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외국의 경우에는 뮤지션들이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곡을 많이 발표하는데 우리나라는 뮤지션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면 나라도 하겠다'는 저항감과 소명감에 노래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기로 했는데 그렇게 하니 생활이 정말 힘들어졌다".
'물수건', 'KISS' 등 최근의 앨범들은 사랑, 일상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강산에가 변했다는 평가도 있는 데라는 질문에 "돌이켜보면 항상 뭔지 모를 무겁고 거대한 명분과 관념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발은 부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까이 있는 내 옆의 사람들을 보니, 그리고 지나가다 밟는 들꽃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 좋은 것이다. 나도 그런 것들을 눈에 담고 일상의 가벼움, 작은 기쁨들을 느끼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계기가 사회 속에 표류하고 있는 것이 너무 괴로워 훌쩍 떠나버린 사막 위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게 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자유는 무엇인가, 평화란 무엇인가와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고민과 혼란 속에서 어느 날 사막으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라는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질문을 시작으로 '나는 어디서 왔나,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힘들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에 관해 끊임없이 물으며, 나를 누르고 있던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공연이 우리 사회 분노를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 공연의 현장은 때려서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분위기가 폭력적이다. 분노로부터 시작해 사고를 닫아버리고 적을 만드는 행동은 위험하다. 자꾸 우리들의 마음을 분노로 쪼개버리는 일은 아무리 명분이 좋다 하더라도 동조하기 힘든 것 같다. 분노는 보편적으로 저항은 예술적으로 해야 한다"라고 한다.
"2001년도 어느 날에 '라구요'를 부르다가 10분간 노래를 잇지 못하고 운 적이 있다. 라이브로 하다 보면 그때 그 때마다 즉흥적으로 하게 되는데 그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했다. 빨리 노래를 끝내야 하는데 자꾸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눈물이 나서 반주만 계속 이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때 10분 동안 관객도 밴드도 정적 속에 서로의 마음이 공명했었던 것 같다. 그때의 감동이란 정말이지…."
공명을 일으키는 가수, 강산에. 청년 시절, 거친 사회를 향해 거친 비판을 쏟아내던 그가, 사막 한가운데서 거칠 대로 거칠어져 버린 자신의 영혼을 만나고, 끌어안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부드럽지만 그래서 더 강한 울림으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분노의 절정에서 명상하자'는 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또 어떤 공명을 일으켜낼지, 그의 다음 노래가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
악보를 볼 줄 모른다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좋은 곡을 만들어내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다 외우는 것인가?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처한 환경에서 내 스타일, 내 방식대로 해오다 보니 악보를 볼 수 있는 것과 상관없이 음악을 할 수 있었다. 악보를 볼 줄 알면 좋겠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음악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악보는 옛날에 클래식 음악을 할 때 모든 선율을 다 외우지 못하니까 그것을 기호로 표시하면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대중가요는 보통 3분에서 5분 사이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 정도면 악보 없이도 선율을 외울 수 있다. 또 기타 같은 악기로 기억해도 된다.
▲ 가수 강산에 ⓒ프레시안(최형락) |
어떤 리듬을 만들 것인가 고민하면서 그것을 기록하는 방법으로 나만의 기호를 쓰기도 하는데, 이 기호가 바로 선율이 되는 것이다. 일렉트로닉 사운드(디제잉)를 하는 사람들의 악보는 굉장히 재밌다. 그들의 악보는 오직 자기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 유투브에서 일렉트로닉 사운드 악보와 물건을 연관시켜서 만든 한 동영상을 보았는데 '탕 탕 탕 치킷 치킷' 이런 소리라면, '탕 탕 탕'하는 부분에 야구공 세 개가 배치되는 식이었다. 이렇듯 악보란 일종의 그림 같은 개념이 아닌가 싶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서 음악을 하고 싶어도 도전할 생각을 못하는 친구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런 고민을 하는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음악 듣는 것이 좋으면 그냥 들으면 된다. 음악은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은 무엇인가를 듣고 그로부터 받은 느낌이나 떠올린 영감을 악기나 목소리를 통해 구현하고 또다시 그 소리를 듣는다. 귀로 들어간 소리가 입으로 나와서 다시 귀로 가는 것이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음악을 통해 자신이 전하려는 것을 제대로 던질 수 있을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그림이라는 것도 무엇인가를 보고 그로부터 생겨난 감정과 느낌을 그리는 행위로 반복해서 풀어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과 미술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에는 양면성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얼마만큼 '올인 하냐'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고 때로는 의식을 넓혀주는 자극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고 표현한다는 것은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도전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온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은 일부다.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고, 음악에 올인할 수 있으면 된다. 그 외 딱히 어떤 사람이 해야 한다는 기준이나 왕도는 없는 것 같다.
