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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안에 사건 30개 처리?…피곤한 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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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3시간 안에 사건 30개 처리?…피곤한 판사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판사님도 복지국가가 필요해요

"자, 다음 사건은 289호입니다. 피고인 이철수." 김 판사가 법정에서 25번째 피고인을 호명한다. "이철수 씨?" 대답이 없다. 법정 방청석을 가득 메운 불구속 피고인들과 가족들, 피해자들이 웅성댄다. 이철수 피고인은 또 맘대로 안 나온 모양이다. 김 판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 기일 더 불러봅시다" 하며 다음 기일을 지정한다. 원래는 형사 재판에 무단으로 불응하면 구속 영장을 발부해야 하지만 한 번 더 출석할 기회를 주기로 한다. 게다가 의도치 않게 시간이 아껴지기도 한 셈이다.

사건 1건당 주어진 시간 6분

오늘 오전에 처리해야 할 사건만 30건. 정해진 시간은 10시부터 12시까지 두 시간이지만 일부러 9시부터 시작했는데도 아직 5건이나 남았다. 원래대로라면 180분 안에 30건이니 1명의 피고인당 6분 이상의 시간을 써선 안 된다. 이미 12시는 다 되어 가고 이러다가는 점심밥도 제대로 못 먹을 판이다. 판사가 진행을 늦게 하면 법정에서 사건 진행을 기록하는 법원 참여관, 실무관, 경위까지 점심시간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공판 담당 검사에 피고인에 관련 변호인들까지 모두 판사가 빨리 진행해 주기를 기다려야 하다니. 하루에도 20, 30건을 처리해야 하는 법원 시스템 때문이다. 피고인이 5명이나 남아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고, 그 담당 변호인들은 '나를 30분이나 기다리게 하다니, 쯧쯧'하는 표정으로 못마땅하게 앉아있다.

ⓒ연합뉴스

피고인 진술 더 들을 수 없는 판사

이윽고 마지막인 30번째 피고인이 걸어 나왔다. 무리한 계 운영을 하면서 여러 명이 곗돈을 받았다가 못 갚아 고소된 계주 사기 사건이다. 그녀가 걸어나오자 법정 방청석에 앉은 피해자들이 "저 여자가 내 돈 사기 친 여자예요. 저 나쁜…." 삿대질이며 연신 욕설을 해댄다. 경위가 겨우 진정시킨다. 김 판사는 피곤하다. 맞은 편 검사도 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변호인 없이 걸어 나온 그녀에게 이름, 주민 번호, 주소, 본적을 묻는 구두 절차를 진행한 후, "공소장 받아 봤지요, 인정합니까?" 기계적으로 묻는다.

피고인은 "제가 곗돈을 받아서 못 준건 맞는데요…. 그거는…. 제가 잘못한 게 아니고 영희 엄마가 처음에 1번으로 곗돈만 타 먹고 도망가는 바람에요…. 제가 잡으러 다니기까지 했는데요, 제가 남편이 알면 이혼이거든요…. 제가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닌데요…. 그렇다고 사기라니요." 웅얼웅얼 변명을 하다가 결국에는 울음이다. 김 판사는 다시 시계를 본다. 벌써 12시 5분이다.

"아, 그래서 자백한다는 겁니까? 아니면 무죄 주장을 한다는 겁니까?!" 김 판사는 더는 기다려줄 수가 없어 말을 자른다. "이 사건은 다음에 진행하고 국선변호인 선임합시다!" 김 판사는 겨우 밥을 먹으러 갈 수 있게 되었다. 오후에는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증인신문사건만 4건이다. 오후에 증인의 말을 잘 들으려면 점심이라도 든든히 먹어둬야 한다. 아, 판결문도 써야 하는데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이 제출한 장황한 증거들을 꼼꼼히 다 볼 수는 있을까. 오늘도 야근이다.

1년에 1015개 사건 담당한 판사

위의 상황은 변호인인 필자가 가상으로 써 본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 우리 형사법정에서 수십 건의 형사 재판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실제다. 2012년 법무부 자료에 의하면 대법원을 제외한 전국 70개 법원의 최근 3년간 법관 1인당 1년간 재판 처리건수는 671건이라고 한다.

