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4일 나는 이러한 자리에 있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등 4개 복지시민단체가 우리도 더 낼 테니 대기업, 상위계층도 누진적으로 세금을 책임지라며 나선 '사회복지세 도입을 위한 시민 서명전 선포식' 자리였다. 여기서 나는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사회복지세를 도입하자는 '역사적인' 발언까지 했다. 나는 왜 그 자리에 섰을까? 무슨 말을 했을까?
사회복지세 선포식에서 "무슨 말씀 하실 거예요?"
선포식 며칠 전 발언 요청을 받았다. 사회복지학과 학생과 청년을 대표해서 사회복지세 지지 발언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연구모임에서 공부해 오던 터라 사회복지세 취지에는 공감하고 있었다. '복지에만 쓰는 세금, 사회복지세' 표어도 맘에 들었다.
하지만 막상 발언 요청을 받으니 당황스러웠다. '잘 모르지만….' 단서를 달고 승낙은 했지만, 전화를 끊고 난 이후부터 어깨가 무겁고 떨려 왔다. 정말 '잘 모르지만….'이라고 했던 말이 진심이었다. 내가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어떻게 사회복지세를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발언 약속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발언을 요청했던 선배가 발언을 부담스러워 하던 나를 선언문을 낭독으로 역할을 바꿔주었다.
선포식 하루 전날, 어떻게 알았는지 일간지 신문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일 선포식 기자회견에서 발언하실 예정이죠?", "무슨 말씀 하실 거예요? 사전 취재하려고요." 하루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덜컥 질문을 받으니 또 말문이 막혔다.
"저 발언이 아니라 선언문 낭독이에요." 이렇게 빠져나가려 했지만 기자는 끈질기게 질문했다. 결국 무언가 횡설수설 말을 했다. 그런데 기자의 마지막 말이 머리에 선명히 들어왔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네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말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무엇을 말했을까? 기자는 무엇이 그리 신선했을까? 전화를 끊으면서도 그분은 나를 격려까지 했다. "내일 지금 내게 한 말, 꼭 발언하세요."
곰곰이 내 말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왜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에 참여하고 있으며, 왜 사회복지세 서명전에 나가려 하는가? 갑자기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에 선포식 준비 책임 선배에게 전화 걸어 직접 발언을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기자와 한 통화에서 전화로도 다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기자가 선포식에 온다고 생각하고 발언을 준비했다. 내 이야기를 그분이 듣길 기대하며…. 비록 선포식에 오지는 않았지만, 그 기자에게 나의 정리된 답변을 전해주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회복지세가 왜 필요하냐고요? 내 돈 아끼려고요!
나는 기자에게 두 가지 질문을 받았다. "왜 사회복지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첫 번째 질문부터 나는 당황했다. 너무 당연하다 생각해서 사실 제대로 고민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며 얼버무렸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았다. '사회복지세는 왜 필요할까?' 우리의 목적인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면 복지국가는 왜 필요할까. 사회복지를 전공하며 학교에서 많이 배웠다. '사회복지를 통해 시장 실패에 대응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실현하고,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건전한 성장이 가능하게 하는 등 사회적 위험의 해결 수단으로, 사회적 권리의 실현 수단으로….'
사회복지학도로서 필자는 이 '정답'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권리를 위해 '세금'이라는 의무를 져야 하는 대한민국의 납세자로서 필자도 이 '정답'을 이해하고 있을까? 일반 시민과 함께 '아래로부터' 복지국가 운동을 하자면서 이렇게 학문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다면 누가 우리와 함께 할까?
학교에서 복지국가의 필요성에 대해 학문적으로 배웠다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활동에 참여하면서 시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설득력이 있어야 비로소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는 점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왜 '복지국가냐고요?' 난 이렇게 대답하련다. "내 돈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죠." 내가 지금 아이를 낳아 보육시설에 맡긴다면 평균적으로 26만 원의 비용을 지출하게 된다. 그런데 무상 보육이 되고 나니 보육비 지출이 대폭 절감된다. 26만 원을 아꼈다. 내가 급식비를 5만 원 정도 내고 학교에 다녔는데, 이젠 무상 급식도 해준다고 한다. 5만 원을 아꼈다. 벌써 31만 원을 아꼈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각자가 형편껏 세금을 내야 하지 않는가?
정부는 못 믿지만, 국공립 어린이집은 믿는다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지금 사회복지세가 도입되지 않았어도 무상 급식, 무상 보육이 이루어졌다. 왜 굳이 세금을 더 내자 하는가?
난 지금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앞으로 가야 한다. 26만 원 보육료 지원받고 내 아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까? 지금 사실 무상 보육이 완성된 것도 아니다. 지금 어린이집에서는 지원받은 보육료 26만 원과 별도로 부모들이 차량비, 특별활동비, 행사비, 현장학습비 등을 부모가 직접 부담하고 있다. 게다가 민간 보육서비스의 질은 어떤가? 왜 평균 78명의 어린이가 국공립 보육시설에 다니려고 줄을 서고 있는가? 왜 여성은 보육시설에 내 아이를 믿고 맡기지 못해 지원받은 보육료로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경력 단절을 감수하고 있는가?
