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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경제-민족경제'가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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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자립경제-민족경제'가 대안이다

[통일운동의 시각전환을 위하여(3)] 새로운 패러다임

4. 자립경제, 민족경제가 대안이다
  - 자립경제 체제로의 새로운 패러다임 확립을 위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자립경제의 힘은 공룡과도 같은 미국의 어떠한 제재와 압력에도 끄떡없는 쿠바의 현재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부각된다. 우리는 흔히 자유무역 경제에 대한 대안이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응전략이 그저 신자유주의 분쇄라는 구호밖에 없다면, 그것은 조총을 가진 일제 군대에 맞서 궁궁을을 부적을 외우는 짓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인지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경제학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세계화는 피할 수 없으며 한미 FTA도 언젠가는 체결해야 하지만 그 속도와 내용이 문제라고 궁색한 반대의 논리를 편다. 실제로 과연 그럴까.
  
  이미 지적했지만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그 존립 기반인 석유와 천연자원의 고갈로 전혀 지속가능하지 않다. 자본주의 세계화 또한 명백히 지속불가능하다. 다만 시간이 문제이다. 때문에 산업문명의 붕괴가 목전에 다다른 지금 유일한 대안은 지속가능한 햇빛농업을 중심으로 에너지 자립, 식량 자립을 이룩하는 자립경제 체제로의 전환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자립경제, 민족경제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힘 있는 대안이다. 단순히 한미 FTA에 반대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대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자립경제로의 확고한 전환이라는 시각과 함께 실제 이를 실천하는 프로그램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때이다. 한국의 산업과 수출경제를 천천히 착실한 전환 프로그램과 기획에 따라 자급자족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립경제 체제로 이행하는 것만이 산업문명 붕괴에 대비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사실 자립경제, 민족경제는 196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 실행할 때 내세운 주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른바 세계화 시대가 왔다는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자립경제란 말 자체도 사라지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이념으로 폐기되고 말았다. 식량과 에너지의 자립 기반이 없는 민족경제가 얼마나 사상누각의 허구인지는 쿠바와 북한의 예를 다시 들지 않아도 상식에 속하는 문제임에도 그렇다. 우리의 선조들은 불평등한 토지소유와 농업생산의 변화, 인구의 변화, 정치권력의 변화에 따라 때때로 굶주림과 전쟁과 사회혼란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속가능한 농업을 기반으로 자립경제 체제를 수천 년 간 유지해 왔다. 그럼에도 근대화, 서구화라는 전도된 석유중독의 가치관 아래 근대 이전 한국의 농업사회를 은연중 정체된 사회, 심지어는 수치스러운 기아와 궁핍의 역사로 폄하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극단이 이른바 어처구니없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로서, 이들은 근대가 만들어낸 누런 피부, 흰 가면의 뒤틀린 식민의식을 지닌 노예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도 지속가능 사회, 자립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자립농업으로의 전환과 에너지 전환은 단순히 유기농을 확대하고 재생가능에너지의 보급 확대를 뜻하는 게 아니라 사회체제 자체의 전환을 뜻한다. 석유가 20세기 초에 16억이던 인구를 65억으로 늘려 놓았다면, 석유가 없는 지구는 더 이상 이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다. 저출산이 재앙이라고 호들갑떠는 한국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빙하가 눈앞에 닥치는 줄도 모르는 채 파티에 여념이 없는, 눈먼 석유중독자들이다. 남한의 4700만, 남북한 합쳐 7천만 인구는 석유로 인한 과잉인구이며, 오히려 이것이 재앙일 수 있다.
  
