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자유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사람에게는 천부의 인권, 천부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성립이 안 되는 말인 것 같다. 자유라는 것은 일정한 조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그러면서 그는 "자유롭다고 느낀 적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솔직히 한 번도 없었다. 늘 사회적 인권에 대한 갈증, 내가 나에게 부여한 책임, 이것들이 만드는 어떤 구속감 같은 것들로 인해 내 스스로가 편안하고 자유로웠던 적은 정말로 없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던 적이 역사상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자유에 대한 희망, 자유에 대한 강한 갈망은 있었지만 자유에 대한 '추억'은 나에게 없다"라고 답한다. 그래서 그렇게 자유의 조건을 만들기 위한 상황들에 자신을 배치해왔던 것일까.
"그동안 나는 '내가 지금 이 국면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하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될까' 생각하고 나 자신을 그곳에 배치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 때는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의료보험통합운동에 나를 배치했다. 노무현 정부 때 미래사회위원장이나 사회정책수석에 나를 배치한 것도 마찬가지 의미였다. 권력이 얻으려고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정부에 들어가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위치에 내가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 나를 그리 배치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출세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이번에는 국회의원으로 들어갔으니까 이 임기 마치고 나가면 또 운동권에서 나를 배척할지도 모르겠다.(웃음)"
"1987년에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을 시작하고 나서 일종의 엠티를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밤늦도록 토론을 하는데 딱딱한 의자에 궁둥이가 아파서 도저히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불편한가 했는데 1977년에 학교를 졸업해서 거의 10년 동안 안락한 의자에서만 앉아 살아왔던 나의 모습이 돌아다 보였다. 학회를 해도 호텔에서 하고 학내 모임을 해도 편하고 좋은 곳에서만 해 왔으니 그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가 낯설어진 것이다. 그 이후로 딱딱한 의자에 빨리 다시 익숙해져야지 하면서 의도적으로 노력을 했다."
"휠체어를 타보니까 한국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운전사가 있는 자가용을 타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도저히 다닐 수가 없다." 그는 한 다리가 불편해 나머지 한 다리마저 다치면 휠체어를 타야지만 거동이 가능하다. 그래서 가끔 '도가니' 같은 장애인 나라에 잠깐씩 다녀온다고 한다. 그 지독한 경험들이 그를 경제민주화, 보다 구체적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드는데 자신을 배치하게 했나 보다.
"돈을 버는 과정은 개 같았는데 쓰는 것이 정승 같다고 칭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개같이 번 부분은 용서받고, 정승같이 쓰는 부분으로 존경까지 받고 싶어 한다면 곤란하다. 요즘은 기업에도 ISO 26000과 같은 사회적 규범이 나와서 이런 것들을 다 지킨 후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되겠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경제민주화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민주당은 구민주당, 한국노총, 혁신과 통합 등이 연합체로 모여 있는 것인데 통합은 했지만 새로운 방향으로의 혁신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지난 총선 때 많은 부분에서 실망감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문제가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초선 의원들이 이런 변화의 역할을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얼마 전에 약칭 '민초넷'이라고 하는 민주당 초선 의원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혹시나 이것이 당의 분열로 오인될까 봐 조심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당의 변화 내지 역동성을 고양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존재가 민주통합당을 자극하는 것을 넘어, 이 땅의 가장 약한 존재인 장애인들이 더 이상 도가니 같은 걸리버 나라에서 고통 받지 않는데 사용되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이 자유로워질 때 우리들은 얼마나 더 자유로워질까 상상하면서 말이다.
▲ 김용익 민주통합당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폴리오(척수성 소아마비)'를 앓으셔서 오른쪽 다리가 좀 불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 시절, 자신의 육체적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요새는 '폴리오'라고 하는 소아마비를 앓았다. 어려서는 지금보다 훨씬 불편해 거의 매일 넘어지다시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수술을 받고 고등학교 때 한 번 더 수술을 받고 나서 지금은 많이 편해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것이 내게 어려움을 많이 주었던 것 같지는 않다. 내 아버지는 원래 고향이 논산이었는데 6.25 때 익산의 처가로 피난을 오셔서 꽤 오랫동안 사셨다. 그래서 나는 익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를 들어갔더니 놀리고 찝쩍대는 아이들이 있었다. 1학년 1학기 말에 처음 시험을 봤는데 내가 일등을 했다. 자랑 같지만 내게는 그 시험이 너무 쉬웠다.(웃음) 열 문제 중에 한 문제를 틀렸는데, 뭐가 틀렸는지도 기억난다. 잠자리를 그려놓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쓰는 문제였는데 전라도 사투리로 '잠마리'라고 썼다가 틀렸다.(웃음) 그 이후부터는 아이들이 나를 놀리지 않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놀리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든지 아니면 힘이 세든지 하면 절대 왕따 시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장애인이 가장 고민하는 때는 연애하고 결혼할 때다. 나는 고민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대학 시절 미팅은 피했다. 내 생각에 미팅상대자 여학생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딱 한 번 미팅을 해본 적이 있었다. 친구가 하도 강권을 해서 할 수 없이 끌려 나갔는데 성공적이었다. 사귀자고 하면 금방 사귈 것 같았는데, 이미 내게 여자 친구가 있어서 사귀질 못했다.(일동 폭소) 양다리 걸칠 수 없으니 말이다.(웃음) 그 여자 친구하고 1979년에 결혼을 하고, 그 전에 이미 학교에 전공의로 남게 되었다. 그 이후로 다리가 아픈 것이 내게 불편함을 가져다주는 일은 없었다.
