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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부인, 유서 남기고 투신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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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부인, 유서 남기고 투신 자살

12·12 사태 저항…네 식구 비극적 생 마감

1979년 12·12 군사반란 사건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신군부에 맞섰던 고(故) 장태완 전 사령관의 부인 이 모(77) 씨가 자신의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이 씨가 자신이 거주하는 강남구 대치동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17일 오전 9시께 피를 흘리며 숨져 있었고, 이 씨의 집 안방에서 그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씨가 딸에게 썼던 것으로 보이는 유서에는 "미안하고 고마웠다. 오래오래 살아라"는 내용이 담겨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2010년 7월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지내던 이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망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이 씨는 평소 우울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 씨의 남편인 고 장태완 전 사령관은 12· 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에 저항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장교 450여 명 가운데 자리를 지킨 사람은 60여 명에 그쳤다고 한다. 나머지 장교들은 대부분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밀명에 따라 반란군에 가담하거나 자리를 비웠다. 부하 장교들의 배반으로 고 장태완 전 사령관은 반란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그는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두 달간 문초를 당했고, 이등병으로 강등돼 강제예편 된 후 2년간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2· 12 군사반란 사건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등을 불법적으로 구속한 사건이다.

이후 장 전 사령관은 1993년 '12·12 쿠데타 진상조사위'에서 공개 증언에 나서기도 했다. 2000년 3월 그는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16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2002년 16대 대선 당시에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 특별보좌관을 역임했다. 그는 2010년 7월 폐암으로 숨을 거뒀다.

한편, 신군부에 의한 12·12 군사반란 사건으로 장 전 사령관 일가족은 비극을 겼었다. TV에서 보안사에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본 장 전 사령관의 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매일 술만 마시다 1980년 4월 숨을 거뒀다.

장 전 사령관과 부인 이 씨는 슬하에 1녀1남을 뒀지만, 아들 역시 1982년 낙동강변 야산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갑자기 행방불명된 지 한 달만이었다. 당시 아들은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비운에 괴로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경찰은 아들의 사망을 자살로 단정했지만, 이에 대해선 아직도 논란이 있다.

이번에 부인까지 불행한 죽음을 맞음으로써 장 전 사령관의 가족은 딸 혼자만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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