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한미FTA 시즌 2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시즌 1과 2는 한미FTA 통과를 전후로 해서 관계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한미FTA가 일단 발효가 된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장기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재 상태에서 발행하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이것이 한미FTA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한미FTA를 폐기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정우 정책실장,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정태인 국민경제비서관이 나가고 난 이후 참여정부 정책이 신자유주의 기조로 확 틀어졌다. "현실 정치에서 참모의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절감했을 것 같은데…"라는 질문에 그는 "참모는 바로 국민들의 즉각적 지지를 넘어서 훨씬 더 장기적으로 넓게 봐야 한다. 적어도 정책적인 측면에서는 지도자보다 더 뛰어나야 된다는 거다. 그래서 진짜 참모는 지도자에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다가 잘 죽는다. 참여정부에 함께 있다가 나온 이정우 경북대 교수가 우리를 조선시대 중종(中宗, 재위기간 1506~1544년)의 조광조 비슷하게 '사림파'라고 비유했다. 당시 '사림파'가 지면서 모두 사형을 당하고, 딸들은 다 관비가 되었다. 우연하게도 이정우 교수과 이동걸 박사, 내가 전부 딸만 둘이라 모두 합해 여섯인데, 옛날 같으면 얘네들은 다 관비가 되었던 거다.(웃음) 지금 때어난 것이 참 행복한 거다.(웃음) 이동걸 박사와 이정우 교수가 그만두게 된 계기가 다 삼성문제였다. 우리나라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과 경제 관료와 조·중·동이 맺고 있는 단단한 삼각동맹은 청와대에서도 어쩔 수 없는 힘이었다."
통합진보당 폭력사태 이후 오히려 통진당 시즌2를 제안하며 통진당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물었다.
"요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고를 많이 친다. 보통 연구원에 아침 7시에 출근해서 가장 먼저 페이스북을 하는데, 이른 아침에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사람이 감성적이게 된다. 그 순간 현실에서 조금 떨어져서 인간이 낭만적이고 이상적이게 되는데, 그럴 때 페이스북에 쓴 것 중에 사고 친 것이 많다.(웃음) 내가 통진당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안철수의 생각을 읽고 나서였다. 내 판단에는 <안철수의 생각>이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 사이가 아니라,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후보단일화를 하려면 정책연합을 해야 하는데, 이때 통합진보당이 캐스팅보더로서 진보의 정책을 관철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역할이 지금은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자유는 평등과 결합해야만 사람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자유와 평등이 결합했을 때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경제에서도 경제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의 과제이다. 경제 민주화를 막는 핵심이 재벌이기 때문에 재벌개혁이 경제민주화의 중요한 과제로 되어 있지만,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정의란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평등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고 이것을 경제 국면에서 실현하자는 것이 바로 경제민주화인 것이다."
"청와대에 있을 때 현실과 타협하고 싶지는 않았나"라는 질문에 그는 "조선시대였으면 우리는 다 죽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통진당 폭력사태 이후로 다 당을 떠나가는 상황에 오히려 통진당 시즌2를 제안하며 통진당에 풍덩 몸을 던졌다. 그리고 시지푸스가 돌을 끊임없이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한미FTA 문제를 가지고 지금도 계속해서 씨름하고 있다. 왜 그럴까. 미련해서일까? 아니, 낭만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 안에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낭만적 에너지가 자유와 평등이 강물처럼 흐르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소중한 연료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래본다.
'정태인' 하면 한미FTA, '한미FTA'하면 정태인이 떠오른다. 자신이 FTA를 전담했던 국민경제비서관이었기 때문에 "한미FTA를 비판하는 일은 나에 대한 나의 처벌, 가차없는 처벌이다"라고 했다. 이후 반 한미FTA 국민경제비서관으로 정말 열심히 활동해왔다. 하지만 결국 한미FTA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대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한미FTA 비준안이 7월에 발효가 됐고 두 달이 지나 법률로써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앞으로 한미FTA가 국내법 위에 존재하여 더 큰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무리 민생을 위하는 국내 법안이라 할지라도 한미FTA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다면 무력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내의 유통·상생법이 한미FTA와 부딪칠 위험성이 있으면 통과되기 어려운 거다. 이렇게 되면 한미FTA로 인한 부작용은 계속 나타날 것이고 이미 많은 부분에서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한미FTA 안에 존재하는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로 외국 투자자가 투자대상국의 보호조치에 대해 제소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우리나라에 론스타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했었다. 또한 지금 정부가 KTX 일부 민영화를 생각하고 있는데 한미FTA는 문제가 발생해도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한미FTA 반대진영에서 한미FTA 즉각 폐기를 주장하고 있고 나도 예전에 같은 주장을 했지만 이미 발효된 시점에서 즉각 폐기는 어려울 것이다.