의약분업을 추진할 때 반대하는 의사들이 나를 심하게 공격하고 비난했는데 그 중 어떤 소아과 단체에서 내게 장애가 있어서 마음이 비뚤어졌다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의협이 상당히 이성적인 편이었다. 의협이 취소를 종용해서 그 단체가 내게 사과를 한 일이 있었다. 의사가 장애를 거론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고 더군다나 소아과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도 트위터 등에 여전히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 다리가 불편한 것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은 어렸을 때보다 의약분업 이후가 더 심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은 아니다.(웃음)
살짝 연애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사모님과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하다.(웃음)
의료봉사하는 서클에서 만난 간호학과 학생이다.(웃음)
대학 시절 본과 1학년 때부터 매주 서울지역의 판자촌을 다니며 의료봉사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청년의학도 김용익에게 빈민촌의 의료봉사는 어떤 경험이었나?
본과에 들어가서 우연히 학교 게시판을 보았는데 진료봉사를 하는 써클 광고가 있어서 친구와 함께 들어갔다. 1973년 본과 1학년 때부터 1976년 졸업할 때까지 매주 주말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판자촌 진료를 하고 방학 때는 시골로 무의촌 진료를 갔다. 당시 서울은 도처에 많은 판자촌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진료를 시작한 곳은 영등포 문래동의 안양천 일대였다. 그다음에는 지금의 성산대로 주변 내부순환도로 밑에 있는 모래내로 옮겼다. 연세대학교 뒤쪽 남가좌동에서 시작해서 한강까지 모래내를 따라 양쪽 뚝방이 판자촌으로 꽉 차있었다. 그 일대 사람들이 철거를 당해 당시의 고양군 행신리 일대로 이사를 가서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거기까지 쫓아가 진료를 하기도 했다. 시골로는 평창, 고성, 포천 등으로 무의촌 진료를 갔었다. 여름에 간 강원도 고성에서는 모기에 뜯겨서, 겨울에 간 포천에서는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을 뻔했다.(웃음)
내가 들어간 진료서클은 특별한 서클이었다. 이 서클은 이름이 '송촌 의료봉사회'였는데 '송촌'은 지석영 선생의 아호이다. 그 전신은 '사회의학 연구회'라고 하는 연구회가 설치한 '함춘 의료봉사회'였다. 이들이 서울대 의과대학의 의료운동권 1세대들이다. 긴급조치가 시작되면서 '함의봉' 회원들이 많이 퇴학을 당하고 정학도 당하면서 해체가 되었다가 '송촌 의료봉사회'로 재조직된 것이었다. 우리는 단순히 진료봉사를 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의학이라는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지역사회 의학은 전문화되고 세분화되고 동시에 환자가 객체화되어 비인간화되는 현대의학에 대한 대안적 움직임이었다. 지역사회 주민이 주체가 되어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보건의료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나아가 예방과 치료와 재활을 포괄하는 보건의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차, 2차, 3차 의료전달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활동을 했었다.
그래서 진료봉사를 나가면 단순히 진료를 하고 약만 주고 오는 것이 아니라, 판자촌 주민들을 일일이 방문했다. 우리는 이것을 '예방 보건활동'이라고 부르며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건강교육을 하고,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동네의 의료보험을 만들어보자는 구상을 하기도 했다. 보통 농촌봉사를 가면 반쯤 일하고 반쯤 놀다가 오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는 시간이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가정방문하고 진료하고 끝나면 술 먹고 노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평가를 하곤 했다.(웃음)
1977년 졸업을 하면서 지역사회 의학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예방의학에 남았다. 예방의학 중에서도 의료정책 분야를 하자고 생각했는데 그 당시에는 사실상 의료정책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때 마침 신영수 교수라는 분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셨다. 둘이서 거의 개척하다시피 의료정책 연구를 시작했다. '함춘 의료봉사회', '송촌 의료봉사회'의 그 그룹들이 1987년 '인도주의의사협의회'를 만든 주축들이었다. 돌이켜보면 '송촌 의료봉사회'에서 진료봉사를 한 것이 내 전공분야를 하게 된 것으로 이어지고, 나중에 의료개혁을 하게 되는 기원이 됐다고 할 수 있겠다.
청년 김용익에게 가장 중요했던 화두는 무엇이었나?
옛날부터 무슨 대단한 생각을 갖고 살아온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하고 조용한 학생 중의 하나였다. 다만 '어떤 의학, 어떤 의료, 어떤 의사'에 대한 고민이 조금 있어서 남들이 하지 않는 의료봉사도 하고 지역사회 의학을 하게 된 것이다. 의료정책분야를 선택한 것은 나 개인이 임상의사가 되면 수만 명의 의사 중에 한 명이 될 것이지만, 좋은 의료제도를 만들면 그 제도로 수많은 의사들이 좋은 의료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임상의사보다는 좋은 제도를 만드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화두라 하면 내가 청년이었던 그즈음의 시대가 하도 암울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1년에 박정희 체제가 시작되어 결혼을 해서 집들이를 하고 있던 1979년에 막을 내렸으니까 아홉 살부터 스물일곱 살 때까지 내 소년기와 청년기의 전부가 박정희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다. 철이 든 이후, 그 시기 동안 내 마음은 단 한 번도 깨끗하고 맑게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단 한 순간도 말이다. 5월 16일 날 '군사혁명'이 났다고 하길래(당시는 '군사혁명'이라고 했으니까) 선생님께 "4.19는 4월 19일 날 일어나서 4.19라고 하는데, 그럼 이건 앞으로 5.16이라고 그러겠네요?"라고 물었더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며 놀라시던 기억이 난다. 대학 시절은 개학하면 데모하고 데모하면 위수령하고 위수령이 풀릴 때쯤 방학하고 계속 그렇게 돌고 돌았다. 그때는 서울대학교 의예과가 지금 대학로에 있는 마로니에공원에 있었는데 매학기 데모의 연속이었고 악몽에 시달리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시기였다.
