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들이 왜 이리 앞다투어 상생협력의지를 밝히고 있을까? 최근 재벌들이 적극적(?)으로 쏟아내는 하청업체 지원책은 거꾸로 지금까지 그들이 하청업체에 일방적인 횡포를 자행했으며, 기존의 상생협력 프로그램이 생색내기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정부·재벌의 '상생협력' 방안, 여전히 상투적
작년 말에 이어 올해 상반기 대기업의 경영실적은 사상 최대치를 갱신했다. 재벌들은 화려한 영업실적에 힙입어 임직원에게 돈잔치를 벌였다. 반면 이들의 하청업체들은 원자재가격 상승, 납품단가 인하, 필요인력 부족, 운영자금 확보 어려움 등으로 경영위기 상황을 호소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문제의 심각성 때문인지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재벌의 대변기관인 전경련의 사회적 책임을 재차 강조하면서 재벌과 정부의 불편한(?) 관계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와 재벌이 발표하는 상생협력방안은 여전히 상투적이고 임시방편책에 머물러 있다. 연일 언론지상에 보도되는 정부의 대응책은 한국경제의 핵심적인 구조적 문제인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불공정거래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루기보다 실효성 없고 상투적인 미봉책으로 채워지고 있다. 한편으로 재벌들은 자신들의 소위 '상생협력 프로그램'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으며, 제대로 된 협력적 기업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정부는 나서지 말고 기업이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선전한다.
예를 들어 현재 재벌이 불공정 하도급거래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내용의 대중소기업간 협력방안을 내놨지만 실질적이고 대등한 협력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기업간 협력이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시혜'나 정부의 반강제적 '팔비틀기'로 만들어지지 않듯이 하청업체에 대한 재벌의 보호와 지원이 이를 가능게 하는 것은 아니다.
▲ 대중소기업간 관계에서 '갑'에 있던 대기업들이 잇따라 상생협력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들의 시혜성 지원이 과거와 다른 효과를 낼 수 있을까? ⓒ뉴시스 |
진정한 상생협력은 '불평등'의 인정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상생협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원청과 하청이라는 일대일 관계의 상생을 넘어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비용과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공생협력은 어떻게 가능한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소기업간 관계의 본질이 '갑'과 '을'로 표현되듯이 불평등한 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뜬 구름 잡는 상생협력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본질적으로 불공정한 거래를 조장하는 원하청기업간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
그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하다. 약자인 하청기업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고 원청대기업의 비리와 횡포를 막는 실효성있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하는 것이다. 협력등급이 높아지면 공정위조사를 일정기간 면제하는 등 원청에 대한 형식적인 유인만을 강조하지 말고 3배 징벌제도, 일정규모 이상 거래 표준계약서의 작성의무화, 핵심적인 계약내용의 공정위 공시의무, 납품단가 원가연동 및 집단적 조정협의회 등 원청대기업의 책임을 강화하는 패널티 방안을 현실화시켜야 한다.
불공정거래를 줄이기 위한 방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대일 관계로 대표되는 상생관계를 넘어 모두의 공생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이론에 확인할 수 있듯이 실질적인 협력관계는 대등한 교섭력을 가진 경제적 행위주체가 의사소통, 인식공유, 공동목표를 만들어내고 기회주의적 태도를 제어할 때만이 가능하다. 만일 이 때 경제적 행위주체간 관계가 불균형하다면, 이를 시정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과 제 3의 조정자가 필요하다.
개별 기업 넘어선 업종·산업별 협력기구 세워야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재벌을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리그'에 포함되는가에 따라 하청업체의 운명이 달라지도록 만드는 현행 그룹차원의 상생협력방안을 넘어서는 초그룹적인 업종별, 산업별 대중소기업협력기구와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는 재벌의 상생협력방안을 한번 자세히 보자. 현재 발표되는 있는 내용들은 방안 자체의 실현가능성 여부를 떠나 재벌의 테두리 안에 갇혀서 이루어지는 협력방안에 불과하다. 1차 하청업체를 넘어서 2차, 3차 하청업체까지 지원하고 혜택을 주겠다고 하지만, 최종결정권은 그룹 최고경영층이 가지고 있다. 즉 중소하청업체들은 그룹 차원의 상생협력 네트워크에 포함되기 위해 충성과 헌신을 다할 수밖에 없으며, 일단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면 지원의 대가로 침묵을 강요받는 처지에 몰리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그룹 차원의 기업간 네트워크는 그들만의 상생협력은 가능하게 만들지 모르지만 비용과 이익에 대한 담합과 비용 전가로 인해 해당 업종 및 산업의 부담이 가중될 수 있으며, 네트워크에 포함되지 못한 수많은 중소기업과 소속 노동자들은 불공정거래와 출혈경쟁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점 때문에 재벌과 그룹 차원을 넘어서는 업종별, 산업별 대중소기업협력기구가 필요하다. 그룹 차원의 개별적 협력네트워크의 강한 내부응집력과 연계가 산업구조의 균형을 흐트리고 산업관계의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각 업종 및 산업별로 중립적인 제3의 협력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부 산하의 대중소기업 협력재단을 공익기관화하고, 이에 대해 정부가 독립성을 보장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지원 기금의 조성은 해당 업종에 속하는 대기업들이 자신의 매출액 또는 시장점유율에 비례해 출자액을 나눠 납부하고, 중소하청업체에 대한 지원 기준·과정·결정과 평가 등 주요한 의사결정은 이해관계자로 구성된 독립적 운영위원회가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된 중소기업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진정한 의미의 대중소기업간 협력적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재벌에 줄을 서야만 '떡고물'이라도 받을 수 있는 상생협력방안이 아니다. 산업구조의 균형과 대등한 기업간 관계를 촉진할 수 있는 초그룹적인 업종별, 산업별 공생협력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아킬레스건인 자본간 과당경쟁을 완충하고 공생을 목표로 한 다층적 협력 네트워크가 만들어야만 산업구조와 산업관계의 질적인 도약이 가능할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