가사들이 다 독특하다. 일상적인 내용, 과거나 내면의 이야기, 사투리, 저항적인 메시지 등을 담는 데는 많은 경험과 여러 가지에 대한 성찰, 관찰력이 필수일 것 같다. 작사할 때 혹은 창작을 위해 생활 속에서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가?
앨범을 낼 때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한 것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가사가 독특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말한다. 내가 그런 가사를 쓸 수 있었던 배경 중 첫 번째로 무식함을 꼽을 수 있다.(웃음) 때로 나의 무식함이 창작에 도움이 될 때가 있는 것 같다.(웃음) 내 안에 틀에 박힌 관념적인 룰이 있었다면 아마 시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고정관념을 별로 갖고 있지 않다 보니 '왜? 하면 안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식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는 범위 내에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내 가사들은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해서 쓴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로 내 느낌을 배치한 것일 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여태껏 나온 앨범들을 모두 모아봤을 때 스토리가 있는 것 같다. '과거–젊은 시절의 고뇌와 삐딱함–성숙–자아 성찰–일상', 이렇게 마치 한 사람의 일대기를 보는 느낌이다. 자신의 앨범을 되돌아보면 느낌이 어떠한가? 앨범과 연관된 에피소드가 있다면?
1집은 가수가 되기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었다. 1집 타이틀 곡인 '라구요'는 엄마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는데 우연히 데뷔앨범이 된 것이다. 운이 좋았다. '나는 가수다'라는 의식을 갖고 앨범을 만든 것은 2집부터이다. 앨범의 시작은 Vol.0부터이다. 1집을 Vol.1이라 하지 않고 Vol.0이라 한 이유는 '왜 항상 시작은 1부터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어서이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란 말도 있지 않나. 나 역시 모든 것을 맨몸으로 시작하기도 했고, 창작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부터 결과물을 만드는 거니까 '그럼 나는 0부터 하련다' 해서 1집을 Vol.0으로 시작했다.(웃음)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내가 삐딱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무의식 속에 튀어 보이고 싶은 본능이 잠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는 이게 도가 지나쳐서 반항적인 모습으로 보인 것 같다.
앨범의 시작을 0부터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점도 있다.(웃음) Vol.3이면 4집, Vol.4면 5집이 되는 건데 사람들은 Vol.1이라고 하면 1집인 줄 안다. Vol.4 즉, 5집을 낼 때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앨범 표지에는 'Vol.4/5zip'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자님한테 그렇게 설명을 해줬건만 잊어버렸는지 기사에는 '4.5집'이라고 나왔다. 마음대로 리메이크 앨범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당시 '.5집(쩜오집)' 우리나라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연예계에서 그걸 보고 기발하다고 생각해서 '.5집'을 내기 시작했다. 인스턴트 빵 찍어내듯 중간 중간 '.집'을 찍어내면 이익이 되니, 기획사들이 얼마나 좋아했겠는가. 그렇게 물의를 일으켰다.(웃음)
가장 애착을 갖는 앨범이나 노래로 '라구요'를 많이 꼽던데?