한번은 내가 존경하는 유명한 소아과 교수이자 향린교회의 중요한 멤버이기도 하셨던 홍창의 교수님께 "저는 79년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김 선생이 그러면 나는 어땠겠소?"라고 그러셨다.(웃음) 아닌 게 아니라 그분은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6.25를 겪으시고 이승만 체제와 박정희 체제를 다 겪어 오신 분인데 그 앞에서 내가 철딱서니 없이 그런 말을 했으니 나는 어땠겠느냐고 하신 것이다.(웃음)
ⓒ프레시안(최형락) |
'의약분업' 시행 과정에서 의사 출신으로서 드물게 찬성에 앞장섰다. 그로 인해 많은 동료 의사들에게 질타와 쓴소리를 들었다. 의약분업 도입을 관철하기까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
의약분업을 찬성한 정도가 아니라 주모자였다.(웃음)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의료분야에서 두 가지 큰 정책이 추진되었는데 하나는 의료보험(건강보험)을 통합일원화해서 건강보험을 만드는 것이었고 하나는 의약분업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의료보험 통합일원화는 긴 역사가 있다. 1988년에 농촌지역에서 의료보험이 시작되었는데 농민들이 반발해서 의료보험증을 불사르는 등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다. 직장의료보험이나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은 의료보험료를 사용자가 반, 피용자가 반을 부담했는데 농민들은 전액을 다 본인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마침 1987년 가을에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건약(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등 의료운동단체가 결성되어 농민들과 함께 이 운동을 시작되었다. 이러한 운동이 10여 년이 지속되어 오다가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통합일원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의약분업 논의가 시작되었다. 의약분업은 원래 약사법 제정 당시부터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부칙으로 실시를 유보하는 조항을 달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 유보조항은 일정한 시한이 설정돼 있었는데 그 부칙을 개정하고 또 개정해 온 것이다. 의약분업을 추진할 당시의 유보 시한은 2000년까지였다. 다른 정부 같으면 그냥 또 유보하고 지나갔을 텐데 김대중 정부는 의약분업을 실시하겠다고 나섰다.
정부에서 하겠다고 나오니까 나도 의약분업을 할 준비를 해야 했는데 의료보험통합 때문에 한동안 미뤄두고 있었다. 의보통합이 어느 정도 진전된 다음 며칠 밤을 새워 어떤 논리로 의약분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핵심만 뽑아 두 페이지 분량의 짤막한 문건을 완성했다. 의약분업의 장애요인은 분업의 기술적인 측면 때문이 아니라 약가(약값)에서 생기는 비공식적인 이익 때문이고 의약분업을 하기 위해서는 약가를 내리고 수가를 동시에 올리는 조치를 선행해야 한다는 틀을 짠 것이다. 당시 기준으로 병원 수익의 약 3분의 1 정도가 약가차액에서 나왔기 때문에 약가차액은 병원 운영에 어마어마하게 중요하게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부분을 정리하지 않으면 의약분업을 할 수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매우 복잡한 결과를 낳았다. 그걸 깨닫지 못했으면 의약분업을 안 했을 텐데 말이다.(웃음) 내가 한번 물은 것은 놓치지 않는 성격이라서 사서 고생을 한다.
지속적이고 단계적으로 추진했다. 처음에 원리를 만들고 그 생각을 기초로 해서 약가-수가 조정방안을 만들고 의약분업 자체의 모델을 만들어 이것을 의사와 약사들에게 왔다 갔다 하면서 일종의 협상을 지속적으로 했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민주당 보건전문위원으로 있었던 이상이 전문위원의 도움으로 정책위원장이었던 김원길 의원에게 시간을 얻었다. 의사와 약사 간 합의를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는데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 한번은 정말로 의사회와 약사회가 합의를 해서 발표까지 하고 뉴스에도 크게 났는데, 이들이 돌아가 파기를 하면서 이후에도 계속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2000년 7월 1일 의료보험통합일원화와 의약분업이 동시에 실시되었다.
의약분업의 과정 속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내가 의사들한테 엄청 욕먹고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힘이 하나도 안 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당연히 힘들었지만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서 이룬 의약분업 제도가 바람하지 않은 방향으로 왜곡되어 간 것이 훨씬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의약분업의 문제점이라고 거론되는 것의 대부분은 그런 변형들 때문이다.
의약분업을 처음 들었을 때 신선했다. 제도를 만들 때는 그 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만나지만 반면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기도 한다. 그런 상황들을 다 뚫고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 그 제도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런 확신을 어디서 얻었나.
