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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살인', 1975년 4월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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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살인', 1975년 4월의 학살

'인혁당사건' 진실규명, 이제 막 시작됐다

<사법살인, 1975년 4월의 학살>

지난해 12월말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펴낸 최초의 자료집 제목이다.

1973년 10월, 유신체제 아래 최초의 시위가 서울대에서 일어났다. 이듬해 1월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됐다. 4월에 전국의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책동으로 돌리고 그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1975년 4월 9일, 대법원 확정판결 직후 20여시간만에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괴수'라 명명한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인혁당 사건은 그로부터 지금까지 27년간 '한국현대사의 가장 추악한 정치공작사'로 기록돼 왔으나, 이들에게 사형을 집행한 정부는 아직도 이 사건의 조작성을 인정하지 않아왔다.

***27년 5개월만의 복권, 박정희가 사건조작 주범**

2002년 9월 12일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위원장 한상범)가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이었다"며 인혁당 사건이 '사법살임'임을 공식발표했다. 27년 5개월여만의 복권이다.

진상규명위는 이날 정례브리핑을 통해 "중정은 당시 도예종씨 등 23명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구성, 학생들을 배후 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지만 위원회 조사 결과 이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혐의는 모두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조서 위조를 통해 조작됐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특히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조서를 조작하는 과정에 중정이 파견 경찰관을 동원해 구타, 몽둥이 찜질,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자행했다"며 "이같은 고문으로 사형이 집행됐던 하재완씨 등 관련자들이 탈장과 폐농양증 등의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는 또 "재판을 담당한 군사법원 재판부 역시 피고인이 부인한 혐의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하거나 불법적 고문수사에 항의하는 발언을 기록에서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공판조서를 허위 작성했으며, 피고인들의 증인 신청을 단 한차례도 받아주지 않거나 가족도 피고당 단 한명만 방청을 허락하는 등 재판과정을 위법하게 진행했다"고 밝혔다.

인혁당 사건은 당시 중정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수사팀장 윤모씨는 "사건과 관련해 박 대통령의 서명이 담긴 문서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진술했으며 담당 수사관도 "이모 국장이 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하고 결재를 받았다는 진술을 다른 수사관으로부터 들었다"고 진상규명위는 밝혔다. 박 대통령이 인혁당 사건 조작의 주범임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지난 98년 구성된 '인혁당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는 브리핑 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그동안 인혁당 재건위 조작 의혹은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진상규명위 조사를 통해 유신체제하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조직된 사건임이 드러났다"며 "이번에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재심청구를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4월 9일은 사법사상 암흑의 날"**

1974년 4월 3일, 서울대 연대 성대 이대 등 주요 대학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로 전국적 규모의 유신철폐 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이 시민폭동을 유발, 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 변란을 기도했다"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 뒤 학생을 비롯해 각계 민주인사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긴급조치에 의해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을 비롯 인혁당 재건 관련자 21명을 포함, 무려 2백53명이 비상군법회의에 송치됐으며 이철, 김지하 등 14명은 사형, 정문화 등 16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최고 20년에서 최하 5년의 징역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중형이 선고됐다.

당시 중정이 탄압의 빌미로 내세운 것은 "도예종 등 23명이 인혁당 재건위를 결성, 북한의 지령을 받아 당시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이른바 인혁당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23명 중 8명이 군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7명),징역 15~20년(8명)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시간 뒤인 75년 4월 9일 형이 집행됐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사법살인이자, 증거인멸이었다. 또한 인혁당 관계자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장석구씨는 옥사했다.

인혁당 사형집행은 전세계 인권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즉각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국제 앰네스티도 한국관계보고서를 통해 ▲변호인측 증인이 한 사람도 채택되지 않은 점 ▲피고인의 가족 중 한 명만 방청을 허용받는 등 재판이 통제된 점 ▲관계당국이 공식적 재판기록 공개를 완강하게 거부한 점 등을 들어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국내 분위기는 달랐다. 같이 수감생활을 했던 김지하 시인이 인혁당 사건의 조작성을 알리는 '양심선언'을 하는 등 민주인사들은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가 침묵하고 외면했다. 언론도 침묵했다.

이 기간중 죽은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홀로 동분서주한 유가족들은 중정 등으로부터 고문과 성폭행 위협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을 당해야 했다. 고인의 자녀들은 '빨갱이 자식'이라 따돌림 당했다.

***'역사의 이름'으로**

이런 가운데 정권교체가 이뤄진 지난 98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99년에는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각계인사 1천인 선언 성명이 있었다.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진상규명위가 지난해 3월 인혁당 사건과 관련, 감옥에서 사망한 장석구씨 사건을 직권조사 하기로 결정하면서 하나씩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특히 국방부가 그동안 관련자료가 없다며 '발뺌'해왔던 군사법원 공판기록을 진상규명위가 올해초 입수하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은 점차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후 당시 수사를 맡았던 중정 관계자와 파견 경찰관 등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증거조작, 고문 등 중정의 개입증거도 속속 드러났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진상규명위는 마침내 12일 각종 의혹들을 국가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확인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로써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법살인된 8명의 고인들은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인혁당 사건의 진실규명은 이제부터라는 게 유가족 및 관련인사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우선 당시 정치공작에 누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는가가 '역사의 이름'으로 상세히 밝혀져야 한다.

당시 최고통수권자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관여했다는 증거가 이번 진상규명위 조사결과 밝혀졌다. 박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 그의 유족들은 마땅히 선친을 대신해 유가족과 국민앞에 사과해야 한다.

아울러 당시 사형판결을 주도한 군사법원 및 대법원 관련자들도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 규명을 외면한 언론이 통절한 자성을 해야 한다. 그들의 입이 닫혀 있었기에 이같은 통치권력의 사법살인이 가능했고, 그로부터 27년간 진실왜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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