▲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한미FTA는 2006년 첫 논의를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7년 동안 수없이 많은 논의를 거쳐 왔다. 그렇기 때문에 폐기할 이유를 확실하게 제시하지 못한 채 그냥 폐기한다고 통보하는 것은 법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국제정치상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미FTA의 폐해들을 기록하고 한편으로는 한미FTA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들이 필요하다. 한 3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안 중의 하나가 동아시아 공동체로 먼저 동아시아 내에서 주민들의 삶을 높이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이후 각종 FTA에 대처해 나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한미FTA에 관해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중국과 미국의 관계이다. 세계가 중국과 미국 G2체제가 되면서 경제 분야에서 두 국가의 대립이 빈번해졌는데 여기에 한국이 미국과 FTA를 맺는다는 것은 중국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 중국이 우리에게 한중 FTA를 요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이유다. 만일 우리나라가 한미FTA에 이어 한중FTA까지 맺는다면 굉장히 위험한 상태가 될 것이다. 현재 세계경제를 담당하는 미국과 EU, 중국과 동시에 FTA를 맺는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한국이 이 나라들과 한꺼번에 FTA를 맺고 국가 경제가 제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야권에서 한미FTA 즉각 폐기를 주장하는데 과연 이 말에 실효성이 있는가?
장기적으로는 폐기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한미FTA의 폐해가 증명되지 않았고 국제정치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당장 폐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미FTA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미국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문제들이 자꾸 발생하기 때문에 바꾸자고 하는 것이 재재협상이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한미FTA가 실질적으로 국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방해가 되고 심지어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면 폐기를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고 비준도 하지 않았어야 했지만, 결국 비준이 된 상태에서는 그것을 폐기하는 과정도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이 정말 한미FTA를 폐기해야한다고 내부적으로 동의를 해줄 때 폐기가 가능하게 된다. 국제정치적인 문제, 국내적으론 국민들의 동의 이 두 가지가 다 해결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환상이라고 해도 어쨌든 국민의 절반정도가 한미FTA를 찬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폐기하는 것은 국민들의 뜻을 온전하게 반영한다고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과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복지를 확대한다고 하면서 한미FTA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결국 복지확대와 FTA는 부딪치게 되어 있다. 한쪽은 국민의 복지향상이 목표이고 한쪽은 시장원리로 사회를 조직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개가 부딪치는 사안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한미FTA를 폐기할 이유는 더욱 쌓이게 되는 것이다.
시지푸스가 돌을 끊임없이 들었다 놓기를 반복해야 했던 것처럼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에게는 한미FTA가 시지푸스의 돌이 아닌가 싶다.
지금을 한미FTA 시즌 2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시즌 1과 2는 한미FTA 통과를 전후로 해서 관계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한미FTA가 일단 발효가 된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장기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재 상태에서 발행하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이것이 한미FTA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한미FTA를 폐기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다. 보편복지국가와 한미FTA가 가지고 있는 사회구성원리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 두 개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그것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한미FTA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이야기하면서 대표적으로 미국을 예로 드는데 미국 자체가 복지국가가 아니지 않나. 이러한 모순이 증명되고 국민들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국제사회가 이 사실을 인정할 때 한미FTA 폐기가 가능한 것이다. 물론 당장 국민투표를 해서 FTA를 폐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국민투표라는 것도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국민들이 실제적으로 동의를 해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과정은 기간이 꽤 걸릴 것이다.
한미FTA를 폐기하는 것에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진보진영에서 '지금 당장 폐기해야한다'는 것 외에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새누리당과 대립각을 만들어야 하는 대선 국면에서는 더욱더 그럴 것 같다.
논리적으로는 한미FTA를 사회적 합의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고 도출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방법이 별로 없다. 남은 방법이 국민투표를 하자는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국민투표에 부치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정책의 기본원칙 중에 잘 모르는 것은 하지 않는다는 법칙이 있다. 정책으로 결정되기 전까지는 반대해서 그것을 막을 수 있지만 일단 법으로 발효된 것을 폐기하려면 그만한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한미FTA와 같은 어마어마한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고 발효되지도 말았어야 했던 것이 발효가 됐기 때문에 그다음 절차는 다른 차원에서의 일이다.
사실 지난 4.11 총선 때도 한미FTA,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등이 다 참여정부에서 추진했던 것들이다 보니 이 문제들을 이슈화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 참여정부에서 추진했던 것이 아니냐"며 공세를 펼쳤던 새누리당의 프레임에 말려들게 되었다.
