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집 걸러 한집에 암환자, '약값 괴담' 진실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집 걸러 한집에 암환자, '약값 괴담' 진실은…

[기자의 눈] 한미FTA와 의약품 특허

"아내가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글리벡이라는 특허약이 필요했어요. 한 정에 2만3000원짜리 글리벡을 하루에 4~8정 먹어야 해요. 한 달 약값이 300~600만 원. 일 년에는 3600~7200만 원이 들었죠."

한 집 걸러 한 집에 암 환자가 있는 시대, 백혈병(혈액암) 환자가 있는 가족의 넋두리다. 그의 말처럼 특허약은 비싸다. 글리벡 한 정당 원가는 760원. 그런데 판매가는 원가의 30배가 넘는다. 왜 이렇게 비쌀까. 사람들은 막연히 추측한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특허약을 비싸게 파는 만큼 아마도 약효가 혁신적으로 좋거나 연구개발비로 투자한 돈이 그만큼 많이 들었으리라고.

"밀가루보다 약효가 나으면 신약"

<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의 저자 마르시아 안젤에 따르면, 신약이라고 해서 무조건 기존 약보다 혁신적이지는 않다. 기존 약의 분자구조만 살짝 바꾸거나, 기존 약의 적응증(약에 대한 치료 효과가 기대되는 병이나 증상)만 바꿔 똑같은 약을 '신약'인 것처럼 꾸며 등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청년의사
일례로 미국의 제약회사 일라이 릴리의 프로작이라는 항우울제는 1987년 최초로 미국 FDA의 승인을 받았다. 2001년 프로작의 특허가 끝나자 일라이 릴리는 똑같은 약을 '프로작 사라펨'으로 이름을 바꾼 뒤 '월경 전 불쾌 장애'라는 적응증으로 FDA의 승인을 받는다. 알약 색깔만 바꾼 프로작 사라펨은 기존의 프로작과 성분이 똑같지만 제네릭(복제약)보다 3.5배 비싸다.

'신약 같지 않은 신약'의 비밀은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의 특허 허가 요건에 있다. 신약은 기존 약이 아니라 위약보다 뛰어나기만 하면 된다. 특정 약이 밀가루나 설탕보다 약효가 낫다는 것을 입증하기란 쉽다. (☞관련 기사 : 보건의료단체들이 인도대사관 앞에서 시위한 이유) 그러나 '특허약'이 기존 약보다 낫다는 비교연구는 거의 되지 않는다.

"연구와 특허는 대학이, 독점판매권은 거대 제약사가"

제약사가 연구비를 들여 신약을 직접 개발하는 경우도 드물다. 대개 혁신적인 약은 정부기관이나 대학이 수십 년간 연구·개발하면 제약사는 실용단계 마지막에 임상시험비만 대주거나, 실용화 직전에 독점 판매권만 사오는 방식으로 세상에 유통된다.

미국 시민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65년부터 1992년까지 승인된 가장 혁신적인 약 21종 가운데 15종은 공적인 연구로 개발됐다. <보스턴 글로브>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가장 많이 팔린 약 50종 가운데 45종이 정부 자금으로 개발됐다고 고발한다.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도 듀크 대학에서 처음 발견했고, 지방의 한 생명공학 회사에서 개발했다. 약이 다 개발되기까지 손 놓고 기다린 스위스의 다국적 제약사 로슈는 푸제온이 만들어진 후에야 독점 판매권을 사들였고, 2003년 FDA의 승인을 받아 기존 에이즈 치료제의 세 배인 연간 2만 달러라는 가격을 매겼다. 환자들 사이에서는 로슈가 약을 개발하는 데 기여한 공에 비해 판매가가 지나치게 비싸다는 비판이 빗발쳤다.

로슈는 푸제온에 대해 지나치게 비싼 약값을 요구해 한국 에이즈 감염인들의 원성을 산 바 있다. 로슈는 정부가 책정한 약값이 너무 싸다며 한국에 푸제온 공급을 3년간 거부했다. 대신 로슈는 일 년에 3200만 원이라는 가격을 요구했다. 한국도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약값'을 낼 정도의 경제력이 된다는 것이 근거였다. 푸제온은 아직도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지 않고 있다. (☞관련 기사 : "왜 에이즈 환자들이 신약 '무상공급'을 반대하냐고?")

로슈를 비롯한 제약업계는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자사가 연구 개발비를 얼마나 썼는지 공개하지 않는다. 간접적인 자료는 있다. 2002년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안에 드는 10개 제약회사가 쓴 연구개발비는 전체 매출 2170억 달러의 14%에 불과했다. 반면에 마케팅 및 관리비는 31%를 썼다. 광고비나 의사 등에게 건네는 관리비를 조금만 줄여도 가격을 혁신적으로 낮출 수 있는 셈이다.

