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샐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법철학 개론서가 출간 두 달만에 30만부가 넘게 팔렸고, 이 신드롬에 대해서 저자도 놀랐고 출판사도 놀랐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고, 부당한 사회이며, 정의라는 우파 버전의 질문 마저도 봉쇄되고 있던 것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크게 보면, 장관 등 고위 공직자들 혹은 공기업 간부들의 자제들이 여러모로 편리한 사회로 한국 사회가 재편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자제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부인들도 교수가 되거나, 간부직에 보다 쉽게 접근했다. 한국에서 가장 견제가 없는 구청과 같은 기초 단체장은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까지, 지역 공기업에 한 자리씩 차지하는 구청장 왕국 현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아내가 취업한 기업이나 대학에 정부 지원사업이 몰려드는 현실, 그야말로 반칙왕들의 사회였던 셈이다.
▲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뉴시스 |
지금 한국 대중의 파토스는 단연 취업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기순환의 문제도 있고, 경기 구조의 문제도 있지만, 어쨌든 20대가 새로 사회에 나오면서 부딪히는 취업의 문제는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대의 파토스인 셈이다. 유명환 딸 사건은 바로 이 파토스를 건드렸다. 핵심은 취업 비리이지만, 본질은 반칙왕 사회에 대한 청산 요구가 사회적으로 그만큼 높다고 할 수 있다. 공정한 사회이든, 정의 사회이든, 이름이야 무엇이든 좋다. 한국에 팽배한 고위직들의 반칙을 줄이는 계기로 유명환 딸 사건이 기여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를 위해서 더 좋은 일일 것이다. 경제사회에 대한 분석은, 그 다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역사에 남길 업적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이번 일이, 그가 취임 후 처음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역사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 사건이라고 보고 싶다.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이제 처음으로 남길만한 개념 하나를 갖게 된 것이다. '공정한 사회'는 반칙왕의 청산으로부터 나오는 것 아닐까? 유명환 사건을 보면서, 나도 좀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구 정도로 정리를 해보았다.
첫째, 중앙부처와 공기업의 자녀와 자녀들의 특채 비리
시작은 외교부이겠지만, 아마 폭넓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료들이 남아있으니, 이 정도는 정부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광역단체와 기초단체의 '사모님 사업' 비리
자녀들 취업 특혜는 청년 실업과 관계되어 있을 것이지만, 지자체에서는 사모님 사업이라고 불리는 수의계약과 정책적 지원 등, 조금 특수 관계의 특혜 사업이 있고, 이런 것들이 토착 비리와 종종 연계된다. 대학, 기업 등 단체장 사모님과 관련된 사업들은 작고 소소한 정책지원에서부터 좀 큰 규모의 토건 사업까지 연결되어 있다.
셋째, 고위 공직자의 퇴임 후 로펌과 대기업 특채 비리
고위공직자들은 일정 기간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곳에 취업할 수 없게 되어있지만, 그건 대부분 말뿐이고, 로펌이나 대기업의 고문 등 간부로 재취업을 한다. 말로는 공직 시절의 인적 네트워크와 업무 지식 활용이고, 하는 활동은 자문이라고 하지만, 내가 살펴본 현실은 '승진을 대비한 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차관들은 언제 장관이 될지 모르고, 장관은 또 언제 '회전문 인사'에 의해서 다른 장관 아니면 총리로 올지 모르니, 특수 관계에 대한 유착이 형성될 여지는 언제나 충분하다.