  사회체제의 전환은 자립농업의 확립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북한에게도 남한에게도 다른 길은 없다. 그것도 석유에너지를 투입하는 죽음의 농업이 아니라 현재의 햇빛에너지를 사용하는 생명농업으로의 전환, 지역자치와 지역자립 공동체를 재생하는 소농경제의 확립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와 함께 에너지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해, 바람, 물, 바이오매스 등을 이용하는 에너지민주주의 체제, 즉 분산형 에너지체제로의 전환,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실천해야 한다. 현재 해, 바람, 물, 바이오매스 등을 이용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다. 다만 석유중독이 문제일 뿐이다. 당장 자동차 중독과 이에 따른 도로 문제, 운송, 관광산업 등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세계화에 반대한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세계화의 물결을 거슬러 배를 멈추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지금은 19세기 말 조선인들이 숨어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시베리아나 만주의 울창한 숲도 사라지고 없다. 아마존을 비롯해 지구상에 이제 그런 곳은 남아 있지 않고, 자본주의 세계화의 갈퀴 손가락은 도처에서 중독성 페르몬을 뿜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때문에 더더욱 우리에게는 산업문명과 석유문명의 중독증을 하루라도 빨리 치료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 자본주의 세계화를, 그 중에서도 자원착취 가속화의 최악의 범죄행위인 나쁜 세계화를 극복해야 생존이 가능하며, 언젠가 반드시 부닥치게 될 세계화의 추락을 준비하는 지혜를 모아야만 한다.
  
  당장 폐쇄경제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당장 원자력 발전소와 화력발전소의 가동을 중지시키고 자동차도 폐차해버리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결코 아니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이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석유중독과 폐쇄공포증에 걸려 있는 관료와 전문가들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지금, 다가오는 자원고갈에 대비하는 새로운 사회전환 기획의 준비에, 풀뿌리 인민들이 밑에서부터 이런 생태순환형 자립사회로의 전환운동에 나서야만 한다는 말이다.
  
  자립경제의 확립은 민주주의의 완성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지역자치와 자립체제에서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오늘날의 대통령이란 제왕과 다름없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할 때 하루평균 4억3천만 원을 썼다. 부시를 24시간 보호하는 경호원은 자그마치 5천 명이 넘는다. 2003년 말 부시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는 영국경찰 5천 명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방탄차량 수십 대와 기타 장비를 운반하는 데에만 보잉 항공기들이 수십 번 왔다갔다해야 했다. 미국도 처음에는 이렇게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았다. 인구가 늘어나고 자본주의가 점차 시장의 확대와 함께 국가권력의 중앙집중화를 통한 지배를 관철하면서, 정치인 매수와 협잡을 통해 자본권력이 비대해지기 시작하면서 대의제 (선거)민주주의는 왜곡되기 시작했고, 민주주의가 풀뿌리 민주주의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다.
  
  서구민주주의의 시원으로 이야기되는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선거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단언했을 때 그들은 이처럼 인민의 주체적 참여가 없는 권력의 위임이 무엇으로 귀결되는지를 우려했던 것이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단순히 선거민주주의, 정당민주주의로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하게 풀뿌리 민주주의가 활성화되고 살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지역자립과 자치를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은 이런 풀뿌리 차원에서 인민들과 지역사회를 재조직화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이 진보이념이었는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1980년대까지 사회주의는 진보이념이었다. 민주화운동세력의 상당수가 사회주의를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진보이념으로 받아들였고, 근대화의 완성이 주요한 목표였다. 1990년대의 시민운동까지도 사회발전과 진보, 번영과 강대국 지향이 기본이념이었다. 이런 근대이념은 이제 한계에 봉착했고, 명백한 실패로 드러나고 있다.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평등과 착취의 근절, 사회정의의 이념까지 틀린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또한 사실은 자본주의와 똑같은 발전과 성장의 이데올로기로서 낡은 자연착취 이념, 지속불가능한 보수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발전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는 우연성이 결정하고 그리하여 역사에서는 사람이라는 주체의 선택행위가 무엇보다 중요한 결정요소이다. 역사에서 진보란 없으며 단지 사회는 변화할 뿐이다. 그리고 한국의 산업화 전략 선택은 우리 사회를 지속불가능한 사회로 귀결시켜 버리고 말았다.
  
