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저러한 모습이나 처한 조건 등이 비슷해서도 아니고 또 동학도들이 수운 최제우의 신원을 호소한 집회를 벌였던 장소가 삼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금의 평택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무의식 때문도 아니다. 다만 그 널따란 들판이 삼례의 들판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뿐이었다.
하는 말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주장도 있고 역사란 진보한다는 설(說)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민중들의 삶이 파생시키는 이차적인 뭔가가 역사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최근에 와서는 개인적으로 역사를 들먹이는 일을 자제하는 편인데, 이 말이 지난 민중들의 삶을 성찰적으로 되돌아보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떤 말로도 삶의 현장에서 소개되는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의 비통한 심장을 표현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그래서 단지 평택 들판에 무연히 설 뿐이다. 그것이 자신의 대지에서 내쫓겨야 할 아무런 이유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떤 위무나 힘이 되겠는가만 말이다. 언어가 어떤 블랙홀 속으로 말끔히 사라져버리거나 언어를 살리기 위해서 침묵을 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대추리·도두리 문제로 쏟아내는 정부나 수구언론의 말들은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뒤틀리고 타락할 수 있는가의 극점을 보여주고 있다. 반대로, 공사를 강행하려거든 우리를 그 땅에 묻어달라는 대추리 이장 김지태 씨의 주장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다고 본다.
수구언론이나 평택 바깥의 사람들은 그들이 보상금을 더 타내려 '뗑깡'을 부린다고 가볍게 폄하하지만, 나는 주민들이 자신들을 땅에 묻는 만큼의 질(質)이 보장된 보상금이 있다면 마땅히 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게 얼마냐고? 그 금액이 궁금한 사람은 혼자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려 보기 바란다. 그 금액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아니 너무 작고 볼품이 없어서) 나는 상상을 못할 지경이니깐. 힌트를 드리자면 대추리·도두리 들판에서 지금껏 거두었던 벼의 낱알의 개수만 하다고나 할까. 그것을 일구기 위해 굽혔다 폈던 관절의 운동 횟수만 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한 가지 더. 그들의 시간, 한숨, 울음, 웃음, 그것을 내동 내려다보았을 별빛이나 시름을 달래주던 바람의 총량까지 합하면 대충은 나올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만이라도 세상이 가졌더라면 지금 평택의 울음은 없었을 것 아닌가 하는 거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다수를 들먹이며 소수의 주장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열에 아홉은 그런 주장들을 한다. 이 성찰 부재의 허언들은 따지고 보면 이기적인 자기 욕심의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면 자신은 다수의 공리를 먼저 생각한다는 거대한 자기기만에 불과할 뿐이다.
요는 다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하나하나의 소수자이면서 다수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그 환상이 역투사하는 이미지에 최면 걸려 있는 것일 뿐이다. 왜냐면 다수란 머릿수의 많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지난 5월 14일 평택 역에서 지인들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혼자 전철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저하고 놀자는 아들놈에게 토요일 밤은 만사를 제쳐두고 같이 있기로 하고 얻어낸 시간인데, 수원을 지나 시야에 들어온 들판은 진짜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 꽃 핀 지가 언제고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봄 타령이냐고, 시시한 삼류 무명 시인의 신파라고 탓할 분들도 있겠지만, 내게는 논에 물을 댈 때가 진짜 봄이라는 관념의 뿌리가 너무 깊다는 사실을 용인해주기 바란다.
그날도 들판에 물을 대거나 혹은 어린 모가 심어지기 시작할 때 드디어 사람은 대지를 얻게 되는 순간이라고, 혼자 물끄러미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대지와 교신하는 일은 농사만한 일이 없으며 우주와 접신하는 일은 깊은 묵상만한 것이 없다고 나는 배웠다. 비록 그날 시위는 어설프게 하다가 돌아왔지만, 사진으로 확인한 정부의 '패악질'이 자꾸 눈에 선해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려웠음을 고백해둔다.