의약분업을 하지 않는 나라는 제국주의의 전통이 있는 일본과 한국과 대만 정도다. 한국에서 의약분업을 하기 훨씬 전에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미 그곳에서는 의약분업을 하고 있었다. 서양 의료제도의 영향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명치유신(메이지유신) 때 서양식 의료제도를 만들면서 의-약을 분업하되 실시는 유보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 영향이 지금도 일본 자체는 물론,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약분업의 실시는 한국이 일본 식민의 역사 중 하나를 벗어 버린 것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의약분업이 몇백 년 전에 이미 제도화되었다. 지금은 의사가 한 종류로 되어 있지만 19세기 초반 정도까지 유럽에는 내과의사(physician), 외과의사(surgeon), 산과의사(obstetrician), 아포테캐리(apothecary, 약제상) 등 4종의 의사가 있었다. '피지션'이라는 내과의사가 제일 고급의사로서 중세기부터 대학에서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때 대학을 다녔던 의사가 바로 이들이다. '서젼'이라는 외과의사는 '피지션'과 완전히 기원이 다르다. 외과의사의 조상은 칼을 가지고 있는 이발사이다. 지금도 이발소 문 앞에는 으레 빨강, 파랑, 하양의 3색 원통이 돌아가고 있는데 이것이 각각 동맥, 정맥, 신경을 나타내는 색이다.(웃음) 산과의사의 조상은 동네의 산파 할머니였다. '아포테캐리'는 약을 만들어 파는 제약상 같은 것으로 서양동화를 보면 마귀할멈이 큰 항아리에 무엇인가를 막 넣어서 부글부글 끓여 묘약을 만드는 그림이 흔히 나온다. 그것이 바로 약을 조제하는 '아포테캐리'의 모습이다.(웃음) 내과, 외과, 산과의사는 약을 직접 짓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동식물을 재료로 갖추어 두고 처방대로 갈고 자르고 다리는 일을 의사들이 하기에는 너무 번거로웠던 것이다. 환자에게 처방전을 주면 '아포테캐리'가 처방대로 약을 만들어 주었다. 이들은 한편 직접 환자를 보고 약을 지어 주기도 했다. 나중에 '아포테캐리'의 일부는 의사로 흡수되고 일부는 약사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영국말로 약사는 '케미스트(화학자, chemist)'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약국을 '아포테케(Apotheke)'라고 한다. 약사가 된 '아포테캐리'는 환자를 직접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의사들이 약을 다루지 않았고 처방전만 주면 약사들이 약을 만들었다. 서양에는 의약분업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너무 오래되고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단어 자체가 없는 것이다. 나도 의약분업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애를 먹었다. 방도가 없어 다국적 제약회사에게 의약분업을 뭐라고 하냐고 물었더니 그냥 '분리(separation)'라고 한다더라.(웃음)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당연히 의약분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서양을 따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약을 조제하고 약사가 병을 처방하는 상태는 매우 전근대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약사가 환자에게 "기침 나세요? 머리가 아파요? 콧물도 나세요?"라고 하면서 바로 약을 지어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의사가 환자를 보고 처방하고 직접 약을 지어주고 하는 일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옳지 않은 일인데다가 돈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면 더욱 복잡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가 사회학을 가르치고 사회학자가 경제학을 가르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물론 경제학과 사회학이 다 같이 사회과학이기는 하지만 경제학을 하는 사람과 사회학을 한 사람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의사의 기능과 약사의 기능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가 해결되지 않고 그 위에 다른 의료시스템을 시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2001년 11월 25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하던 날 새벽, 진정 1호를 낸 것으로 알고 있다. 제자 이희원 씨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제천시 보건소장 지원 과정에서 차별을 받았던 것에 분노해서 진정 서류를 대신 들고 인권위를 찾아가 인권위에 의해서 두 달 만에 장애인 차별이라는 판정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희원은 정말 기적 같은 친구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중에 의과대학을 다녔는데 아주 성실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자주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두통은 흔한 질병이고 원인은 수백 가지인데 이 친구에게는 뇌동맥류라는 특별한 원인이 있었던 것이었다. 동맥류란 동맥의 혈관 벽이 일부 얇아져서 그 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병이다. 나이 든 여자들의 종아리 뒤에 울퉁불퉁 튀어나오는 정맥류가 이것과 비슷한 것이다. 물론 정맥이 아니라 동맥에 생기면 아주 위험하다. 그런데 뇌동맥류는 뇌 속의 동맥이 터지면서 엄청난 속도로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이라 대부분 죽는다. 그런데 이희원은 수술장 실습을 돌다가 동맥류가 터졌다. 옆방의 신경외과 교수님을 급히 불러 그 자리에서 응급 수술을 받았기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밖에서 터졌으면 바로 죽는 것인데 말이다. 살기는 살았지만, 혼수상태가 계속됐다. 다시 기적이 일어나 의식이 돌아왔고 일부 마비된 상태는 다시 재활치료를 받아 1년여 만에 천천히 걸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기적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졸업할 때 즈음 나를 찾아와 보건소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몸이 안 좋으니까 보건소에 취직을 하려나 보다' 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원래부터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의료 활동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자리를 찾아 제천시 보건소로 보냈더니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의사생활을 잘 했다. 시간이 지나 보건소장이 될 만한 계제가 있어 시장에게 말했더니 '장애인을 참모로 쓰면 내가 창피해서 어떻게 시장을 하냐'고 하며 상대를 안 해준다는 것이다. 내게 와서 하소연을 하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기업의 사장들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하지만 이 사람은 시장이다. 시장이 장애인을 그렇게 생각하면 제천의 장애인들은 다 뭐가 되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궁리를 하는데, 마침 막 출범하려던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가 왔다. 인권위 준비위원에 또 다른 제자였던 김선민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제소를 하는 게 좋겠고 기왕에 제소를 하려면 첫 번째로 해야 주목을 받고 뉴스에도 나오니 이른 새벽에 나오라고 코치도 해주었다. 그래서 새벽에 나가서 1번으로 이희원 사건을 제소했다.(웃음)