▲ 지난 2008년 삼성동 한국 로슈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에이즈(AIDS)치료제인 '푸제온' 공급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모습. 글로벌 제약회사인 '로슈'는 이전 에이즈 약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들의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 '푸제온'을 가격 협상 실패 등의 이유로 공급하기를 거부했었다. ⓒ연합뉴스

"분자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특허권을 가진 제약사의 '독점 판매 꼼수'는 제네릭 회사와의 담합을 통해서도 이뤄진다. 국내 최대 제약회사 중 하나인 동아제약도 지난 10월 제네릭을 출시하지 않는 대가로 다국적 제약회사인 GSK와 담합한 것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됐다. 이에 공정위는 GSK와 동아제약에 과징금 52억 원을 처분했다.

GSK는 항구토제인 조프란으로 국내 항구토제 시장을 1991년부터 100%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아제약이 1998년부터 국내에 또 다른 항구토제인 온다론을 출시하면서 분쟁이 생겼다. GSK는 동아제약에 특허 침해 소송을 걸었다. 그리고는 동아제약이 온다론을 철수하고 앞으로 항구토제 시장에서 GSK와 경쟁하지 않는 대신, 자사의 신약 판매권을 비롯한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다가 적발됐다.

이러한 불법보다 더 큰 문제는 '합법적인' 특허 연장 꼼수다. 특허가 만료될 때쯤 제약사는 똑같은 약을 살짝 바꿔 특허를 연장해 제네릭 회사의 정당한 경쟁을 막는다. 제약업계의 증언을 들어보자. 2002년 피터 제닝스의 <ABC 스페셜>에서 미국 카이저 퍼머난테 메디컬 그룹의 샤론 레빈 부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특허 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에 약의 구조에서 분자 딱 하나만 바꾸면 특허를 20년 연장할 수 있는데, 왜 새로운 약물을 찾는 불확실한 노력에 돈을 쏟아 붓는단 말입니까?"

'똑같은 약'으로 특허 20년 연장, 정당한가?

다국적 제약회사는 강변한다. 의약계의 '혁신'을 위해서는 독점판매권을 늘려야 한다고. 그러나 가짜 약보다 낫기만 하면 독점판매권을 얻을 수 있는 느슨한 특허 조건과 분자 하나만 바꾼 약의 특허를 20년 이상 연장하는 행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이는 동안 소비자들이 물어야 하는 약값은 커졌다. 2002년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에서 10대 제약사 순이익 실적은 나머지 490개 기업보다 높았다. 다국적 제약사가 돈 벌기는 땅 짚고 헤엄치기다. 특허권을 확대하려는 정부의 비호만 있으면 된다. 미국 제약사가 신약 개발보다 정치권 로비에 공들이는 이유다.

방법은 있다. 특허 취지에 맞게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의약품 관련 특허법을 바꾸면 된다. 기존 약보다 약효가 뛰어나다는 의학적 근거를 철저히 입증한 약에 대해서만 특허를 인정하는 것이다. 혹은 공익을 위해 의약품 공급을 '강제실시'할 수 있다는 사문화된 조항을 살리거나. 하지만 미국 정부나 국회의원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 2001년 노바티스 한국 지사 앞에서 열린 글리벡 약값 인하 시위. 사진의 환자는 실제 백혈병 환자들이었고 이 중에는 고인이 된 이도 있다. ⓒ보건의료단체연합

FTA 이후 약값 부담 상승, 과연 괴담일까?

정부는 한국에서 FTA가 발효해도 약값이 그다지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부 말처럼 심각하게 나빠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 이미 지금도 정부는 다국적 제약사가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약값을 그대로 들어주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미 FTA가 발효되면 미국의 의약품 특허는 한국에서도 자동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게다가 FTA 협정문 제5장 '의약품 및 의료기기'에 따르면 약값은 "경쟁적 시장도출 가격"으로 책정된다. 보건의료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약값과 동등한 가격을 매기겠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FTA 이후 약값이 오를 수 있는 근거다.

정부 스스로 이를 시인한 자료도 있다. 기획재정부가 10개 연구원과 공동 분석해 지난해 발표한 '한-EU FTA의 경제적 효과 분석' 보고서를 보면, 한EU FTA 발효 이후 의약품과 의료기기 수입이 급증해 두 분야에서만 앞으로 5년간 5200만 달러의 추가 적자가 생긴다. 국책기관인 보건산업진흥원은 한미 FTA 체결로 국내 의약품 매출이 연평균 686~1197억 원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 때문일까. 미국의 '다국적제약회사협회'는 한미 FTA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지금도 우리 정부는 다국적 제약사 앞에 무력하지만, 정부가 그린 장밋빛 미래에 환자의 건강은 뒷전이 될지도 모른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