노래 하나하나가 가진 배경과 그것을 지을 때의 기억이 달라서 맛도 다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장 곤란하다.(웃음) '라구요'라는 곡에 특별함이 있다. 말했듯이 '라구요'는 엄마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만든 곡이지 가수로 데뷔하기 위한 곡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노래가 촌스럽다고 생각해서 부르기를 꺼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시면서 애창곡이 되었다. 이제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맛이 깊어져서 작년의 '라구요'와 지금의 '라구요'의 느낌이 다르다.
2001년도 어느 날에 '라구요'를 부르다가 10분간 노래를 잇지 못하고 운 적이 있다. 라이브로 하다 보면 그때 그 때마다 즉흥적으로 하게 되는데 그 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했다. 빨리 노래를 끝내야 하는데 자꾸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눈물이 나서 반주만 계속 이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때 10분 동안 관객도 밴드도 정적 속에 서로의 마음이 공명했었던 것 같다. 그 때의 감동이란 정말이지….(웃음)
'라구요'의 인기는 어머니 이야기이지만 근현대사가 담긴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가사에서처럼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강산에의 유년시절은 어떠했나?
전쟁이 없었으면 나는 태어나지 못했다. 엄마의 유년시절은 일제강점기였고 스물서너 살에 충청도에서 함경도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함경도 분은 아니고 남쪽 사람이었는데 일 때문에 그곳에 계신 분이었다. 남편을 따라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게 바로 우리 형이다. 1949년에 형이 태어나고 그 이듬해에 전쟁이 일어났다. 연합군이 올라오니 남편은 처자식을 안전하게 피난 보냈다.
ⓒ프레시안(최형락) |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피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진짜 난리이긴 했나 보다. 흥남부두에서 피난 가는 배를 타는데, 일단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타야 하니 마치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거제도까지 오는데 움직일 수가 없어서 화장실도 못 가고 그 자리에서 싸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배를 타지 못해서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하니 정말 생사를 건 피난길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피난 내려와서 거제도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생선을 파시며 하루하루를 사셨다.
이후 내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시게 되었는데, 아버지도 똑같은 처지로 함경도 분이고 처자식도 있었는데 난리 통에 뿔뿔이 흩어져서 홀로 피난을 오신 분이었다. 나이 차이가 스물 몇 살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셨고, 두 분 사이에서 누나와 내가 나왔다. 전쟁이 누나와 나를 만든 것이다. 아버지는 당시 의사셔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쉽게 자립할 수 있었고 돈을 쌓아놓을 정도로 많이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세상 물정에 그리 밝은 편도 약은 성격도 아닌 엄마가 사람들에게 그 돈들을 다 떼이고, 그러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당시 액수로 딸랑 1만8000원 정도를 가지고 부산으로 가신 것이다. 나의 유년 시절은 없는 것에 익숙했다. 그땐 다 그랬고 그렇게 없는 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웃음)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내 노래를 통해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생각은 없었다. '예럴랄라'는 청년 시절에 막걸리 먹고 완행열차 타고 왔다 갔다 할 때의 생활을 노래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 햇살 부서진다, 우와! 새는 날고 기차는 달려간다, 하모니카 불자'와 같은 내용이었다. 2집 앨범 타이틀이 '나는 사춘기'인데 그때부터 국경, 민족, 반전(反戰)과 같은 사회적인 이야기를 했다. 1989년 여행 자율화가 시작되던 해에 어느 정도 서울 생활에 적응하게 되었을 쯤에 일본에 가게 되었다. 우리나라 안에만 있다가 해외에 나가니 정말 별세계였다. 문화적 충격이 엄청 컸다. 그게 나의 삐딱함을 건드렸다. '내 청춘 돌리도'하고 막연히 불특정다수인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감이 생겼다.