결국 장애인 차별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그렇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당시 김창국 인권위원장이 나를 보자고 해서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차별인 것은 맞지만 보건소장을 시켜줄 수는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희원이 보건소장에 임명된 후에 자른 게 아니라 응모 단계에서 안 된다고 한 것이기 때문에 보건소장을 임명하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봄에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그 시장이 또 출마를 한다는 소식을 들려왔다. 이 사람을 꼭 떨어뜨리려고 제천 시내 한복판에 가서 일인시위를 했다. 그 시장은 원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었는데 이희원 사건으로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내가 시위를 하고 있으니 자민련(자유민주연합) 선거 운동원들이 바카스도 사다 주고 그랬다.(웃음) 선관위 직원이 쫓아 와서 위법이라고 하는데 내가 교수고 딱 네 시까지만 하고 가겠다고 하니까 빡세게 저지는 안 했다. 한나절은 버티고 왔다. 결국 그 시장은 떨어졌고 이희원은 춘천 소년원으로 가서 지금까지 그곳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겨레> "걸리버의 장애인 나라 여행기"(2011년 10월 10일 자)란 칼럼에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해 쓴 것을 보았다. 특히 "나는 종종 넘어져서 한두 주씩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그러면 다시 잠깐씩 장애인 나라에 들렀다 온다. 마치 추석날 시골집에 다녀오듯이. '도가니' 같은 장애인 나라에서 영원히 출국금지가 되어 있는 그 나라의 국민들을 만나고 온다"라는 대목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장애인으로의 삶이, 그리고 가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들이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데 적용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의약분업 와중에 피곤해서 넘어졌다. 서울대병원에 가면 시계탑이 있는 옛 대한의원 건물이 있다. 그때 우리 과가 그 건물 2층에 있었다. 옛날 건물이라 계단이 고르지 않아서 내려가다가 넘어져 종아리뼈가 부러졌다. 원래 한쪽 다리가 불편했는데 다른 쪽 다리가 부러져버렸으니까 양하지 장애(척수 장애)가 되었다. 두 다리가 모두 힘을 못 쓰면 목발을 짚을 수도 없게 되고 휠체어를 타야 한다. 그 경험을 칼럼에 쓴 것인데 실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 휠체어를 타보니까 한국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운전사가 있는 자가용을 타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도저히 다닐 수가 없다.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부가적인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치료받아야지, 어디로 옮겨가려면 택시 타야지 등등해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장애인은 비장애인들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기가 어렵고 그래서 교육수준이 낮아진다. 신체적 능력과 함께 부실한 교육으로 인해 좋은 직업을 갖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가난해진다. 한국에서 장애인이라는 것은 곧 가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장애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장애인을 둔 가정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섯 명의 가족이 있는데 한 명이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인이다. 이 사람이 병원을 가려고 하면 넷 중의 하나는 하루 일을 빼먹고 휠체어를 밀고 병원에 같이 가줘야 한다. 그러면 빠진 만큼 돈을 벌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장애인은 웬만하면 아파도 참고 그러면서 병이 더 악화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득보장을 충분히 해줘야 한다. 장애로 인해 생긴 가난을 보충해주는 소득보장에 더해서 장애 때문에 생기는 추가비용을 더 부담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겨우 출발점이 같아진다.
의료에 대한 장애의 불편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청각장애인이 병원에 가면 말이 통하지 않아 의사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가 없다. 필담을 해야 하는데 요즘 진료가 의사소통이 원활해도 3분 진료를 할 판에 청각장애인이 와서 필담을 하자고 하면 좋아할 의사가 어디 있겠나. 그러니까 병원에 마음대로 못 가는 거다. 청각장애인은 보이기도 하고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지만, 길거리에 나가면 소리가 안 들리기 때문에 불안해진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소리에 의지해서 위험을 인지하고 위치를 파악하는데 이것이 없으면 밖으로 나가는 것을 피하게 된다. 극단적인 예는 오아시스라는 영화에 나오는 뇌성마비 장애인 같은 경우다. 이런 장애인이 치과 치료 한번 받으려면 몇 명이 붙잡고 있어야 한다. 이런 장애인이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해 봐라. 얼마나 힘이 들겠나?
나도 휠체어를 타보기 전까지는 장애인들의 이런 불편들을 깊이 모르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에 복건복지부에서 연구비를 좀 얻어 장애인 보건의료연구를 했다. 그 당시까지는 장애인 정책 중에는 보건의료연구가 없었다. 내가 개념을 정리하고 종합적인 상황과 대안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냈다. 지금은 여러 후배들이 이 분야 연구를 하고 있다. 흔히 장애인 의료라고 하면 장애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의료만을 생각한다. 예를 들어 척추장애 같으면 척추, 시각장애인 같으면 눈에 관련된 의료를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조사해서 실태를 알고 보면 장애인들은 온갖 질병이 일반인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움직이기 어렵고 몸이 약하니까 배가 아파도 남들보다 더 아프고 머리가 아파도 더 아픈 것이 당연하다.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장애관련 의료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의료가 더 많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바탕에 이동권 문제가 있다. 이동할 수 없으면 교육을 받을 수 없고 이동을 할 수 없으면 일자리도 얻을 수 없다. 이동할 수 없으면 병원에도 갈 수 없다. 장애인에게 이동권은 편이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조건이다. 사람들이 장애인의 이동문제를 얼마나 오해하는가 하면 장애인 이동권은 저상버스만 해주면 다 된다고 생각한다. 저상버스고 뭐고 길거리를 나가보면 장애인들이 제대로 돌아다닐 수가 없다. 보도블록을 새로 깔아도 1년만 되면 울퉁불퉁해져서 걷는데 아주 불편하다.
