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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한번 보여주는 게 우리에겐 힘이죠"

[기고] 기륭 비정규직 싸움은 진행형

"기륭, 또 싸워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는 농성장에 간다 했더니, 어느 출판사 편집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습니다. 아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외줄을 탔던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의 백일 가까운 단식이 끝나자 '기륭'은 스멀스멀 사람의 기억에서 지워졌을 겁니다.

오늘(9월 8일)이 1842일째입니다. 지난 8월 24일은 불법파견에 맞서 기륭전자 노동자가 농성을 시작한 지 만 5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동안 숱한 것이 바뀌었습니다. 회사의 대표가 바뀌었습니다. 가산동 공장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공장 터가 팔렸습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정말 바뀌었을까요? 새삼 2005년도의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한 라인에서 일하면서도 서로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회사, 동료와 이야기를 했다고 해고당하는 회사, 이런 기억 말고요. 법이요, 법. 당시 기륭전자에서 생산직으로 일한 노동자의 96% 이상이 비정규직이었고, 이 가운데에서 법을 어기고 파견업체를 통해 고용한 노동자가 83%였습니다. 이들의 임금은 당시 법이 정한 최저임금보다 딱 10원 많은 64만1850원. 한 달 평균 잔업시간 70~100시간. 이들은 주말에 집에 있다가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세요'라는 문자 메시지 한 통으로 생계를 빼앗겼습니다.

ⓒ프레시안(자료)

비정규직 노동자의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기륭전자가 2004년에 올린 당기순이익은 220억 원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이익이 불법으로 파견업체를 통해 고용한 노동자의 땀이었다는 이야기도 꺼내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불법이 고작 벌금 500만 원으로 말끔히 씻겠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륭전자의 범법행위도 벌금으로 마침표를 찍었고, 범행 장소였던 가산동 공장도 말끔히 허물어졌으니 이제 모든 게 해결되었을까요?

기륭전자 노동자는 2008년 94일 단식 농성 때 입었던 하얀 소복을 꺼내어 부서진 공장 귀퉁이에 '미처' 허물어지지 않은 경비실 옥상에 올랐습니다. 거리의 가로수가 팍팍 쓰러지고 간판이 허공에 떠돌던 태풍 곤파스의 위협 때도 옥상에 주저앉아 온몸으로 광풍과 맞섰습니다. 옥상에 오른 지 오늘로 25일째. 교도소 독방보다 좁은 텐트에서 먹고 자는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이미 사라진 공장에 왜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엇이 사라졌냐고 되묻습니다. 기륭전자에서 쫓겨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제는 3개월, 6개월 초단기 계약직 노동자가 되어 구로공단을 여전히 떠도는데 어찌 끝났냐고 항변합니다. "2005년 기륭노동자만이 아니라 2010년 전체 노동자의 삶을 언제 벼랑 끝으로 내몰지 모르는 '파견법(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기륭의 문제는 끝날 수 없다"고 합니다. 또한 기륭전자는 이곳 가산동 공장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가산동 공장 터를 인수해 20층 규모의 아파트형 공장을 짓는 코츠디엔디는 '바지회사'에 불과하고 그 개발에 기륭전자 최동열 회장이 '실질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기륭전자 노동자는 7가지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륭전자 가산동 공장 터를 찾은 이유는 파견법의 문제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최동열 회장의 '투기' 의혹을 듣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맑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벌에 쏘일 때처럼 너무도 따가웠기 때문입니다. 따가움에, 문득 옥상에 있는 기륭노동자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태풍에 안녕했는지, 유난히 잦은 비에 감기는 걸리지 않았는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여름 열기에 몸이 축나진 않았는지…….

"이곳(농성장) 찾아와서 얼굴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발길 한 번 더 해주는 것이 우리에겐 힘이지요."

허물어진 공장 터 귀퉁이 폐가와 같은 경비실 옥상에서 25일째 숙과 식을 해결하며 농성 중인 윤종희 씨의 말입니다.

이제 기륭을 이야기할 때 '또?', '아직도?'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파견법이 사라지고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 노동자가 행복하게 일하는 세상이 올 때까지 기륭노동자의 싸움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진행 중입니다. 내 발길이 한 번 더 갈 때, 내 얼굴이 한 번 더 비춰질 때 기륭노동자가 바라는 세상은 앞당겨집니다.

추석이 다가옵니다. 불법을 한 이는 벌금 500만 원을 내고 편안하게 한가위를 보낼 것입니다. 파견노동자가 되어 불법에 혹사당했던 이들은 한가위 명절을 여섯 번째 농성장에서 쇠게 생겼습니다. 서울 금천구 가산동 219-6, 기륭전자 가산동 공장 주소입니다. 당신의 얼굴과 당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허물어진 공장 터에 희망의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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