참여정부와 민주당이 했던 것이 맞고, 지금은 그때의 생각이 틀렸다라고 얘기해야 한다. 적어도 한미FTA만이라도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 했어야 했다. 한미FTA는 시장에 의한 경쟁이 효율성을 더 높인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미국식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가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그러한 정책기조가 대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잘못했다고 하고 그런 다음에 한미FTA를 반대해야 하는데, 앞의 것은 무시하고 노무현의 한미FTA와 이명박의 한미FTA가 다르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굉장히 궁색해진 것이다. 물론 두 한미FTA가 조금 다른 데가 있긴 있지만 가장 중요한 투자자국가소송문제, 공공성 파괴문제 등에서는 동일하다. 박근혜 후보가 보편복지와 한미FTA가 양립 가능하다고 하면서 유통·상생법을 강화시키자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참여정부의 세력들이 노무현의 한미FTA나 이명박의 한미FTA가 틀렸다고 인정했다면, 박근혜 후보의 이야기도 자신 있게 부정하고 공격할 수 있는데, 앞엣것을 못하고 있으니 공격은커녕 오히려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 문재인 후보는 끊임없이 공격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재인 후보와 그의 참모들이 대부분 참여정부 말기의 관료들이나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잘했다고 생각하고, 조·중·동 때문에 잘한 것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노무현 정부를 옹호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던 것은 참여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굉장히 실망을 했고 양극화가 심화되었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정하면 할수록 싸움은 더 힘들어지게 된다. 이명박 정부가 실행한 '줄푸세'가 우리나라 경제에 큰 위기로 작용하고 있고 박근혜 후보도 복지국가를 외치면서 '줄푸세'를 주장하고 있지만, 참여정부 역시 '줄푸세'의 구조, 신자유주의 기조를 많이 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이 부분을 철저하게 반성할 때 국민들이 다음 정권의 기조가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 믿을 텐데 민주당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참여정부 개혁적 정책기조가 인수위 이후 내각이 구성될 때 살짝 꺾였고, 이정우 정책실장,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정태인 국민경제비서관이 나가고 난 이후 참여정부 정책이 신자유주의 기조로 확 틀어졌다. 그래서 지금 이명박 정부와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전히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 노선과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참여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간에 동일성도 있다. 이제는 경제를 시장에 맡긴다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일이고 이것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많이 받아들이게 됐지만 2008년 이전까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자유주의가 잘 나갈 줄 알았다. 경제학자 중 일부가 다른 나라의 경험을 들어,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고 국제적인 정책 분위기에 끌려가는 면도 있었다. 그래서 참여정부는 한쪽으로는 복지를 늘리고 한쪽으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쓰는 어찌 보면 모순적인 정책을 같이 썼던 것이고, 이명박 정부는 노골적으로 토목 신자유주의 정책을 쓴 것이다.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동일성은 신자유주의 정책기조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한편은 복지에 대한 상당한 의지가 있었고 다른 한편은 건설토목으로 경제성장률을 올리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 차이다. 민주당이 동일하게 틀렸던 것에 대해서 부정을 해야 국민들에게 다음 정책이 새로운 정책기조로 갈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고 그것이 표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민주당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노선에 대해 민주·진보 진영이 냉철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그 다음을 모색할 수 있을 텐데, 일명 '노빠'라고 불리는 일부 친노세력들이 이를 무조건적으로 싫어하는 경향을 나타낼 때가 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그를 기리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혹시 있다면?
원래 노사모는 굉장히 열정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개혁집단이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FTA를 추진한 이후에 둘로 갈라져 일부는 진보신당에 들어갔다. 내가 그들을 가리켜 '한미 FTA를 반대하는 노빠들'이라고 불렀었는데, 지금 노빠의 주류는 참여정부에 끝까지 있었던 참모들로 이들은 여전히 '한미FTA를 찬성하는 노빠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 사람이 원래의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 역사적으로도 잘못된 것 같은 판단을 하면서도 그가 옳다고 하는 것이라면, 빠문화는 위험하다. 참여계가 바로 그 사이에 있는 것인데 폐족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죽어서까지 살려놓은 것이지 국민들이 그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노무현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라든가 노무현 개인에 대한 회한 같은 것들이 반영된 것인데, 이들이 마치 양극화를 심화시켰던 이전의 정책들까지 다 용서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오버한 것이 지난 총선에서 진 이유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한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어땠나?