외국의 경우에는 뮤지션들이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곡을 많이 발표하는데 우리나라는 뮤지션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면 나라도 하겠다'는 저항감과 소명감에 노래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기로 했는데 그렇게 하니 생활이 정말 힘들어졌다. 성격이 내성적인 것도 있지만 다 같은 가수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마치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나를 발견했다. 나도 어울려 놀고 싶은데 속에서는 욱하는 것도 있고 주변 사람들도 내가 진지하고 듣기에 불편한 말들만 하니 서로 조화되지 못했다.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주로 이태원에서 놀았다. 지금도 여전히 보수적인 사고가 남아 있는데, 그때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해서 긴 머리, 부츠, 팔찌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 특이한 셔츠 등을 걸치고 카페에 앉아 있으면, 다 좋지 않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면 자연스레 나도 '뭘 쳐다봐?'하는 식으로 반항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참는다고 참았지만 그렇게 한 번씩 터져 나올 때가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3집은 더 나아가서 제목이 아예 대놓고 '삐따기'였는데 물 위의 기름 같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앨범이었다. '끼리끼리 모여 있으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도 마음도 모든 것이 삐딱 삐딱 삐딱 삐딱. 삐딱하다고들 하니 차라리 삐딱하고야 말겠어' 하는 식이었다. 어느 날 시청 앞의 태극기가 때가 타서 꼬질꼬질한 모습을 하고 그마저도 약간 삐딱하게 걸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의 삐딱함과 너무나 닮아보여서 동질감을 느꼈다. 시청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태극기에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에 왠지 그 태극기가 '나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만든 '삐따기'지만 너는 우리가 만든 '삐따기'다' 라고 태극기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이 밝혀지는 등 사회의 여러 곪은 것들이 터져 나오는 상황도 풍자하고 싶었다.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어서 삼풍은 바람 풍(風)을 써서 '三風'으로, 태우는 비 우(雨)를 써서 '太雨'로 가사를 지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 노래를 국경일 때만 듣더라.(웃음)
태극기 |
'물수건', 'KISS' 등 최근의 앨범들은 사랑, 일상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강산에가 변했다는 평가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 것이 맞나?
그렇다.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늘 삐딱삐딱하게 다니고 거대한 명분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에 대들었지만, 한편으로 나 자신이 굉장히 외롭고 물 위의 떠 있는 기름의 모습인 것을 보았다. 그러다 보니 진지하게 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살면서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화두를 찾을 때가 있지 않은가. 내게도 그때가 있었다. 레코드 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가 되었을 때 휴가를 내고 해외로 돌아다녔다. 회사와의 약속도 있으니 중간중간 들어와서 '연어' 앨범 내고 리메이크 앨범도 냈지만, 그 후에는 또 밖으로 나갔다.
'연어' 앨범은 IMF가 터졌을 때 나온 것인데 당시는 뉴스를 보지도 않았고 사회적 이슈에 관심도 갖지 않았었다. '나는 누구인가, 자유는 무엇인가, 평화란 무엇인가'와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고민과 혼란 속에서 어느 날 사막으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지?'라는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질문을 시작으로 '나는 어디서 왔나,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힘들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에 관해 끊임없이 물었다.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그동안 나를 누르고 있던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를 누르던 것들이 '뿅!' 하고 날아간 느낌이었다.(웃음) 가벼워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사막, 그 사막 위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있다가 문득 깨어난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해보고 그 답을 스스로 얻어 본 경험, 그 속에서 더할 수 없는 해방의 기쁨을 느껴본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대부분은 오늘을 살아가지만 과거에 매이고, 또 미래에 매여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고뇌에 찬 후배들이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어올 때가 있다. 그러면 '인생? 이거야 이거. This is life'라고 대답한다. 현재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사막에서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라고 물었는데 그때 나왔던 대답이 '네가 원해서 와 있잖아'였다. 내가 원하지 않았으면 그곳에 앉아 있지 않았다. 원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왜 원했을까?'라고 질문했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모든 현상이 발생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고, 내가 태어난 것도 자의든 타의든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누군가 우리에게 삶을 주었다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살아내라고 준 것이고 만약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라면, 그 의지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삶이다. 태어남은 삶을 부여받고 그 삶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것들이 모두 삶이었다. 도망치고, 혼란스러워하고, 울고 웃고, 보고 듣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것 그 모두가 삶이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 한국에 귀국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나와 내 삶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무엇인가 더 하고 싶은 욕망이나 미련이 남은 탓일 거다. 그래서 내 삶이 그저 꿈일지라도 괜찮으니 용기 있게 현재의 삶을 더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 안에는 이별과 고통도 있겠지만 그것도 삶이 아니겠는가.