나는 부처별로 자발적 선언 같은 것을 하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우리 부처의 고위직인 로펌과 대기업의 간부로 퇴임 후 취업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자발적 선언을 부처별로 하게 된다면, 법적인 규정이 아니라 공직자의 양심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가지게 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법률로 모든 것을 빡빡하게 막는 방식보다는 사회적 양심과 도덕이 기준이 되어, 엘리트들이 스스로 그런 것들을 지키는 형태로 나가는 것이 선진사회라고 생각한다. 법은 또 다른 편법을 만드는데, 특권층이 편법을 만드는 속도는 법제도의 정비의 속도보다 언제나 빠르지 않은가? 로펌과 고위직들의 특수관계, 그게 해소되어야 한국의 법제도에 대해서 국민들이 신뢰룰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넷째. 5급 이상 중앙 공무원의 재산 공개
행정고시로 들어가는 공무원들은 중앙부처 기준으로 5급 사무관이 된다. 신임 공무원이라서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7급 주사보로 출발하는 공무원들이나 지방공무원들은 많은 경우 평생 승진해서 가보는 마지막 자리이기도 하다. 공무원 숫자를 지속적으로 감소시키고, 중앙 공무원 5급이 담당관으로 가지게 되는 권한은 정책적으로 상상이 불가할 정도로 큰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도덕적 환기를 위해서 재산을 공개하도록 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자신의 재산 상황을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덕적 기준을 환기시키게 되고, 동시에 국민들의 지지라는, 공무원의 권한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끊임없이 인식하게 될 것 같다.
다섯째, 행정고시 등 공무원 채용 방식의 변경에 대한 연기
행안부에서는 내년부터 절반의 공무원을 특채로 뽑겠다고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운용의 문제라고 생각을 하지만, 아무래도 현 상황에서는 행정고시로부터 생겨나는 폐해보다는 특채 운용으로부터 생겨나는 사회적 폐해가 몇십 배 심할 것 같다. 외교부 5급 사무관 계약직 한 명 뽑으면서 정권 자체가 위기에 몰리는 일이 벌어졌다. 외교부만 부패하고 다른 부처는 청렴한가? 최소한 반칙왕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고, 한국의 공무원들이 신뢰할만한 사람이라는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전까지, 한국 정부는 특채 방식을 운용할 정당성과 능력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왜 믿어주지 않느냐? 억울할지도 모르지만, 반칙왕들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는 현재의 우스운 상황, 이 꼴을 보고도 "알아서 뽑겠다"는 제도 변경을 납득할 국민이 과연 있겠는가?
나도 정부 내에서 혹은 정부 근처에서 10년 동안 보고 듣고, 지켜본 사례들이 있다. 일일이 이름을 거론하거나 사업명을 거론하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정부가 스스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적절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말로만 시끄럽게 하고 사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지를 판단할 약간의 기준은 가지고 있다. 각 기관별로 감사실이 있고, 일단은 자체 감사를 하고, 그 다음에 감사원이 나서서 그러한 일련의 감사가 제대로 되어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정치적으로 감사원의 작동을 막고 있어서 그렇지, 나는 아직 한국의 감사원과 자체적 감사기구들이 이런 정도의 일을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칙왕들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는 이 역설적 현실 앞에서, 반칙왕들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 우습기는 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최소한의 기준을 사회적으로 세우는 일은,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인기 투표와 같은 방식으로 단기간에 끓어올랐다가 또 며칠 지나면 전부 잊어버리는 그런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모두가 기대했지만, 이런 일을 못했다. 그대신 그는 외부의 손을 빌려서 내부를 개혁하겠다는 한미 FTA를 강행하다가 정권을 날려 먹었다. 반칙왕 고위직들, 그들의 상당수는 한나라당을 지지하겠지만, 민주당 계열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반칙왕을 찾아내는 일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모두 제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얼마나 많은 일반인들이 냉가슴 치면서 이 현실을 보고 개탄을 했을지, 그리고 아버지 잘 만나서 5급 사무관 자리에 특채로 들어가는 현실을 보면서 많은 실업자와 고시준비생들이 가슴을 떨었던지, 그 아픔의 크기를 한 번 생각해보자. 과거의 경험으로 보면 지역 부패의 현상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아들과 사모님 문제에서 두 당이 크게 차별나게 입장이 다른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반칙왕을 처리하고 줄이는 문제에, 한나라당이 민주당보다,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더 잘할 것 같기는 하다. 정부의 부패가 모든 공무원의 부패나 비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정부의 부패는 모든 국민들의 손해라는 결과를 발생시키기는 한다. 이제 그 문제를 풀어보자. 한국의 문제 1번은, 반칙왕 문제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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