언젠가 학생들에게 이런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대학로에 있는 서울의대부터 성균관대학까지 휠체어를 타고 가보고 종로구 안에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는 병원이 몇 개나 있는지 조사해보라고 했다. 일단 성대까지 휠체어를 타고 가본 학생은 한 명도 빠짐없이 100퍼센트가 다 자빠져서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종로구에 있는 병원의 의사가 있는 방문 앞까지 휠체어를 자기가 밀고 갈 수 있는 경우는 10퍼센트가 안 되었다. 장애인 혼자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휠체어를 밀어주는 희생적인 어머니가 사람마다 있으라는 법이 어디 있나? 그리고 어머니라고 해서 왜 이런 희생을 해야 하나?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이 시급하다.
역시 <한겨레> "부자가 해서는 안 될 일"(2011년 10월 31일 자)이란 칼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부르짖지 말라. '귀족은 의무를 진다'는 뜻인데 당신들은 의무를 질 필요가 없다. 해서는 안 될 일만 안 하면 된다. (중략) 당신들이 조금만 베풀어주면 입시지옥도, 청년실업도, 중년 과로사도, 노인 자살도, 비정규직 차별도 없어질 것 같다. 삶이 오죽 팍팍하면 젊은것들이 새끼를 못 낳겠다고 하겠나? 살 날 며칠 안 남은 노인네들이 제 손으로 목을 매겠나?"라며 가진 자들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았다. 본인이 생각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무엇인가?
불어로 '노블레스'라는 말은 '귀족'이라는 명사이고 '오블리주'는 '의무를 진다'는 동사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귀족은 의무를 진다'라는 하나의 문장이다. 그런데 내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뭐냐고 하면 그런 것은 기본적으로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귀족이 의무를 지려면 우선 귀족이 있어야 하는데 귀족이라는 것이 지금으로 말하면 특권층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권층 같은 것은 애당초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흔히 영국의 왕자들이 전쟁에 앞장서서 나가는 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예로 드는데 이것도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군대에 가는 것은 왕족이나 평민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또 대기업들이 사회적 공헌을 한다고 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고들 칭찬하는데 그것도 '노블레스가 되는 과정' 자체가 정당할 때만 칭찬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돈을 버는 과정은 개 같았는데 쓰는 것이 정승 같다고 칭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개같이 번 부분은 용서받고, 정승같이 쓰는 부분으로 존경까지 받고 싶어 한다면 곤란하다. 요즘은 기업에도 ISO 26000과 같은 사회적 규범이 나와서 이런 것들을 다 지킨 후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되겠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경제민주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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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의 '3+1'(무상의료, 무상급식, 무상보육, 반값등록금)정책, 이 중 특히 무상의료정책 구상에 영향을 미쳤고 또 직접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용익 표 무상의료정책의 핵심은 무엇인가?
무상의료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의료이용을 할 때 본인 부담금이 '0원'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실질적으로 의료에 들어가는 본인 부담금을 획기적으로 줄인다는 정도를 의미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획기적인 건강보험 급여확대를 통해 본인 부담금을 대폭 줄어주는 것인데, 여기에는 감자뿌리처럼 이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제일 대표적인 것이 비급여 부분이다. 우선 획기적인 건강보험 급여확대를 위해서는 비급여 부분이 있으면 안 된다. 비급여 부분이란 건강보험에서 적용을 안 해주는 부분, 즉 보험의 대상이 아니거나 제외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MRI 같은 것이다. 성형수술의 경우는 치료목적이 아니라, 미용목적의 수술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법에서 비급여 부분으로 되어 있지만 치료목적의 서비스 중에도 건강보험에 적용 안 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 병원에서 비급여 부분을 자꾸만 만들면 보장성이 낮아진다. 실제로 참여정부에서 피크에 달했던 보장성이 이명박 정부에서 들어서 점점 낮아졌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서 떨어뜨리려고 해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무 짓도 안 하니까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비급여 부분들을 전부 다 보험급여로 넣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급여 부분을 없애고 보장성을 좋게 해주면 개인부담이 훨씬 줄어들어 환자들이 대형병원으로 몰리고 지방에 있는 환자들이 서울에 더 오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병원 인프라를 다시 짜야한다. 지방에 훨씬 좋은 병원이 있어서 서울에 올 필요가 없게끔 해주고 서울 안에서도 2차 병원을 좋게 해주어 3차 병원에 갈 필요가 없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프라 개혁은 상당 부분 공공 인프라로 짜지 않으면 재편성이 불가능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미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고 여기에 겹쳐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상의료가 치료만 해주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결코 감당할 수 없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50년이 되면 38퍼센트가 되고, 60세 이상의 인구는 대략 절반이 된다. 이 때문에 최대한 가정방문을 통해 질병 자체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보건소의 임무이다. 그러나 직장에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는 사람들은 지역 보건소에서 제공하는 혜택을 전혀 못 보기 때문에 직장보건과 학교보건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가정, 직장, 학교를 포괄하는 강력한 예방보건 네트워크를 만들어 양극화와 고령화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 2020년 정도가 되면 고령화가 아주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무상의료'라는 정책 속에는 건강보험 급여확대, 보건의료 인프라 개혁, 치료에서 예방으로 보건의료의 중심을 전환하는 세 가지의 중요한 부분이 있다. 나는 이 중에서 인프라 개혁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다. 