언급한 180명이라는 숫자는 언급한 적이 없으며 실제로 우리 조사반의 어떤 문서에도 사용 흔적이 없는 숫자이고, 본인도 숫자 자체가 생소함)

최 기자와 전화 통화하기 2일 전 피해주민측 대표 정은용 씨로부터 위 내용과 유사한 억지 주장이 포함된 항의 성명서를 전달받았으며, 이어서 최 기자와 전화 통화한 다음날 정은용 씨의 아들 정구도(피해주민측의 기획 담당) 씨로부터도 전화를 받았는데 동일한 질문 및 항의를 받았음. 이에 대해 본인은 지금의 조사는 어디까지나 양국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양국 정부 차원에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공식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므로 조사결과가 발표되기 이전에 조사반을 불신하는 내용의 의견 제기는 합리적이지 못하다며 모든 의견은 조사반이 아닌 정부대책단에 제기해야 한다 하였음. 조사반은 조사기자와 조사목적 외에 접촉이나 대화할 임무나 기능,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으니 조사반에는 더 이상 의견제기하지 말라고 설득하였음.

이런 과정에서 정구도 씨는 아이릭 대령과 피해주민측 변호인단과 언쟁 사실 등을 예로 들면서 귀하를 비난하는 한편, 우리 한측 조사단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는 것으로 보아 한미 양측을 이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귀하의 서신을 받게 되었음.

따라서 언론이나 피해주민측의 인용기사나 언급 내용들을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혹시라도 한미 양측 조사단의 공조체제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앞으로는 언론이나 피해주민측이 양측 조사반에 제기한 의견이나 언급 내용은 신속히 통보해줌으로써 상호 오해를 예방하고 이들 움직임에 올바로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릭 대령!
우리 조사반은 귀 조사단의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조사과정에서 한미간의 어떠한 문제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대화할 자세가 되어 있으며, 특히 이 사건의 조사나 처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한미간 군사동맹 정신과 우호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상호 신뢰를 깨는 언행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릭 대령!
상황이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오해를 일으키게 된 것 다시한번 유감의 뜻을 전달하며 자세한 내용은 7월 중순 실무회의 때 나누기로 하고 이만 줄입니다. 무운과 행운을 빕니다.

2000년 6월 26일
대령 김용길

<해설>

(1) 서신 후반부의 내용으로 볼 때 미 육군성 노근리 조사반에서 한미 협의와 총괄을 담당하는 아이릭 대령이 한국 국방부 진상조사반의 이환준 대령에게 편지를 보내 피해자들과 <AP> 통신이 제기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추정됨

(2) 노근리사건 현장에 있던 한국전 참전 미군으로 1999년 피해자들과 최초로 만나 사건을 증언했던 에드워드 데일리에 대해 미국의 일부 언론들은 2000년 5월 경 그가 사건 현장에 없었다는 보도를 내보내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김용길 대령은 이를 '데일리의 증언 번복'이라고 규정하며 그 보도를 사실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1999년 특종보도된 노근리 기사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AP> 통신의 기자. 이 서한이 오갈 당시 <AP>는 미 보수 언론의 반격에 맞대응하는 기사를 썼고 퓰리처상위원회는 <AP>의 보도를 재검토한 후 수상작으로 재확인했다.

(4) 노근리 쌍굴 사격이 있기 전 미 공군이 쌍굴로부터 500m 떨어진 지점에서 피난민들에게 기총소사를 했음을 증명해주는 핵심 증거로 '로저스 메모'로 불린다. 미국 <CBS>에 의해 2000년 6월 5일 보도된 이 메모는 노근리사건 하루 전인 1950년 7월 25일 작성된 것으로 "공군전투기 조종사는 미군 진지로 접근하는 민간 피난민에 대해 지상군의 공중공격 요청이 있을 경우 이에 응해 왔다"고 되어 있다.

(5) 미 국방부는 1999년 10월 노근리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시작하면서 2000년 6월 25일 끝내겠다고 말했으나 케네스 베이컨 미 국방부 대변인은 2000년 5월 11일 미군과 피해자들의 진술이 엇갈린다며 연말까지로 조사 시한을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6) 미 공군의 공중공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1950년 8월 6일자 사진으로 한국측 증언자들이 말하는 지역에서 철로상의 기총공격 흔적이 발견됐다.

이에 앞서 6월 21일 이 모 대령(발신자가 '이 대령'으로만 되어 있음)이 아이릭 대령에게 보낸 편지는 한국 조사반이 미국 조사반의 정보통 역할에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이 편지는 이 대령이 노근리사건에 관한 월간 <신동아>의 2000년 7월호 기사와 재미 사학자 방선주 교수의 논문을 보내며 동봉한 것이다.

<신동아> 기사는 방 교수가 미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견한 한국전쟁 당시 문서를 소개하는 것으로 노근리 학살이 '상부 명령'에 의해 이뤄졌음을 확인시키는 보도였다.

방 교수의 논문 역시 전쟁 문서에 대한 분석 논문이었는데, 이 대령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발간 논문집에 실릴 그 논문의 초안을 미리 입수하는 '수완'까지 발휘하며 "내부용으로만 쓸 것"을 당부했다.

<프레시안>이 입수한 다른 국방부 문건에는 한국이 미국에 요청한 사건 관련 자료 중 35건이 오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진상 규명에 필수적인 1차 자료도 제대로 못 받은 국방부가 한국에서 발간된, 그것도 미국에서 확보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기사와 논문을 보내주는 '친절'을 베푸는 모습은 국방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국방부, '정보통'으로, 때로는 '미디어 담당관'으로 '활약'

그루퍼 대령에게 보내진 8월 21일자 서한은 국방부가 6월 22일 국회에 제출한 노근리사건 관련 보고서에 대한 <AP> 통신의 보도를 해명하는 내용이다.

국방부는 편지에서 '한국 정부가 미군의 살상으로 결론 내렸다'는 <AP>의 보도를 부인하면서 "한미 양국간 합의없이 결론을 도출할 수도 없다"고 강조했다.

국방부가 편지를 보내기 2일전인 19일 국내 언론에 내보낸 해명자료는 <AP>의 보도 내용만 부인할 뿐 '양국 간의 합의'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국방부는 이어 그루퍼 대령에게도 "언론의 거센 비판과 도전 하에서도 공고한 한미동맹 정신을 바탕으로 더욱더 긴밀한 공조체제를 유지"할 것을 또한번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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