  한국의 사회운동과 통일운동은 이처럼 낡은 진영론, 즉 보수/진보의 낡은 이분법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사실 지금은 우리 사회의 주요 의제에 대한 보수/진보의 구분이 매우 어렵게 혼재되어 있거나 의제별로 분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대 황우석 사태와 생명공학 문제에 대한 견해에서 알 수 있듯 보수/진보의 잣대로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과 새로운 자립경제 체제로의 전환은 이처럼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고 현재가 미래를 까먹고 있는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필요로 한다.
  
  5. 통일운동의 시각 전환을 위하여
  
-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통일인가
  
  오늘날 한국은 국내총생산 7875억 달러(2005년)로 세계 12위에 올라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만6291달러로 세계 29위에 이른다. 우리 주위를 조금만 돌아보아도 과연 한국사회는 풍요가 넘치는 대량소비의 선진 산업사회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북한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조금만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제성장과 발전을 구가하는 남한사회 풍요의 실상 또한 실은 참담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 노동자들, 300만에 육박하는 차상위 빈곤층, 아직도 움막이나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극빈층, 아파트에서 자식과 함께 뛰어내리는 빈곤자살자 등. 우리 사회의 극단에 가까운 양극화는 과연 한국사회가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인지 의심케 한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경제성장을 하고 개발을 하고 수출을 하고 GNP를 늘리려 그렇게 피와 땀을 흘렸는가.
  
  다른 그 무엇에 앞서 이제 우리는 경제성장률과 GNP를 따지는 쓰레기 근대경제학을 과감히 폐기해야 한다. 사실 이미 경제학은 숫자더미라는 암세포에 파묻혀 경세제민을 잊은 채 죽어버린지 오래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고 석유전쟁으로 죽어도 경제학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마존 밀림이 사라지고 빙하가 녹아도 경제학은 전혀 쳐다보지도 않는다. 때문에 그런 경제학은 쓰레기통에 넣어 불태워버리는 게 차라리 낳다.
  
  한쪽에서는 석유를 너무 많이 먹어 비만 때문에 살빼기 산업이 기승을 부리는 반면, 한쪽에서는 석유가 너무 없어 굶주리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남북의 현실은 바꾸어야 한다. 오늘의 현실은 한국 사회운동의 전환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의 전환도 요구한다.
  
  한국 사회는 이제 두 계급만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산업화 초기에 인간 이하의 비참한 노동자의 삶을 뒤바꾸기 위해 나타난 사회주의 혁명론의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구분은 한국사회에서 이미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한국사회는 프리케어리어트(Precariat, 불안정 계급)와 비프리케어리어트(경영자, 자본가들조차 불안한 세상이므로 안정계급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로 구분될 만큼 삶의 안정이 파괴되어 버리고 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변화된 상황 속에서 한국의 사회운동과 통일운동은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대다수 인민들, 불안정계급의 삶을 위해 대안을 제시하고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불안한 노동, 불안한 건강, 불안한 도시공기, 불안한 식품, 불안한 주거환경, 불안한 교육, 불안한 교통, 불안한 물가, 불안한 남북관계, 불안한 유가 등 온통 불안하기만 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회운동과 통일운동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통일운동의 근본이념은 성장과 번영, 민족주의로 통일된 강대국의 상을 기본으로 하긴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통일운동은 대중동원을 통해 극단의 레드컴플렉스와 반공이념 아래 군사독재정권의 통일론 독점을 깨면서 남북한 사이에 교류협력이 시작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시민운동 진영에서 평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이는 통일운동과 사회운동의 외연을 심화, 확장시켰다. 특히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 간 민간교류와 협력의 확대는 전쟁위협을 일반 인민들의 의식에서부터 허무는 한반도 통일의 초석이었음이 서해교전 뿐만 아니라 최근 북한 핵실험 사태에서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동안 남북 정부의 통일론이나 통일방안, 통일정책은 오히려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 정착을 가로막아 왔다. 그런 측면에서 민간교류의 활성화는 운동으로서의 통일,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보여주고 실천한, 통일운동의 값진 성과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통일운동은 일부의 반미투쟁 집중론과 인도적 지원을 중심으로 한 평화운동이 서로 교차하면서 정부의 교류협력 확대, 보수층의 흡수통일론, 북한 민주화론과 북한 타도론 등이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북한정권의 경직성까지 더해 그 어느 때보다 혼돈이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자유주의 시각이건 민족해방 시각이건 민중해방 시각이건 통일운동의 실천과 내용을 살펴볼 때 상호교류 이외에는 그다지 뚜렷한 진전이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북한 핵실험을 놓고 자위권 운운하는 이른바 통일운동 내 이른바 자주파의 주장은 민간 통일운동의 퇴행과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북한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과 옹호, 찬성하는 것은 다르다. 이른바 자주파는 북한과 함께 미국 및 친미 극우세력과 적대하면서 공생하는 관계를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모든 악은 미국이라는 반미환원주의는 극단이며, 이는 북한이 악의 축이라는 미국 및 남한 극우세력의 반북환원주의와 마찬가지로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다. 이는 전혀 평화를 소망하는 일반 인민들의 동의를 얻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에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니 맹목의 숭미세력과 반미세력은 둘 다 실제로는 통일운동을 방해하는 세력들이다.
  