인프라 개혁이 없으면 급여확대도 예방도 다 못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민주통합당에서도 문재인 의원, 김두관 전 지사, 손학규 전 대표 등 주요 대선후보자들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어쩌면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면서도 이 두 정부의 과오를 넘어설 수 있느냐가 핵심 과제일 것 같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으로 있으면서 노무현 정부가 잘한 것과 못한 것 모두를 매우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는데, 민주통합당 대선 주자들에게 특별히 주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새로운 시대를 열어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정권교체는 수단이고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는 여러 영역에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경제사회적인 영역에서는 경제민주화를 이루고 복지국가로 진전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부와 시장의 관계가 정부의 위축, 시장 만능주의, 나아가 시장독재의 형태로 진행되었던 것을 국가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만들어 가는 방식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의 그 새로운 통제력은 민주주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개발독재, 정경유착과 같은 과거 방식으로의 회귀여서는 안 된다. 노동과 자본과의 관계에서도 지금처럼 자본 일변도의 사회로 가서는 절대로 안 되고 대대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노-자 간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고 노동소득분배율이 훨씬 더 커져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선 후보들이 공약수준의 생각이 아니라 진짜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어야 한다. 공약이라는 것은 국민들에게 표를 얻기 위해 내놓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국정운영과는 다를 수 있다. 이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구상이 필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선 후보들에게 '경쟁 과정에서 공정하고 깨끗한 경쟁을 해 달라, 아름다운 승복을 해 달라'고 할 것이다. 거기에 꼭 한 가지 더 주문하고 싶은 것은 '승복한 다음에는 내 일처럼 뛰어들어라'라고 하고 싶다. 승복하고 나서 집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일처럼 뛰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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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김용익으로서 특별히 집중하고 있는 분야가 있다면?
나는 전공분야가 보건복지니까 우선 이 부분을 잘해야 할 것이다. 민주당 강령을 보면 '보편적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잘해야 하는 위치에 내가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 중에서도 정치 또는 정무를 중심으로 하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정책을 위주로 자기 전공분야를 살리는 국회의원들이 있다. 각각의 영역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들이 중구난방으로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협업 체제로 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을 할 때, 당시 사회정책수석은 업무영역이 타 정부에 비해서 굉장히 넓어서 교육, 보건복지, 여성, 노동, 환경, 문화체육 관광, 행자부의 지방자치 부분을 사회수석 혼자 담당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여러 사회정책들을 조율하는 역할을 많이 했었고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사회정책들이라는 것이 각각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사회정책도 경제 정책적인 의미를 크게 가지고 있다. 복지정책만 해도 말이 복지정책이지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경제정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 지원금을 주게 되면 몇조씩 돈을 투입해야 하는데 이것은 국가 경제를 운영하는데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국가 재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내수 진작 대책으로서의 의미도 가진다. 국민연금도 마찬가지로 해마다 몇십조 원씩 쌓여갈 텐데 이 기금의 운용을 통해 어마어마한 경제정책이 실현되는 것이므로 '국민연금이 복지부 소관이어야 하는가, 경제부처 소관이어야 하는가' 그 자체가 논란이 될 정도로 중요한 문제이다. 노동정책의 경우에도 경제정책이기도 하고 사회정책일 수도 있다. 이렇게 사회정책들 상호 간, 그리고 경제정책과 사회정책 간 조율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이것에 내가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을 느끼고 있다.
지금의 민주당은 구민주당, 한국노총, 혁신과 통합 등이 연합체로 모여 있는 것인데 통합은 했지만 새로운 방향으로의 혁신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지난 총선 때 많은 부분에서 실망감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문제가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초선 의원들이 이런 변화의 역할을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얼마 전에 약칭 '민초넷(민주통합당 초선의원 네트워크)'이라고 하는 민주당 초선 의원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개혁적인 목소리를 조금씩 내고 있다. 혹시나 이것이 당의 분열로 오인될까 봐 조심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당의 변화 내지 역동성을 고양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주당을 보면 당이 굉장히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폐쇄적인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시민사회와의 교류, 협조, 의견의 조율 등에 대해 훨씬 더 열린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가면서 당을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러한 방향으로 당이 최대한 노력을 해서 당의 지지도 자체를 올려야 대선 후보도 같은 출발선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지난번 당 워크숍에서 사회학자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분의 분석에 의하면 대선후보의 지지도는 당의 지지도 플러스마이너스 10퍼센트 정도라는 것이다. 현재 민주당의 지지도는 새누리당과 5-10퍼센트 포인트 정도 격차가 있는데 이것은 대선후보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수준일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후보를 어떻게 뽑아야 하는 것에만 몰두를 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김용익에게 자유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자유롭다 느꼈을 때가 있다면?