통상 재판을 매일 하는 경우는 드물고 일주일에 2일은 법정에서 재판하고 나머지 3일은 판사실에서 기록을 검토하고, 판결문을 쓰는 식으로 한 법정을 여러 판사가 나눠 사용하므로, 일주일에 2일 재판을 하는 경우라면 하루에 평균 6건을 최종처리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판은 1회 공판으로 끝나지 않고 2회, 3회 이어지기 때문에 한 사건당 3, 4번만 재판을 잡아도 하루에 열어야 하는 재판이 18건, 24건으로 늘어난다. 결국 하루에 만나는 피고인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는 것이다.

가장 처리건수가 많았던 수원지법 안산지원의 판사들은 1인당 연간 1,015건의 재판을 수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하루에 몇 명의 피고인을 만났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시간에 구속당한 '공판 중심주의'

판사가 오전에만 20명이 넘는 피고인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피고인의 말을 자르지 않고 다 듣기란 애초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 형사소송법 제275조의3은 "공판정에서의 변론은 구두로 하여야 한다"라고 하여 구두변론주의를 규정하고, 제286조는 피고인 및 변호인은 이익이 되는 사실 등을 진술할 수 있다고 하고 있으며, 헌법 제27조는 형사피해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당해 사건의 재판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다고 하여 각 형사재판 관련자들의 진술권을 보장하고 있다.

또 공판 중심주의라는 형사재판의 중요한 원칙이 있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의 공소 사실에 대한 유·무죄 판단은 재판일에 재판과정에서 형성된 판사의 심증에 따라서만 이루어져야 하고, 되도록 서면보다는 직접 경험한 자를 조사하여 심증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법관이 하루에 수십 명의 피고인을 만나야 한다면 공판 중심주의가 충실히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사자들의 진술권도 충분히 보장되기 어렵다. 판사들의 업무 과중은 신속·적정한 재판 구현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공판 중심주의가 충실히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더 큰 문제는 형사재판 결과에 대한 피고인들의 억울함이다. 형사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충분히 진술하고 판사에게 자신의 말을 다 전달했다고 느껴야 억울한 재판을 당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재판 결과에 순응한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는 것이다. 범죄에 이르기까지는 누구나 백 마디 말로도 다 못할 사정이 있다.

우리 정서상 적어도 내가 할 말은 다 해야 벌을 받더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판사가 나의 범행 동기를 몰라주어서 억울한 재판을 당했다고 생각해서 사법피해자가 된 것으로 느끼기 십상이다. 그래서 일부 피고인들은 브로커의 헛된 말만 믿고 법조 인맥을 찾아 판사의 사법연수원 친구의 딸의 친구와 같은 사법연수원 반이었다는, 결국 아무 관련도 없는 변호사를 찾아가 비싼 선임료를 지불한다. 이렇게라도 해서 판사에게 자신의 말을 좀 더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판사에게도 복지가 필요

판사가 법정에서 너무 많은 피고인을 짧은 시간에 만나야만 하는 지금의 문제를 개선하려면 우선 판사 숫자를 늘려야 한다. 우리나라 판사의 인구당 비율은 외국에 비해 적다. 장기적으로는 법정의 수도 늘려야 한다. 판사와 법정 숫자를 늘려야 한 판사가 처리하는 재판건수를 줄일 수 있다. 판사도 공무원이므로 결국 정부 예산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

2010년 지방의 부장판사가 집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 그는 우울증을 앓았으며 평소 "판사는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와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판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 설문 결과 다름 아닌 직장(30.5%), 즉 판사라는 직업 자체라는 답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판사에게도 복지가 필요하다. 판사를 위해서도 필요하고, 재판받는 피고인의 충분한 재판을 받을 권리, 올바른 결과를 바라는 피해자들의 권리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복지국가의 형사재판은 어떤 모습일까? 사법 시스템에 좀 더 많은 정부 예산이 배정된다. 법정에서 피고인이 충분한 진술시간을 가지며, 판사는 피고인의 살아온 과정과 범행에 이른 과정을 살펴서 무엇이 피고인을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할 것인가를 긴 시간 고민한다. 김 판사에게도 복지국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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