  구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냉전체제가 탈냉전체제로 전환되면서 한반도 통일운동은 평화운동과 결합하게 되었다. 1994년 미국의 북폭 위기가 가시화되면서 시민사회에서 반전평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북한의 식량위기가 알려지면서 북한 돕기 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평화운동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한반도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은 사실 민주화운동과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의 운동이었다. 국제관계의 민주화까지 포함하는 평화운동은 한국에서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시민사회운동, 지역자립과 자치의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운동 등 모든 차원의 운동에 전제가 될 수밖에 없다.
  
  국가 간의 국제관계에서 힘의 정치는 평화의 정치를 늘 누르고 있다. 평화의 정치는 사실 이상론으로 폄하되기까지 한다. 평화에 대해 어떤 이들은 무리생활을 선택한 인간 본성의 공격성까지 언급하면서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실현불가능한 인간관계의 이상으로 보기까지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쟁의 부재 또는 세력균형과 평화를 동일시하는 사고는 서구의 근대를 기획하고 실천한 주류 지배자들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서구 자본주의 근대화, 산업화는 그 본질상 침략을 전제로 한다. 현실주의와 평화란 이름 아래 자행되었던 인디언 학살, 태즈매니아 원주민 학살을 비롯한 무수한 제노사이드와 원주민 추방의 역사는 서구 백인의 문명이 얼마나 폭력과 살인에 물든 시뻘건 가짜 평화인지를 입증한다. 비민주주의 국가에 민주주의를 심어주기 위한 폭력과 침략은 정당하다는 민주평화론도 그 변종이다. 미국의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도 그 명분은 이 민주평화론이었고,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주석궁을 폭격해야 한다는 주장도 그 근거는 이 민주평화론이었다. 전쟁이 곧 평화인 셈이다. 북한 또한 착취계급의 평화와 평화의 교란자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얻는 진정한 평화, 곧 정의의 전쟁을 구분한다. 정의의 전쟁과 민주평화론에 입각한 이라크 침략은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억압받는 사람들의 폭력은 정당하다는 명제 또한 참으로 힘든 고뇌와 깊은 근원의 의문을 여전히 내포하고 있지만 도착된 명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폭력과 이스라엘의 폭력은, 그리고 미국의 핵과 북한의 핵은 결국 동일하다. 모든 폭력과 전쟁은 정의라는 말로 미화하든 평화라는 말로 미화하든 폭력이고 전쟁일 뿐이다.
  
