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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움'보다 '우애'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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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움'보다 '우애'가 필요합니다"

['이명박 시대'를 맞으며] 보수주의자의 대선 관전

선거는 끝났다. 하지만, 과정을 복기하며 그 의미를 곱씹는 일이 남았다. 표심의 분포도 주목 대상이다. 백가쟁명(百家爭鳴) 식의 해석과 다양한 의견을 소구하되, 이를 민의의 향방에 맞추어 통합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긴 사람은 이긴 사람대로, 패배한 쪽은 패배한 쪽대로.
  
  벌써부터 앞으로 5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장탄식이 진보 진영에서 들려온다. 책임을 전가하는 손가락질도 간혹 엿보인다. 그래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기회는 또 오기 마련이니까.
  
  물론, 이렇게 말하면 '악어의 눈물'로 오해 받을지 모르겠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짐짓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리는 시누이처럼 더 미운 꼴이 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내가 기회가 온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렇다. 대통령을 뽑는 행위, 즉 '의사 결정'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에서만 권력을 바라보면 선거가 전부다. 그런데, 권력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바크락 등은 '의제 선정' 역시 권력의 중요한 기능으로 인식했다(Bachrach P & Baratz M, The two faces of power, 1962).
  
  다시 말해, 비록 선거에서는 지더라도 우리 사회가 천착해야 할 주요 의제를 선별하고 이들 사이의 우선 순위를 '현실감 있게' 배열하는 능력을 회복한다면 기회는 다시 온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면 기회가 오기 전이라도 얼마든지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사실 이번 대선에서 신당의 정동영 후보가 531만 표 차로 대패한 것은, 지난 5 년동안 '참여정부'의 의제 선정 방식이 매우 사변적이고 비현실적이었던 데 대한 평가의 의미가 짙다. 멀게는 과거사 정리부터 가깝게는 기자실 폐쇄가 그랬다.
  
  물론 이들 자체로는 중요한 의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의 척박한 일상과는 유리돼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한 마디로, 상호 경쟁적인 의제들의 우선 순위를 선정하는 일에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는 것. 심지어는 제대로 된 의제를 선정해 낼 능력이 아예 없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 결과는 지난 5 년 내내 목도한 그대로다. 지속적인 편 가르기, 상대 불문의 드잡이, 거친 언사, 조폭식 밀어 붙이기 등이 우선 떠오른다. 하지만 야당 쪽에서나 쓸 법한 방법을, 그래도 명색이 권력을 가졌다는 여당 측에서 동원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무척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런 식의 미숙한 의제 선정 방식이 신당의 선거 전략에까지 이어졌다는 사실. 이명박 대 정동영, 또는 이명박 대 반(反)이명박으로 구도를 설정해도 시원찮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당 등은 'BBK 의혹'에 자신의 운명을 전적으로 연계함으로써 '이명박 대 이명박'으로 선거를 이끌었다. 물론 여기에서 앞의 이명박은 한나라당이 내 건 '경제를 되살릴 유능한' 이명박이고, 뒤의 이명박은 신당 등이 주장한 '부도덕한' 이명박이다. 이처럼 '이명박'만 거론되는 마당에 신당의 정 후보가 26%나 득표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기적에 가깝다.
  
  진보 진영이 의제 선정에서 다시 우월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보수주의자 주제에 오지랖 넓게 진보에 훈수 두고 나서는 것을 과히 탓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링컨의 말을 인용해 대답하고 싶다.
  
  "부자를 무너뜨리는 것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이 아니다. 계층 간의 미움을 조장함으로써 형제애를 증진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강남 사는 부자들을 주로 겨냥한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가져 온 결과는 유례 없는 집값 폭등이었다. 집 없는 서민은 평생 벌어도 절대로 집 한 칸을 마련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 절망했다. 그 대책으로 내놓은 세금 정책을 놓고 달랑 집 한 채 있던 사람은 '세금 폭탄'을 맞았다며 또 한 번 절망했다. 이들이, 진보 개혁 세력이 그렇게도 아끼고 위한다는 이 사회의 못 가진 자, 서민, 중산층이라는 사실은 무서운 아이러니가 아닌가? '부자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절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 될 수 없다'는 링컨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더 큰 문제는, 참여정부가 사회적 평등 추구라는 순수하고 정직한 진보의 원리에 따라 정책을 추진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 정작 숨겨진 동기는 소수의 가진 자에 대한 미움이었다. 다시 링컨의 말을 빌면, "계층 간(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미움을 조장함으로써 형제애(즉, 진보 개혁 세력과 못가진 자 사이의 유대)를 증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이번 선거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것처럼, 진보 개혁 세력이 형제 또는 지지 집단이라고 생각하던 못 가진 자, 약자, 서민마저도 신당에 등을 돌렸다. 계층간의 미움이 오히려 형제애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링컨의 혜안은 이 경우에도 빛이 난다.
  
  따라서 진보 진영이 정녕 의제 선정 과정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으면 세상만사를 '우리' 와 '그들'의 관점에서 대립적으로 인식해 투쟁하려는 생각부터 바꿀 일이다. 하지만, 진보와 개혁을 외야 '민주 세력'이고, 나머지는 모두 '수구 꼴통'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원로연(然)하며 떡하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진보의 현실이다.
  
  더군다나 말 그대로 '민주(民主)'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것이라면, 선거에서 국민이 선택한 세력을 비민주적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요컨대 민주화 운동의 과거를 회고하는 데 소일하는 이름만의 민주 세력을 솎아 내지 않는 한, 진보 진영의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전망이 그래서 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깨달음이 대선에서 승리한 보수 세력에게도 그대로 적용됨은 중요하다. 벌써부터 '좌파를 적출 수술하겠다'는 말이 들린다. 단순히 이를 승리감의 도취에서 나온 객기로만 넘겨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또다시 계층 간의 미움을 조장한다면, 결국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이 될 게 분명하기 때문.
  
  뿐만 아니라, 좌우의 균형이 없는 사회는 결코 멀리 비행할 수 없는 법이다. 요컨대, 의견과 지향이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승자의 아량이 아니다. 오히려, 승자의 생존을 위한 필요 조건이다. 만에 하나 적출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 역시 국민이 결정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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