멍했다. 하지만 돌아가신 다음 날 핀란드로 가게 돼 있어서 울고 말고 할 여지가 없었다. 그날 바로 봉하로 내려갔다가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로 갔다. 추모에 대한 열기 속에 있었다면 여러 감정이 있었겠지만, 외국에 있었고 바쁜 일정을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감정이 무뎌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원래 갖고 있던 생각을 퇴임하시고 나서 다듬으려고 하셨고,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는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 된다'는 이야기까지 하셨다. 이러한 것을 국민들의 요구에 비춰서 다시 해석하고 만들어야 되는데, 지금의 문재인 후보 쪽은 기본적으로 과거 참여정부의 정책기조를 계속 끌고 가려는 느낌을 준다. 사실 문재인 후보의 정책은 참여정부의 정책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어떤 문제들에 있어서 참여정부와 단절되지 못하고 그 연장 선상에서 해석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선거전술로도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정태인 원장 이야기를 들으며 정치에 있어서나 국정운영에 있어서 참모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참모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참모는 장기적인 시야를 가져야 한다. 크게 보면 민중이 역사를 끌고 간다고 할 수 있지만 국민들이 장기적인 시야를 갖기는 쉽지 않다. 일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단기적인 시야로 자기 이익을 바라보지 멀리 바라보지는 않는다. 참모는 바로 국민들의 즉각적 지지를 넘어서 훨씬 더 장기적으로 넓게 봐야 한다. 적어도 정책적인 측면에서는 지도자보다 더 뛰어나야 된다는 거다. 만약 참모가 지도자 말 하나하나에 따라가는 참모라고 한다면 지도자가 잘못된 길로 갔을 때 그것을 더 강화시켜버린다. 지도자를 바른 길로 안내하는 것보다 지도자에 반대하는 세력을 억제하는데 모든 머리를 써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참모는 지도자에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다가 잘 죽는다. 지금이 민주사회라서 죽지 않고 잘리기만 했지 옛날에는 다 죽었다.(웃음)
참여정부에 함께 있다가 나온 이정우 교수가 우리를 조선 중종시대의 조광조 비슷하게 '사림파'라고 비유했다. 재벌과 재경부, 조·중·동 등이 수구파이고 우리 내부에 존재하면서 노골적으로 수구파의 편을 든다거나 그쪽에 물든 사람들이 훈구파이다. 사림파가 지게 되면 모두 사형이고 딸들은 다 관비가 되었다. 우연하게도 이정우 선생님과 이동걸 박사, 내가 전부 딸만 둘이라 모두 합해 여섯인데 옛날 같으면 얘네들은 다 관비가 되었던 거다.(웃음) 지금 태어난 것이 참 행복한 거다.(웃음) 결국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지도자의 몫이지만, 지도자가 항상 옳은 것도 국민이 다 옳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참모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올바르다는 것을 얘기하고 옛날 같으면 죽고 지금 같으면 잘리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모의 운명이고 한편으로는 진보의 운명이기도 하다. 진보가 더 길게 보고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별로 인기가 없는 일이긴 하다.(웃음)
현실과 조금만 타협하면 쉽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살짝 눈감고 넘어가고 싶은 유혹은 없었나?
실은 입을 다물었던 것도 많았다. 우리가 들어갈 때 김대중 정부 때에도 청와대에 있었던 이동걸 박사가 이야기하기를, 자잘한 것까지 반대했다가는 빨리 잘리기 때문에 잠자코 있다가 정말 중요한 반대가 필요할 때, 딱 한 번 과감하게 반대해야한다고 했다.(웃음) 결국 이동걸 박사와 이정우 교수가 그만두게 된 계기가 다 삼성문제였다. 우리나라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과 경제 관료와 조·중·동이 맺고 있는 단단한 삼각동맹은 청와대에서도 어쩔 수 없는 힘이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내가 한미FTA를 반대하다가 잘렸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전에 그만두었다. 그만두더라도 대통령 참모는 참모였으니, 웬만하면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고 침묵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미FTA는 너무 큰 이야기였기 때문에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미FTA가 추진된다는 것을 안 것은 2005년 10월이었다. 알고 난 뒤 부랴부랴 반대하는 보고서를 만들어서 대통령께 면담신청을 했지만, 실제로 만나주신 것은 2006년 3월이었다. 이미 협상선언을 개시하고 협상을 시작한 다음이니 얘기나 들어보자고 하시는 것 같았다. 결국 대통령을 설득하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언론을 통해 반대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지 말라'고 하셨지만, 한 달 정도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기조를 수정해주길 기다렸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길래 하는 수 없었다.
지난번 통합진보당 폭력 사태 이후 "우선 내 친구들부터 살려야 될 것 같아서요"라며 오히려 통진당에 가입해 반향을 일으켰다. 반 한미FTA 운동 때도 그렇고, 통진당 시즌2 운동을 제안했을 때도 그렇고,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보이면, 일단 몸을 던지고 보는 스타일인 것 같다. 열정이 많아서인가. 그런 스타일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많이 다치기도 할 것 같은데 어떤가?
요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고를 많이 친다. 보통 연구원에 아침 7시에 출근해서 가장 먼저 페이스북을 하는데 이른 아침에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사람이 감성적이게 된다. 그 순간 현실에서 조금 떨어져서 인간이 낭만적이고 이상적이게 되는데, 그럴 때 페이스북에 쓴 것 중에 사고 친 것이 많다.(웃음) 총선 이후 결과에 대해 나도 반성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대선 때까지 금주를 하겠다고 했다. 원래 나는 굉장히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인데, 지금 백일 이상 술을 안 먹고 있는 상태다. 또 하나는 통진당 사태가 일어나고 난 다음 날 새벽에 통진당 당원들이 난리 치는 동영상을 보다가 하도 짜증이 나서 차라리 내가 통진당에 들어가겠다고 얘기했는데,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이 커져 버렸다.(웃음)
ⓒ프레시안(최형락) |
진보의 시즌 2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진보의 시즌1이 끝났다는 것은 80년대 운동이 수명이 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80년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세력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당시의 이념과 생각을 전혀 수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완고해졌다. NL은 NL대로 PD는 PD대로 완고해졌다. 노조도 대규모 노조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 커다란 공룡이 살 길을 못 찾고 있는 형태가 돼버린 것이다. 통합진보당에 들어갈 때는 아직 그 구조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을 때였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정치를 바꿔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이후 이석기, 김재연 제명 건을 보면서 더 이상 스스로 혁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통진당 정책위의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이 언론에 나오자마자 이석기, 김재연 제명 건이 부결되었고, 이후 통진당은 분당 상황으로 달려가고 있다.