▲ 어린이집 ⓒ연합뉴스 |
무상 보육이 도입되었다고 하지만 서비스의 질도 보장 못 하면서 무슨 복지국가인가? 해법은 간단하다. 엄마들이 신뢰하는 국공립 보육시설을 늘리면 된다. 왜 못하는가? 보육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공립 보육시설을 확충할 만큼의 돈은 없으니 보육료 지원에서 멈추고 있다. 그래서 사회복지세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국공립 보육시설에 줄을 선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겠나? 민간 어린이집에 맡길 바에야 내 아이 내가 돌보겠다며 직장을 포기한 당신의 미래는 누가 보장해주는가? 난 감히 제안하고 싶다. 세금 더 내겠다. 더 낼 테니 보육료 지원에서 멈추지 말고 공공 보육시설 확충해 달라.
보통 정부를 믿지 못해 세금을 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정부에 대한 불신이 조세 저항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정부가 내 세금을 어디에 쓸지에 대한 우려, 내 세금으로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불신이다. 그런데 국공립 어린이집에 줄을 선 78명의 어린이는 복지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변화를 말해 주고 있다. 재정이 제대로 뒷받침만 해 준다면 질 좋은 복지 서비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사회복지세가 필요하다. 사회복지세는 '복지에만 쓰는 세금'이다. 정부가 다른 곳에 쓰지 못하도록 사용처가 복지로 정해진 세금을 도입한다면, 충분히 엄마들의, 시민들의 동의를 이끌 수 있다고 기대한다.
용돈을 드려야 효녀인가요?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가 제안하는 사회복지세가 도입되면 개인, 기업이 모두 지금 내는 세금에서 5분의 1을 더 내 연 20조 원이 마련된다. 월 300만 원의 소득자라면 지금 월 3만 원의 소득세를 내니 이것의 5분의 1인 6000원을 사회복지세로 낸다. 소득세가 누진도를 지닌 까닭에 월 2000만 원 고소득자는 지금 월 500만 원 소득세를 내니 사회복지세로 월 100만 원을 더 책임진다. 이 정도면 형평성 있는 세금 아닌가? 중간계층 이상자부터는 모두 증세에 참여하고, 자신의 소득능력에 따라 더 세금을 납부하니 말이다.
세금을 더 내면 내 아이를 믿고 맡기고, 여성은 보육에 대한 부담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대학생은 등록금 부담 없이 공부할 수 있다. 공공 임대주택도 더 많이 지으니 전셋값 부담도 덜 수 있으며, 기초연금까지 준다니 부모님께 용돈 드릴 부담도 덜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누군가는 부모님에게 용돈 안 드리는 것을 좋아한다며 불효녀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는 것이 효도의 척도가 되었을까? 기초연금으로 국가가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준다면 용돈을 드리는 것 외에도 효도할 방법은 많을 텐데 말이다.
기자와 한 통화에서 "왜 사회복지세가 필요합니까?"라는 질문에 당황하며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당연하죠."라고 했을 때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이다. 사회복지라는 단어에 흔히 떠올리는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한 복지에 머물지 말자. 이분들과 나 자신을 포함해 모두가 큰 걱정 없이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세금이 바로 사회복지세다.
▲ 지난해 6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노동·농민·여성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노인 빈곤 해소와 기초노령연금 인상을 위한 운동본부(준)'를 발족하고 기초노령연금 인상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
불편한 질문, "증세할 용의가 있습니까?"
당신도 증세할 용의가 있습니까?" 기자에게 받은 두 번째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이 조금 불편하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증세가 아니다. 증세를 통한 복지국가의 건설이다. 복지국가가 목적이라면 증세는 그것으로 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선 목적은 사라지고 수단만 남아 있다. 게다가 그 수단이 나에게 돈을 더 내라는 것이라면 선뜻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도 증세할 용의가 있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무상 보육, 무상 급식, 기초연금 등 사회복지서비스를 더 받을 수 있다면 증세할 용의가 있습니까?"로 바뀌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면 부디 우리의 목적이 세금이 아니라 복지국가란 걸 잊지 않길 바란다.
비현실적이라고? '아래로부터' 열정이 세상을 바꾼다.
내가 아무리 사회복지세의 필요성을 설명해도 나와 함께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친구들조차도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알아, 네 말 맞아, 그런데 조세 저항은? 아직 우리나라에선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야." 조세 저항?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증세가 아니라 증세를 통한 복지국가이다. 이러한 뜻을 더 널리 알리고, 예산 지출에 대한 불신을 우회하는 복지 목적세로 경로를 제시한다면, 지금 확산하는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 정도면 조세저항을 이겨낼 수 있다고 기대한다.
비현실적? 조금 진부한 반론이긴 하지만 언제는 여성의 참정권이 현실이었나. 수십 년 전에 누군가가 피 터지게 싸워서 얻어낸 지금의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 힘을 쏟아 싸워서 우리의 미래세대에게, 조금 더 욕심내서 우리 자신에게 복지국가라는 현실을 선물할 수 있다면, 사회복지학도인 나는 이 길을 결코 피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호소한다. 월 6000원을 더 내어서 무상 보육, 무상 급식에 이어 반값 등록금, 공공 임대주택 확대, 기초연금 확대 등이 가능하도록 우리부터 움직여야 한다. 나 역시 더 열심히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여러 동료 선배들과 함께 아래로부터의 복지국가 운동에 나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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