  베트남식 무력통일은 우리가 택할 통일방식이 결코 아니다. 독일식의 급격하고도 한쪽이 한쪽을 흡수통일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방식도 아닐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결국 무조건의 평화통일만이 우리가 택해야 할 통일방식이며, 이는 또한 실현가능하다. 한국의 통일운동은 그 본질상 평화운동이며 자립경제 체제로의 전환운동, 우애와 협동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지역자립과 자치운동은 그 본질상 평화운동일 수밖에 없다. 남북의 대치상태와 적대관계는 사실 그동안 동북아시아의 불안요인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평화의 장애요인이기도 했다. 남북의 통일을 통한 강한 민족주의 국가의 탄생은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질서의 불안요인을 더욱 커지게 할 우려가 크다. 민족주의 일변도의 통일 주장이 자칫 평화와 민주주의에 저해가 된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때문에 오히려 자립경제와 지역자치의 민족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통한 통일운동은 동북아 평화질서의 초석으로서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통일을 말하기에 앞서 평화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듯한 수사이긴 하나 위험한 주장이자 공허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선평화론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평화와 통일은 선후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한국의 통일운동은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사회주의 모두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사회가 결코 될 수 없으며, 우리는 동시에 남북한의 체제를 극복하고 전환하는 통일운동, 사회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우리는 남북의 체제를 자립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우애와 협동의 공동체로 바꾸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에너지의 전환과 농업의 전환을 중심으로 놓고 보는 발상의 혁신이 있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식량 자급과 에너지 자립을 통한 지역 자치와 자립이야말로 자립경제의 핵심이다. 가족농을 중심으로 한 생태농업은 식량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법일 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은 도시의 수많은 불안정계급을 흡수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기간산업이기도 하다. 북한에 대한 지원 또한 이런 시각에서 재정립되어야 한다. 사랑의 무연탄 보내기 운동 등 북한에 석탄을 지원하는 것은 마약중독자가 당장 죽어가고 있다고 인도적으로 마약을 주사하는 짓과 마찬가지이다. 비료를 지원하고 경수로를 건설해준다거나 원자력과 화석연료 중심의 남한 전기 몇 백만 kW를 지원한다는 것도 같은 차원의 지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과의 교류협력의 증대,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이 자립과 자치의 시각에서 재검토될 때 통일운동의 내용이 보다 충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교류는 서로의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물길을 바꾸어야 한다. 북한에 대한 에너지 지원은 햇빛발전과 바람발전, 소수력과 바이오가스 시설 지원으로 전환해야 하며, 식량지원은 비료가 아니라 나무 심기와 유기농 지원이 되어야 한다. 일부에서 이미 이런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통일운동은 더욱 이를 핵심사업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대한 재생에너지 지원은 재생에너지 산업의 기반이 구축되는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농민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은 새로운 브나로드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식량자급 체제로의 전환, 에너지 자립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사실상의 진정한 통일운동이다. 북한의 노동자, 농민과 교류하고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과 북 각각의 지역자치와 지역자립의 토대가 없는 교류와 지원은 정세변화에 따라 언제든 중단될 소지가 많은 임시방편의 교류와 지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분단체제론이 강조하는 것도 이런 측면일 것이다.
  
  이제 통일운동은 국가에서 사회로의 시각전환이 필요하다. 자립경제 체제는 국가의 시각보다 사회의 시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한 기획은 튼튼한 지역사회의 토대가 있을 때 힘 있게 추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정부주의를 신념으로 갖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전환의 기획이 없다면 그것은 대안 없는 신념에 불과할 뿐이다. 자립경제와 민족경제는 이런 지역자치를 토대로 비로소 국가에 대한 기획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국가가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해온 억압과 착취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허구이자 이데올로기인 국익을 밑에서부터 허무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자립경제로의 전환은 기존의 산업세력과 정치인들이 실천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른바 전문가들, 과학자들, 정치인과 관료 등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석유중독자들이다. 마약공급자들과 마약중독자들에게 마약 없는 사회를 만드는 사업의 책임을 맡길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감옥과 치료가 필요할 뿐이다.
  
  요컨대 우리는 자유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더불어 함께 사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한반도에 만들어야 한다. 남북을 함께 아울러 의식주를 고루 나누는 지속가능한 자립경제 체제로 전환시키는 일은 우리의 풍요, 우리의 도둑질에 대한 속죄이자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그나마 생존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생명보험일 수 있다. 통일운동과 사회운동은 이같은 자립과 자치, 평화와 전환의 촛불을,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나둘 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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