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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을 일으킨 유럽 시민들

서명준의 '베를린통신' <10> 유럽헌법 거부사태에 대해

유럽통합의 정치 무대에 시민이 등장했다. 유럽연합(EU) 헌법을 거부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시민들은 유럽통합의 과정이 너무 성급히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EU 헌법이 단순히 열정만으로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는 시민의 목소리가 배제된 라틴 아메리카의 헌법을 ‘무덤’으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EU 헌법은 유럽 시민들이 거부한 유일한 사안이 아니다. 예컨대 지난해 사이프러스의 그리스 시민들은 사이프러스 분쟁에 대한 EU의 합의안을 거부했다. 또 서구 사회의 시민들은 범죄율 증가와 외국 이민자 폭증 그리고 값싼 노동력의 유입 등을 초래한 EU 확대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장기화되고 있는 경제난과 출범 6년 만에 세계시장에서 가장 낮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유로화는 이러한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다. 아울러 유럽의 시민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거부하기도 했다.

따라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EU 헌법안 거부는 유럽 시민들이 EU 헌법을 넘어서 유럽통합에 대해 반대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물음을 던졌다.

지난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 출범 이후 EU는 단일 통화권을 형성했고 최근 공동 방위의 형태로 군사 문제에 관한 합의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는 유럽의 정치엘리트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적 프로젝트의 성패는 언제나 시민에 의해 판가름 난 것이 유럽 사회의 전통이다.

유럽통합 프로젝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시민들의 EU헌법 거부로 인해 잠정 중단된 셈이다. 또 히틀러가 국민투표를 독재에 악용한 역사적 경험에 따라 헌법이 연방차원의 국민투표를 금지하고 있는 독일은 의회가 EU 헌법을 승인했으나 국민투표를 실시했다면 독일 시민들 역시 이를 거부했을 것이란 지적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 이후 더욱 뚜렷이 드러난 점은 유럽 시민들에 대한 정치권의 각성이다. 예컨대 프랑스의 정치권은 동구권 국가와 터키의 EU 가입에 관한 엇갈린 사회적 의견을 조율하고 EU 확대와 국가주권의 축소에 대한 명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독일에서도 EU 확대에 대한 수사학적 홍보만이 있었을 뿐 국민적 논의는 매우 적었다. 따라서 이는 일종의‘유럽통합의 이데올로기’를 시민들에게 강요한 셈이다. 그러므로 EU 헌법 부결은 이러한 정치권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에 대한 유럽 시민의 판결이었다.

무엇보다 지난해 5월 EU는 동구권 10개국을 새로 받아들여 확대의 축포를 쏘았지만 세계 무대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내적인 심화보다 규모의 확대에 치우쳐왔다는 비판이다. EU의 확대가 외적으로 미국의 경쟁심을 자극하고 내적으로 EU 신규 가입국인 동유럽 국가들과의 경쟁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동유럽의 값싼 노동력 유입이 경제난과 출생률 하락으로 고전하는 복지국가의 오랜 질환을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최근 독일산업경제연구소(DIW)의 자료에 따르면 독일인들의 75%는 동유럽 국가로부터의 값싼 노동력 유입이 일자리 상실을 초래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 EU 지도부와 집행위원회가 지배하고 있는 비민주적인 구조에 대한 비판도 있다. 시민과 정치권의 원활한 정치 커뮤니케이션이 사실상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유럽 시민이 EU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만든 까닭이기도 하다. 즉 시민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데 비해 EU의 규모는 지나치게 거대하다는 일종의 권력 불균형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최근 독일 주간지 슈피겔도 ‘관료주의 독재’라는 표지기사에서 유럽경제공동체 성립 이후 지난 50여년간 시민과 더욱 멀어지면서 거대 권력화한 EU를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EU의 위기는 이러한 제도적인 측면을 넘어선 사회ㆍ경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25개 회원국이 모두 높은 실업률과 경제적 난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각국 정부와 의회는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난의 해결을 위한 사회복지 감축 정책은 대중적 인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해 확대한 EU의 인구는 약 20%로 늘어났으나 사회적 총생산량은 5%만 증가했을 뿐이다. 이들 신규 가입국들의 1인당 국민총생산은 기존 15개 회원국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에서 유럽 통합의 거대한 프로젝트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부인하는 유럽인은 이제 없는 것 같다. 따라서 EU 정치권은 통합을 위해 전혀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EU 헌법을 기초한 지스까르 데스탕 전 프랑스 대통령과 룩셈부르크의 융커 총리는 프랑스 국민들이 EU 헌법에 찬성할 때 까지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프랑스의 사회학자 알렝 뚜렝도 “(유럽통합에 대한) Yes와 No는 위와 아래의 충돌”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정치권이 시민적 토대를 상실해왔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ㆍ네덜란드의 헌법 거부 이후 EU의 정치권은 분열의 양상을 보이는 반면, 지난 1989년 동구권의 민주화 이후 꾸준히 구축해온 유럽 시민들의 공동 정서는 변함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난해 3월 마드리드 테러는 스페인을 넘어 전 유럽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또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유럽의 정치권을 분열시켰지만 유럽 시민들이 반(反)부시 정서를 공유하게 만든 계기였다. 나아가 전 유럽 사회에 걸쳐 반미 정서가 형성되었다는 점은 이미 알려진 바다.

이밖에 EU 집행위가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럽 시민들의 절반은 자국이 EU를 탈퇴해도 무방하다는 견해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EU 헌법 거부를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넘어서는 유럽 시민들의 공동 정서로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중대한 역사적 계기에 개입해 온 유럽 시민의 역할이 어쩌면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EU 헌법 거부로 드러난 유럽통합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현대 유럽의 역사에서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시련을 극복한 원동력은 시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30년 전 스페인인들은 프랑코 독재정권을 축출한 바 있다. 또 20년 전 폴란드인들은 옛 스탈린 독재정권에 신음했지만 현재 민주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 도입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지난해 EU의 회원국이 된 옛 소련의 위성국가인 발트3국도 인권과 법치국가 그리고 자유와 책임과 같은 유럽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시민들은 이의 현실태로서 유럽식 사회 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2차 대전 종전 뒤 4억5천만의 유럽인들이 추구해 온 유럽통합의 과정을 ‘유럽의 꿈(European Dream)'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진정한 유럽 통합은 아직 요원하다. ‘위와 아래의 충돌’을 해소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유럽통합의 프로젝트를 지속하기 위해 EU의 정치권이 향후 어떠한 방식으로 등 돌린 유럽 시민들의 동의를 이끌어 낼 것이냐가 관심의 초점이다.

EU 회원국들의 사회 경제적 조건은 동일하지 않다. 그 발전의 속도 역시 다르다. 25개 회원국 모두가 동일한 속력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EU가 연방주의적 정체(政體)의 시민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을 감안하면 EU의 정치권은 통합의 열쇠가 시민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시민을 중심으로 한 유럽통합의 방향을 새로 설정하려면 통찰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정치 엘리트가 요구된다는 점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슈뢰더 독일 총리, 블레어 영국 총리와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에겐 이러한 능력이 결핍되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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