사람에게는 천부의 인권, 천부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성립이 안 되는 말인 것 같다. 자유라는 것은 일정한 조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조건으로 우선 시민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와 같은 정치적인 의미의 조건이 필요하다. 내가 박정희 시대의 전체가 암울했다고 했던 것은 그런 정치적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적인 조건으로 우선 시민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와 같은 정치적인 의미의 조건이 필요하다. 내가 박정희 시대의 전체가 암울했다고 했던 것은 그런 정치적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유롭다는 느낌이 없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로는 내적 조건이 보장돼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인권의 부분이다. 이러한 내적 조건이 갖추어지고 나서야 문학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심리적 자유와 같은 것들이 정말로 가능해 진다.
자유롭다고 느낀 적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솔직히 한 번도 없었다. 늘 사회적 인권에 대한 갈증, 내가 나에게 부여한 책임, 이것들이 만드는 어떤 구속감 같은 것들로 인해 내 스스로가 편안하고 자유로웠던 적은 정말로 없었던 것 같다.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이라는 시의 한 구절 중에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옛날에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부터 늘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었던 적이 있어야 추억이 있지,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던 적이 역사상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자유에 대한 희망, 자유에 대한 강한 갈망은 있었지만 자유에 대한 '추억'은 나에게 없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어쩌면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살아온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시대가 요구하는 의무 혹은 문제의식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 살고 싶은 순간들은 없었나?
부채의식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은 아마 87년 이후였을 것이다. 그 전에는 지역사회의학에 대한 의무를 느꼈고 그래서 예방의학을 하겠다고 한 것이지만 이것이 1987년을 지나면서 조금 더 강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서는 여기에서 벗어날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다. 1987년에 인의협을 시작하고 나서 일종의 엠티를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밤늦도록 토론을 하는데 딱딱한 의자에 궁둥이가 아파서 도저히 오래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불편한가 했는데 1977년에 학교를 졸업해서 거의 10년 동안 안락한 의자에서만 앉아 살아왔던 나의 모습이 돌아다 보였다. 학회를 해도 호텔에서 하고 학내 모임을 해도 편하고 좋은 곳에서만 해 왔으니 그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가 낯설어 진 것이다. 그 이후로 딱딱한 의자에 빨리 다시 익숙해져야지 하면서 의도적으로 노력을 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지금 이 국면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하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될까' 생각하고 나 자신을 그 곳에 배치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 때는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의료보험통합운동에 나를 배치했다. 노무현 정부 때 미래사회위원장이나 사회정책수석에 나를 배치한 것도 마찬가지 의미였다. 권력이 얻으려고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정부에 들어가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위치에 내가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 나를 그리 배치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출세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청와대에서 나오고 나니 운동권에서 알게 모르게 나를 많이 배척했었다.(웃음) 그런데 이번에는 국회의원으로 들어갔으니까 이 임기 마치고 나가면 또 운동권에서 나를 배척할지도 모르겠다.(웃음)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이나 문구 그런 것들이 있다면?
어떤 롤 모델을 두고 저 사람을 닮아가자 하는 생각도 별로 없고, 외우고 다니는 명언도 별로 없다. 간단하면서 외우기 쉬워서 인지 내가 때때로 생각하는 말이 있다.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인데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시경에 나오는 삼백여 편의 시를 다 읽어 보니 한마디로 얘기해서 사특한 생각이 없다'라는 것이다. 원래는 시경의 시들을 평한 말이지만, 나는 어떤 것을 생각할 때에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새기고 다닌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때때로 '이렇게 하면 내게 이익이 되겠는데, 이렇게 하면 공적으로는 좋긴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손해가 오겠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반사적으로 마음속으로 '사무사'를 떠올린다. 국회의원을 할까 안 할까, 청와대에 갈까 안갈까, 이런 식으로 하면 될까 안 될까 하는 것들을 생각할 때 이 사무사를 떠올리면대개는 사적인 판단을 안 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도 하게 되는 일은 내 사적인 이익과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런 것만 남는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나누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지금의 청년들에게 '낭만적으로 살아라, 청춘을 즐겨라, 충분히 놀아라'라는 얘기를 했다간 귀싸대기 맞을 것 같은 시대다.(웃음) 나의 20대를 돌이켜보면 스물일곱에 장가를 갔더니 청춘은 끝났더라.(웃음) 나이를 불문하고 결혼을 하면 청춘은 끝나는 것이다.(웃음)
나는 서울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경희궁 터에 지은 학교라, 운동장이 세 개나 되고 숲도 있고 도서관도 있고 아주 아름답고 좋은 학교였다. 거기 숲속에 있는 도서관에서 웬만한 한국의 중요한 소설은 다 읽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의대 6년 중에 예과 2년은 노는 것으로 의무를 삼았다. '예과 성적은 평생에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본과에 진입만 하면 된다', '본과에 가면 놀 시간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때는 맥줏집도 많이 다녔지만, 독어 강독도 하고 세익스피어도 읽고 이래저래 고전을 많이 읽었다. 독어 강독으로는 카프카를 읽었는데 물론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웃음) 그래도 고전을 읽은 것이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된다.
그런데 요즘 친구들은 고전은 고사하고 책도 잘 안 읽는 것 같다. 나는 우리 청년들이 책을 많이 읽고 고전도 읽고 연애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게 충고하면 무슨 뜬 구름 잡는 소리냐 할 것 같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을 못 만들어주고 그것을 하라고 하니까 말이다. 청와대에서도 있었고 국회의원도 되고 거기에 교수인데다가….(웃음) 여기에 대해서 이중 삼중으로 책임을 느낀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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