70∼80년대 학생운동이 많이 일어났던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은 시대의 무거움 때문에 일상의 기쁨을 잘 모르고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랑할 때조차 시대와 동료들에게 죄스럽게 느꼈다고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에게 애잔함을 느낀다. 그런 시대 속에 음악을 했는데 본인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인가?
아마 내가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이다. 내 안의 분노나 혼란 때문에 정신병이 들거나 깡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이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즐거움 등의 모든 것들을 담는 창구이자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내가 정제되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 문화예술은 몸과 마음을 치유해준다는 측면에서 좋은 것이다. 음악이 없었다면 나는 제 명에 못 살았을 수도 있다.(웃음)
한대수, 보노, 트레이시 채프먼, 존 레넌을 좋아한다던데 이들의 공통점은 메시지가 있는 가수들이라는 거다.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 세계와 비슷한가? 지향하는 방향이 있다면?
특별히 정해놓은 것은 없다. 그렇지만 무거운 것은 다 내려놓고 가볍게 가고 싶다. 사람들이 날 보며 '저렇게 가벼워질 수도 있구나'하고 느끼게 하고 싶고, 그 가벼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웃음)
처음부터 사랑이나 일상에 대한 노래를 했으면 모르겠지만, 강산에가 부르는 사랑노래는 처음부터 쭉 사랑 혹은 일상의 이야기만 노래해 왔던 가수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돌이켜보면 항상 뭔지 모를 무겁고 거대한 명분과 관념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발은 부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까이 있는 내 옆의 사람들을 보니, 그리고 지나가다 밟는 들꽃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 좋은 것이다. 나도 그런 것들을 눈에 담고 일상의 가벼움, 작은 기쁨들을 느끼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웃음)
인권 콘서트인 <휴먼>과 <어쿠스틱 레인보우>,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콘서트' 등 음악을 하면서도 꾸준히 사회참여활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의 반 타의 반이다. 사람들의 요구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경우도 있고, 스스로 나설 때도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여린 탓도 있지만, 예전에는 좋은 취지로 하는 일에는 부르면 바로 갔다. 하지만 그런 활동을 숱하게 하면서 가끔 화가 날 때가 있다. 좋은 취지로 하는 일인데 초점을 다들 딴 데로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초점을 딴 데로 맞추고 있다는 말은?
A라는 뜻을 세우기 위해 B라는 일을 한다면, 아이디어와 행동, 노동력 등 모든 것을 B에 맞춰야 한다. 예를 들어 '심장병 어린이 돕기'를 위한 공연이 있으면 그 공연이 잘 치러지는데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는 전시 공간을 잘 마련해줘야 하고 가수에게는 그에 맞는 여건을 준비해줘야 한다. 그래서 공연과 전시가 성공적으로 잘 치러져야 그것을 보러 온 사람들의 마음도 열리게 되는 거다. 관객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그 공연과 전시의 목적과 취지가 전달되지 못한다.