부결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우리 연구원하고 가족들은 만세를 불렀다는 것 아닌가.(웃음) 물론 정책위의장 건은 무산됐다. 왜냐하면 지금 이 상태에서 통합진보당이 대선에서 할 일은 없다. 내가 통진당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안철수의 생각>을 읽고 나서였다. 내 판단에는 <안철수의 생각>이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 사이가 아니라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문재인 후보를 민주당 후보라고 한다면 안철수는 본인이 의식했든 안했든 민주당보다 더 진보인 것이다. 실제로 <안철수의 생각>은 좋은 것을 모아놓은 것도 아니고 분명히 자기 생각이 뚜렷하다. 만일 새누리당, 민주당, 그리고 안철수 원장이 삼자토론을 할 때 통진당 후보는 안철수 편을 들 수밖에 없게 돼 있다. 결국 후보단일화를 하려면 정책연합을 해야 하는데, 이때 통합진보당이 캐스팅보더로서 진보의 정책을 관철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역할이 지금은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이 상황에서 통진당이 대통령 후보를 낸다는 것은 뻔뻔한 일이고 굉장히 웃기는 일이다. 그것은 더 이상 정책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기들의 집단이익을 위하는 것이라고 보여질 수밖에 없다. 가려고 했던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당내당으로 남아서 도와달라고 해도 이제는 끝난 이야기다.
"심상정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권영길 후보가 아니라, 심상정이나 노회찬이 됐으면 진보정당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권영길 후보의 지지율이 3%였는데, 심상정이나 노회찬이었으면 아마 10% 이상은 얻었을 것이다. 당시 정동영 후보가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쪽으로 몰아주자는 분위기가 거의 없었던 만큼, 만일 진보진영이 힘을 모았었더라면 원래 진보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만큼 얻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보정당도 구심점이 생기고 더 자신을 가지고 새로운 과정에서 이념적 혁신이나 정책적 구체성 등을 제시해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되지 않았고 결국 분당 사태가 벌어져 NL은 NL대로 PD는 PD대로 완고해져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상정이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거지 지금은 심상정 의원이 대통령에 나올 수도 없게 되었다.
안철수 원장이 정치하려고 한다면 정치세력화가 필수적일 텐데, 안철수 원장의 생각이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 사이라고 생각한다면 심상정, 노회찬을 중심으로 한 통진당 내 혁신세력과 안철수, 그리고 민주 진영의 진보적인 그룹들과 함께 새로 당을 만들어볼 생각은 없는가?
어려울 거다. 정당을 같이 한다는 것은 이념과 행동을 같이 한다는 것인데 안철수 원장의 전반적인 이념 또는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구상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는 상태에서 창당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안 원장의 경제정책 기조를 두고 진보적이라 평가한 것이지 이것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책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두 번째는 진보의 옛 원칙들에 아직도 발목이 묶여 있는 사람들이 과연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고 더 중요한 것은 안 원장 입장에서 새 창당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진보를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표의 확장성보다는 확실한 반대파가 생긴다면 안 원장은 창당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새 정당을 만드는 것은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한데 내 상상력으로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민주노동당 초기 시절, 진보신당, 그리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통진당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매력적인 진보 정치인과 정당이 있는 것이 참 행복했다. 그런데 이번 통진당 사태로 인해 진보 정치 세력 전체에 대한 매력을 확 잃은 느낌이다.
3~40대 중에 진보적인 정치를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사람이 정말 많지 않나. 심상정, 유시민이 다 친구인데 지난 지자체 선거가 끝나고 내가 그들에게 한 이야기가 "국회의원 한 번만 더해라, 그리고 일선에 나서서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고 젊은 애들이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열어 주어야 한다"였다. 이제 우리 나이 또래가 벌써 50이다. 요새 3~40대가 스스로 정치를 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짓눌러서 그런 면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좀 더 뒤로 빠져서 3~40대에게 공간을 열어주고 그들이 스스로 말하고 사고 해서 스스로 만든 정책들이 관철되는 경험을 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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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는 보편복지, 경제민주화, 협동조합 즉 '사회적 경제'라고 하는 국민의 요구가 밑에서부터 분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올바른 방향에서 분출되고 있는 이 에너지를 껴안을 정당이 없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이것을 해야 하는데, 이 사회의 구조가 그들을 철없고 어리다고 이야기하면서 발언 자체를 못하게 한다. 사회적 격차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젊은 사람들이 대기업으로 몰리게 되었고 스펙 쌓기나 하고 있다. 아이들을 얽매이게 만드는 스펙이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쪼잔한 것들을 없애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 그 대신 새로운 방향을 찾고 거기에서 실제 역할을 하는 것은 젊은 세대들의 몫이다. 당을 만들고 새로운 진보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젊은 세대들이 담당하고 유신을 경험한 87년의 주역들은 이제 뒤로 빠져서 이 친구들을 돕는 역할을 해야 된다. 이것을 위해 새사연(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에서 대학원생들 중에 정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세미나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소수라 할지라도 진보 정책을 만드는 매력적인 젊은 사람들을 키워냈으면 좋겠다.