자신 있게 말해두거니와, 평택 주민들의 저항은 국가의 정책을 반대하고 더 많은 돈이나 뜯어내려는 철부지 소수의 '뗑깡'이 아니다. 국가의 정책이든 더 많은 서울 시민들이 현 용산 기지 터에서 여유로운 산책을 할 수 있는 권리이든 간에 (사실 이런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의 행복이 소수의 슬픔 위에서 누려질 수는 없는 법이며, 또한 이 소수는 다수의 타자이거나 대립자가 아니라는 사유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소수는 정체되거나 굳어진 다수를 항상 가로질러가는 존재이며, 다수는 소수의 이런 운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규정을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892년 11월 삼례집회를 시작으로 한 동학도들의 교조신원 운동은 1894년 농민봉기라는 결과를 일부 야기했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건 협박이 아니다. 1894년 농민봉기도 민중의 삶의 밑바닥에 흐르던 어떤 흐름이 급격하게 단층을 이루며 발생한 사건임을 정부가 직시해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역사를 필연이라 불러야 할지 우연이라 불러야 할지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의 저항은 부안 핵폐기장 반대 투쟁이나 새만금 매립 사업의 갈등 등과 대단히 친연적으로 엮여 있음을 알아두길 바란다. 정부가 이번 일로 다시 한번 민중에게 상처를 준다면 참여정부 들어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필연적인 결과를 야기할 것임은 명백하다.
처음 대추리를 찾아갔을 때, 이제는 군이 점령해버린 대추초등학교는 한적하다 못해 권태로운 여느 시골 학교와는 판이하게 그 분위기가 달랐다. 그것은 오랜 싸움의 흔적이 너무 깊게 패어 있는 진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물론 싸움은 쌍방의 문제라서 어느 한쪽이 그 도발을 피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노릇이다. 스님들의 세계도 아니고 말이다.
하여튼 인심 좋은 밥 한 끼 얻어먹고 떠나면서 들판이 바삭바삭 말라가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았는데 그게 그렇게 가슴이 아리게 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싸움에 대한 염증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도대체 미군이라는 존재가 발생시키는 한반도에서의 삶이 우리를 미증유의 질곡으로 빠지게 하는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누구도 주한 미군의 존재를 예전처럼 낭만적인 민족주의에 기대 말하지는 않는다. 또 미국을 '원수'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것저것 다 떠나서 미국이 지금 지구나 이 작은 반도에서 하고 있는 일을 보면, 그들이 정말 친구인지 되물어볼 이유가 너무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부나 수구언론은 도대체가 엉뚱하고 실체 없는 상징만 계속 되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들은 어떤 친구인가? 그들은 어떤 도움을 주고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고 있는가? 일본이나 중국의 준동을 여러 차례 목도한 이후로는 더욱 더 착잡한 심정을 가지게 되었음을 숨기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실이고 객관적인 우리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듯한 미국을 나는 친구로 생각할 수가 없다. 아니 시인 김수영의 말대로, "다 나가다오"라고 말하고 싶다. 분명히 지금 대추리 들판에 둘러쳐진 철조망은 지금 남북 사이에 쳐진 철조망과 너무 흡사하고, 전쟁과 점령을 밑바탕으로 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더욱 밉고 우리 자신이 못마땅해 죽겠다. 제 고향과도 같은 들판에 물길을 끊고 철조망을 치고 강제적으로 주민을 소개시키는 일이 본질적으로 미국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정부의 속마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어딘가가, 무엇인가가 왜곡되어 있을 때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또는 선과 후를 뒤집어 보게 된다. 지금 정부는 어떤 것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그 냉정함을 잃었으며 정부 출범 초기의 초심도 왕창 잃었다. 지금 당장 평택 들판에 가서 물을 대고 있거나 모를 심는 논과 깊이 수렁을 파고 철조망을 친 들판을 함께 보라! 농부들이 일하는 들판과 군인들이 장악한 논바닥을 비교해 보라! 그런 다음 다음에 한·미간의 동맹을, 기지 이전 지연 시 발생되는 경제적 손실액을 생각하기 바란다. 당신들은 지금 선후를 뒤집어서 바라보고 원인과 결과를 물구나무 세워서 생각하는 너무 오래된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도리어 재생산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그건 대추리 주민들의 울음에 귀를 기울여야 나올 답이다. 거기가 현 정권의 초심이고 모든 문제를 푸는 출발점이다. 감히 말하거니와 지금은 그들의 말이 국법보다 위에 있고 어떤 정책보다 앞서 있다. 왜냐면 주민들은 나라님이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직접 몸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어떤 지표나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생생한 실체다. 주민들의 울음에 귀 기울여 보건대 주민들의 '뗑깡'이 미군기지 이전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있던 밥그릇을 빼앗으려는 목적에 따른 것이거나 그들이 정말 불순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도 이 글을 분서(焚書)하겠거니와, 허락된다면 정권의 나팔수라도 자처하겠다. 그렇지 않고 그 반대라면 제발 저 들판에서 그 흉악한 철조망을 걷어치워라!
"뭐니 뭐니 해도 봄은, 물댄 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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