그런데 공연의 목적과 취지에 동감해서 거기에 자원봉사로 참여하는데 그마저도 노래방 기기로 노래하라는 식이면 곤란하다. '만델라 석방'과 '에이즈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국의 공연들을 보면 공연 자체로도 완성도가 매우 높다. 사회적 의미를 담은 공연은 연예인 얼굴 한 번 보러 가는 정도의 만족감이 아닌, 여타 공연과는 다른 문화예술적인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공연과 전시에 오게 되고 그래야 애초에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도 잘 전달할 수 있다. 사회적 취지를 담은 공연에도 '이 공연은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적으로도 수준이 높아'라는 대중의 신용이 쌓여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분노는 보편적으로 저항은 예술적으로'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을 보았다. 본인이 생각하는 저항과 예술의 상관관계와 바람직한 예술의 모습에 대해 듣고 싶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하도 한 말이 많아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웃음) 지금은 돌아가신 내가 아주 좋아했던 일본 아티스트 한 분이 계시다. 다큐멘터리 때문에 일본에 갔을 때 촬영하면서 얘기도 하고 개인적인 친분을 쌓은 분인데 아주 재밌는 분이셨다. 한번은 야외에서 하는 그분의 공연에 초대받아서 갔더니 온갖 히피 같은 일본인들이 다 와있었다. 도대체 다 어디 있다가 나온 건지 모르겠더라.(웃음) 그들이 프리마켓도 열고 공연도 하는 모습을 봤다. 공연 주제가 반전과 평화였는데, 만약 노래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가 "전쟁은 안 됩니다! OK?" 하는 강한 주장이었다면 관객들이 반감이 생겼을 거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이 시간이 좋은 이유는 이게 바로 평화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싸우는 걸까요? 우리의 원하는 가치는 이런 것, 행복, 평화인데 말이에요"라며 공연장의 행복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통해 평화가 참 좋은 것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것을 보면서 많은 참고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 공연의 현장은 때려서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분위기가 폭력적이다. '노무현 대통령 추모공연'에 해마다 참여하는데 기획하는 친구에게 사적으로 화낸 일이 있었다. 물론 그분을 괴롭히고 반대했던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나 이러한 분노를 폭력적으로 증폭시키는 것은 해가 될 때도 있다. 추모공연이면 그에 맞게 추모하고 회상하는 데 주력해야지 왜 자꾸 적개심을 갖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고, 또 그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분노로부터 시작해 사고를 닫아버리고, 적을 만드는 행동은 위험하다. 자꾸 우리들의 마음을 분노로 쪼개버리는 일은 아무리 명분이 좋다 하더라도 동조하기 힘든 것 같다.
변명은 아닌데 사실 학창시절부터 내 마음이 그랬다. 당시 TV로 <F학점의 천재들>,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미국 드라마를 봐서인지 대학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다. 대학에 가면 꼭 서클활동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오고 보니 현실은 너무 달랐고, 그로부터 오는 괴리가 굉장히 컸다. 선배들이 들어와서 비장한 목소리로 서클 소개를 하며 백합, 목련과 같은 이름들을 칠판에 적는데 살벌하게 다가왔다. 아름다운 꽃 이름이지만 투쟁적이라는 느낌이 들다보니 무섭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한 팀이 와서 'GLEE(Glee club, 미국식 '남성 합창단'을 일컫는 말)'라고 칠판에 적으며, 목소리가 조금 다른 누군가가 서클 소개를 했다. 합창단이었는데 '저거다!' 싶어서 들어갔다. 젊었을 때는 투쟁적인 운동 방식에 대해 토론도 많이 하고 싸우기도 했다. 투쟁적인 것이 무서운 것도 있었지만, 잘 모르는 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해서 잘 알았다면 어쩌면 나도 직접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었을 수도 있다.
공연을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풀어내는 것이 보편화되었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공연의 분위기가 선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내가 '분노는 보편적으로 저항은 예술적으로'라고 이야기한 이유는 아마 공연의 분위기가 선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싫다는 것에서 나온 이야기일 거다. 간디 선생님처럼 '비폭력'을 실천하고 싶다는 수준은 아니어도 아마 그것에 근원 했을 것이다. '분노의 절정에서 명상하라'는 말이 있는데, 한 지인께서 부처의 이야기를 내게 전해준 것이다. 처음에는 그 뜻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마음 한편에 이 말이 늘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있었다. 분노라는 감정이 생길 때 호흡 한 번 더 하고 왜 화났는가를 침착하게 잘 관찰하라는 뜻이다. 내가 왜 화를 내는지도 모르고 열 받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분노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살피면 그를 전달하거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지혜가 생길 것이다.
한국 가요계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한국에는 대단한 원석(原石)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갈고 다듬고 잘 가공해내는 환경이 마련돼 있지 못하다. 현재 많은 다이아몬드가 썩고 있다"고 이야기한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홍대 음악인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둘이 연관되어 있는 것인가?