청년 정태인은 어땠나?
유신 말기 전두환 초기에 대학을 다녔다. 그때 동기들과 <자본론>도 읽고 같이 공부를 했는데 동기들이 노동운동을 한다고 공장으로 들어갈 때 나는 용기가 없어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정책을 만드는 구체적인 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에 취업을 했는데, 1986년만 해도 함부로 말했다가는 잡혀가는 시대였고 그래도 기독교가 제일 안전한 공간이었다. '기사연'에 있으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박현채 선생님을 만났다. 1971년 김대중의 대중 경제론을 쓴 장본인으로 김대중 대통령도 인정한 굉장한 실력가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대단히 현실적이었고 진보적인 사람으로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그릇이 크고 호방한 사람이었다. 이후 88년에 젊은 학자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NL과 PD 논쟁과 같은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이라 생각하고 '한국사회연구소'를 만들었는데, 이때 이사장이 바로 박현채 선생이다. 박현채 선생과 '한사연'의 50명쯤 되는 대학원생들은 정책을 만들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월급도 받지 않고 열심히 정책을 만들었다.
스물여덟 살짜리 대학생들이 실제로 정책을 만들었고 그랬던 집단이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그리고 노무현 정부에도 들어갔고, 심지어 이명박 정부에도 다 들어갔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정책 훈련을 한 사람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 정의, 진보에 대한 감수성은 언제부터 발달했나?
사람에게는 누구나 정의에 대한 생각이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기도 이타적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공정성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회에서는 이 공정성이 잘 발현되어 인간의 내적 회복을 이루는가 하면, 어떤 사회에서는 공정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바보 취급함으로써 스스로 그것을 억눌러 이기적인 인간이 되기도 한다. 내 인생에 있어서 공공성을 선택하기 시작한 순간은 정확히 1978년 5월 8일이었다. 78년은 유신 말기로 당시 학교에서 데모를 하면 바로 잡혀갔고 제적당하고 심지어 군대까지 끌려갔을 때였다. 78년에 학교를 입학해 그 해 5월에 첫 데모를 하는데, 처음에는 '범생이처럼 구경만 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서울대 정문을 돌파하는 맨 앞에 내가 서 있었다.(웃음) 나는 무슨 써클에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 순간 무언가 모르는 환희를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마 집단의식이었던 것 같다. 잠재워져 있던 "정의에 대한 생각을 내가 실천하고 있고 내 옆에 동료가 있고 그가 지금 굉장한 위험을 무릅쓰고 나와 함께 있다"라는 환희였다. 이 환희가 내가 진보 쪽으로 가게 됐던 동력이 아니었을까.
중학교 때 몸이 불편했던 친구를 옆에서 많이 도와줬다고 들었다.
중학교 2, 3학년 때 일이다. 2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친구 가방을 들었다. 지금은 연대 교수가 되어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목발을 짚는 친구였는데 목발에 가방까지 들으라고 하면 힘들지 않나. 그때는 모두가 걸어 다니던 시대였는데, 친구와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서 그 친구 가방과 내 가방 해서 두 개를 들고 다녔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이야기였다.
교수가 되지 않고 시민사회와 정치영역에서 계속 활동을 하는 이유가 있다면?
게을러서다.(웃음) 고등학교 때까지는 범생이로 살았고 대학도 별 힘 안들이고 들어갔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데모를 경험하면서 스스로 의식화가 되었다. 나는 당시 지하 서클에 소속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붙잡혀서 제적되거나 구속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학을 가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제안들이 많았다. 그때의 우리 운동권의 분위기는 심상정처럼 공장에 위장 취업해서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나는 용기가 없어 노동운동도 못했고, 그렇다고 유학을 갈 수도 없었다.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너무나 많은 일들이 우리나라에 발생했고, 여기저기 관여하다 보니까 논문 쓸 틈이 없었다. 게으르고 술 좋아하다 보니까 박사 학위도 없고 외국도 안 다녀오니 교수를 못하는 거다.(웃음) 정책을 만드는 구체적인 일들을 하면서 계속해서 현실에 개입하다 보니까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논문쓰기는 게을러 못한 거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술 먹고 게으르고, 그때그때 할 일은 또 해야 되겠고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웃음)
게으르다고 하지만 박사과정 따고 교수가 되는 길이 개인적으로는 편안한 길이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교 때 정부와 경찰 말 듣지 않고 유학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면 외국의 좋은 대학에 갔다 와서 지금은 교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유학을 안 갔어도 국내박사를 한 동기들이 지금은 성공회대, 한신대와 같은 민주대학교들에 들어가 교수를 하고 있다. 조희연과 같은 사람들이 모두 '한사연' 출신들인데 현실에 많이 개입한다고 하기는 하지만, 역시 교수는 교수다. 정책이라는 것은 나라 전체를 크게 보고 중요한 것들을 다 들여다봐야 하는데 교수가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 전공에 집중해서 좁은 분야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사회의 여러 가지 것들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넓은 시야를 유지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재미있어서 진짜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한미FTA를 반대하기 시작한 2006년 이후부터였다. 그때는 한미FTA 이론가도 없고 상대 쪽은 관료, 국책연구원, 관련 박사들이 쫙 깔려 있는데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무지무지하게 공부했어야 했다. 그때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다. 고3때 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공부가 정말 재밌어졌다. 그래서 요즘은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공부한다. 때때로 '조금 더 젊었을 때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굉장히 멋진 학자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학자가 되어 세부적인 것을 좁게 하는 것보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것들은 다 들여다보고 그것을 어떻게 정책으로 만들까 고민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력 있는 학자들이 좋은 정책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 주제에 대해서는 잘 만들 수 있지만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시야는 약할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정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아주 젊었을 때부터 정책연구소를 만들어 그런 일을 했고 지금도 '새사연'에서 그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희소가치는 있지 않나.(웃음)
20·30대에 한 선택들이 지금의 정태인 원장을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 여러 선택들을 앞에 두고 있는 20·30대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게 있다면?
우리 애들 둘이 다 20대인데 하나는 스물일곱이고 하나는 스물둘이다. 진로에 대해서는 '니들, 알아서 하라고 했지', 한 번도 상관해본 적이 없었다. 그랬더니 하나는 미술을 하다가 지금은 문학을 하고, 둘째는 사학을 하는데 둘 다 돈 안 돼는 공부를 하고 있다.(웃음) 돈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돈이 더 많이 드는 학문을 한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지 자기가 재미있는 것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폴라니가 1929년 대공항을 세계의 대전환기로 본 것처럼 지금 2008년 위기가 세계사적으로 대전환기의 시기이다. 대공황과 지금이 똑같은 것은, 그 앞의 2~30년 동안은 시장에 모든 것이 맡겨져 전 세계가 그쪽으로 미친 듯이 몰려갔다가 공황으로 붕괴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고 자기가 느끼는 대로 가면 되는데, 이전 시대가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왜 이전 시대가 이런 식으로 파국에 이르렀는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고 양극화를 방치시키고, '능력'에 따라 보상 받는 게 마치 정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능력에 따라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설사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은 것인지 좋은 할아버지와 좋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운일지 누가 안다는 것인가.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합리화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 차이가 천원이 되어야 하는지 천만 원이 되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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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빨리 변하는 시대에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직업이 유명할 거라고 얘기하면 틀릴 수밖에 없다. 세상이 변하면서 쓸모가 없어지는 직업들이 생기는데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전문직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독점을 허용한 의사, 변호사 같은 직업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워낙 그쪽이 안정적이고 다른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득이 높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이것이 국가적로 볼 때 얼마나 큰 능력낭비인가. 피를 보면 기절하는 애가 의사가 되고 시인이 됐을 사람이 의사가 되는 판국이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한을 풀겠다고 수필집을 내고 그러는데 그들을 보면 참 불쌍하다. 시인이 됐었을 사람이 의사가 되어 저렇게 불행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차피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게 되면 자연히 행복하게 열심히 자기 일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평등인데 평등해지면 선택의 자유가 커진다. 이것을 깨달은 것은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시고 난 다음 날 간 핀란드에서였다. 그곳에서 핀란드 교육개혁의 전반기 20년을 담당하던 '아호'라는 분을 만났는데 그가 내게 "너네는 어떻게 등수를 매기냐?"라고 물었다. 이어서 아호는 "애는 뜀뛰기를 잘하고, 애는 영어를 잘하고, 애는 수학을 잘하고, 애는 미술을 잘하는데 어떻게 등수를 매기냐?"라고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아이들마다 잘하는 것이 모두 다른데도 우리는 수학에는 가중치를 높게 주고 달리기나, 미술에는 가중치를 낮게 해서 하나로 점수를 만들어 70만 명의 등수를 매기는 것이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만약 아이들을 등수 매기지 않고 가중치가 없다면 시험을 안보고 공부도 안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중등교육에 있어서 우리나라도 굉장히 능력 있는 나라라고 이야기 하지만, 핀란드가 1등이다. 우리나라는 지독한 경쟁교육에 등수매기는 교육이고 거기는 등수가 없는 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는 나라이다. 핀란드 애들이 우리에 비해 반밖에 공부 안 하면서도 실제로 시험에서 비슷한 능력을 보이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직업 간의 보수가 비슷하고, 여기에 사회적 존경까지도 비슷비슷하다면 사람들은 다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나라들이 효율성에서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이유다. 평등이 효율을 낳는 것이 그 사회의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때문에 평등이 다양성을 낳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성이 있으면 사회의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다. 만일 변화가 미술을 필요로 하면 미술을 잘하던 애들이 대응을 하면 되고, 음악을 필요로 하면 음악으로 대응하면 되는 거다. 사회가 변화에 대한 대응 능력을 높이려면 다양해야 하는 것이고 다양해지려면 평등이 기본이다. 평등이 '획일'을 낳는 것이 아니라, 평등은 '다양'을 낳는다.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시대적 필요에도 부응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일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 오늘날 청년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아이들만 쓸데없는 가중치에 묶어놓은 것이 아니라 사회도 쓸데없는 가중치를 둬서 등수를 매겨 놨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분명히 배우지만,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가르치는 선생님도 알고 아이들도 다 안다. 이런 위선을 없애고 실제로 귀천이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더러 딱 한 가지 개혁을 하라고 한다면 교육개혁을 해서 대학입시부터 없애고 사교육도 없앨 것이다. 솔직히 우리 때에도 시험은 봤지만, 지금처럼 경쟁이 심하지 않았고 놀면서 공부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지금은 점수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것에 목매달게 되는데 이렇게 가다간 우리나라가 망한다. 