데뷔 때 한 말인데, 당시의 사회적·문화적 환경과 시스템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거다. 어느 나라든 간에 원석들이 있는데 이 원석을 잘 다듬어줄 수 있는 시스템과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야 선진국이다. 때로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열악한 상황이 때로는 위대한 예술가를 낳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영애 씨 같은 사람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 한국 대중음악은 자본에 의해 지원을 받는 K-pop 위주로 움직인다. 자본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다른 한쪽에도 좋은 원석이 많은데 말이다. 그래서 아쉽다.
일본의 어떤 유명한 감정가가 인터뷰에서 자신이 감정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가 어릴 때 그의 아버지는 아버지 본인이 관심 있어 하던 물건들을 '이것 좀 봐라'하며 아들에게 보여주곤 했다고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향으로 그는 진품과 모조품을 가려내는 안목이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보는 만큼, 듣는 만큼 그리고 맛보는 만큼 살게 되는 것이 삶이다. 그런데 막연히 넋 놓고 들려주는 대로 듣고, 보여주는 대로 보고 있으면 그 정도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노래방 사운드에만 익숙해져 버리면 귀 버린다. 맛있는 것도 먹어본 놈이 안다고, 질 좋은 걸 자꾸 들어야 한다. 삶의 질이란 그와 같지 않겠나.
ⓒ프레시안(최형락) |
그 말은 소비자들이 대중음악이나 문화를 소비함에 있어서 조금 더 주체적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거대 자본에 기대어 음악을 찍어내는 생산자도 문제지만 대중음악에 대한 소비자들의 주체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TV에서 들려주는 것만 들어선 안 된다. 찾아 듣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창의적인 인재나 결과물들이 많이 나오려면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즉, 중산층이 많아야 한다. 문화예술인들도 자신의 작품을 봐줄 사람들이 있어야 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구조적으로 상위 계층만 거대 자본을 가지고 문화예술을 향유하게 되면 문화도 당연히 그쪽으로만 쏠리게 된다. 우리 영화시장에서 천만 관객의 시대가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그건 창피한 일이다. 한쪽으로만 사람들이 몰린다는 이야기는 다른 쪽은 그만큼 빈약해진다는 이야기다. 문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때 이러한 쏠림은 좋은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화인들 스스로도 그것이 망하는 지름길이란 것을 몰랐을 것이다. 음악 시장도 다양성이 없으면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 무엇이든지 생각이 한 쪽으로만 쏠리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동시대의 청년들, 특히 문화예술 부분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어 하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연히 미국의 여류 화가인 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 분은 일흔 살이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분이었다.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을 다 성장시킨 후에 자수를 놓으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절염이 왔다. 더 이상 자수를 놓기 힘들어지자 딸은 엄마에게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며 이젤을 갖다 주었다. 그러면서 이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녀의 그림을 보고 사갔다. 그 그림이 뉴욕에서 전시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녀의 그림이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나오는 카드와 연하장에 찍혀 나올 정도까지 되었다. 그때 한 토크쇼에 나온 모지스에게 MC가 "앞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라고 하니,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굉장히 쿨하게 "그냥 그리세요"라고 했다.(웃음) 자기는 그냥 그렸을 뿐이라면서 말이다. MC는 그분의 노하우, 유명한 화가가 되는 왕도를 시청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물어봤겠지만 그분은 그냥 그리라고 말했다.
모든 일에 있어서 'how to'는 자기가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누가 어떻게 살라고 말해줄 수가 없다. 개인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전자도 다르고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르고 거기에 따르는 선택 또한 각각 다르다. 인생은 사막을 걷는 것과 같다. 사막에는 길이 없다. 가보니 진짜 길을 닦아놓지 않았더라.(웃음) 거기서는 내가 가는 길이 곧 길이 되더라. 물만 있으면 되더라.(웃음) 그 물이 예술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인생의 목표일 수도 있다. 나에게 물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 꿈 혹은 그 무언가를 가지고 사막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러면서 나도 누군가에게는 물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웃음)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장지선)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