우리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가 스펙을 쌓는데 젊음을 허비하지 않도록 세상을 바꿔야 하고 동시에 젊은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나는 젊은이들에게 정치를 권한다. 정치야말로 고도의 예술이고 정말로 해볼 만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시대의 흐름을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정치에 도전해야 하고 이러한 젊은 정치인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국력이 강한 이유는 정치가 강하기 때문인데 이곳에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이 정당 활동을 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민주주의 훈련이다. 우리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어디 시험공부 해야지 아이들이 정당활동을 하고 있을 수 있나. 정치는 순수한 애들을 오염시키는 거라고 생각한다.(웃음)
우리 사회에서 청년들은 연애포기, 결혼포기, 출산포기 일명 '삼포세대'로 불린다. 이런 상황에도 우리 청년들이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면?
결혼과 출산은 그렇다고 치고 연애는 반드시 해야 한다. 우리 연구원들보고도 자꾸 연애하라고 하는데 연애를 못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널린 게 사람 아닌가.(웃음) 연애가 인생의 꽃인데 해야지 왜 안 하는가. 물론 실연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고 아픔도 크지만 그 이전에 사랑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이 제일 크다고 생각한다. 돈과 시간이 없어서 연애를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평생을 공부한 파우스트한테 '세상은 이렇게 푸른데 너는 왜 맨날 회색 속에서 해매느냐'고 '사랑하라'고 꼬시지 않나. 마음에 와 닿는 좋은 말이다. 사람은 사랑하게 돼 있고 마음껏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실 연애를 막고 있는 많은 조건들이 존재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에는 교육제도와 같은 사회적인 제약 즉 불평등이 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해야지. 사랑이 인생의 목표인데.(웃음)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사회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일수록 따뜻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전두환 정권 시절 대학생 과외 금지가 있어 진보는 정말로 돈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에게 참 미안한데, 우리끼리 술 마시다가 돈이 없으면 꼭 마누라를 불러서 계산하게 했다. 그런데 아내가 돈을 내려고 나오면,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지들만 알아듣는 암호로 계속 이야기했었던 적이 많았다. 그런 잘못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한다.(웃음) 또한 진보는 대중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지니고 있어서 만일 투쟁이 일어나면 거기에 적극 동참하지만, 때로는 그들이 갖고 있는 이념이 사람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는 있다. 진보 스스로 자기 이념의 포로가 되면 안 된다.
정태인에게 자유란?
경제학에서 가장 유명한 자유는 프리드먼이 이야기하는 "선택의 자유"다. 그런데 그 선택의 자유는 결국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결정한다. 돈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없다는 말인데,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인권 중에서도 소유권 재산권을 특권화한 소유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자유는 인권적인 측면이 동시에 있는 것인데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만능주의라는 것은 소유권의 자유를 최대한 확대해서 자유의 인권적인 부분을 억누르는 것이다. 오히려 경제학에서의 자유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도출신의 아마티아 쎈의 개념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는 능력이론으로 "자유로서의 발전"이라는 말을 했는데 "자유란 개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회는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춰줘야 한다"고 했다. 가령 장애인이 자기 자유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사회가 그 장애물을 없애줘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자유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개념은 평등개념과 같이 묶여 있다. 평등하지 않으면 자유도 없는 것이다. 선택의 자유가 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을 선택해도 별 차이가 없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능력을 발휘하면 되는 거다. 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선택의 자유도 평등할 때 얻을 수 있고, 그럴 때 자신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행복에도 이를 수 있다. 사실 자유는 진보의 굉장히 중요한 구성요소인데, 이것을 자유민주주의 자유라고 생각해서 너무 배격했다. 또 국가사회주의라는 화석화된 집단이념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배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는 평등과 결합해야만 사람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자유와 평등이 결합했을 때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경제에서도 경제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의 과제이다. '경제민주화'를 막는 핵심이 재벌이기 때문에 재벌개혁이 경제민주화의 중요한 과제로 되어 있지만,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정의란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평등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고 이것을 경제 국면에서 실현하자는 것이 바로 '경제민주화'인 것이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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