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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농민운동, 이대로는 죽는다"

[제언] '햇빛농업'으로 '자립경제'의 길 모색해야(2)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계기로 농민운동은 또 한번의 '결전'을 결의하고 있다. 하지만 농민운동의 미래를, 또 우리 농업의 미래를 낙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13일 발행될 〈녹색평론〉 2006년 3~4월호(제87호)에 실린 '늙은 농민운동, 확 바뀌어야 농업 농민이 산다'는 기고를 통해 농민운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은 당면한 한미 FTA에 대한 대비는 물론이고 농업과 농민운동의 재정립,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가지면서 새로운 통찰력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프레시안〉은 이러한 문제제기의 중요성을 감안해 필자와 〈녹색평론〉의 동의를 얻어 지난 9일 이 글의 전반부를 소개한 데 이어 후반부를 소개한다. 〈편집자〉

***농민운동, 180도 바뀌어야 한다**

식량 재앙에 대한 대책은 너무나 자명하다. 식량 자급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명확한 기획과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농민운동은 그러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농민운동은 식량 자급에 대한 뼈저린 자각을 통해 농업·농민 문제에 대해 다수의 인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의제 설정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명확한 대안 제시도 하지 못했다.

물론 한국 농민운동은 그동안 농업·농민에 대한 당대의 수탈과 잘못된 현실을 뜯어고치기 위해 농민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참으로 어려운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해 왔다. 한국 농민운동은 동학농민전쟁 이래 끊이지 않고 투쟁해 왔으며 특히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과 반공이데올로기의 철벽을 뚫고 노동운동과 함께 아래로부터 사회를 개혁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풀뿌리 민주공동체의 싹을 틔워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선 오늘날 한국 농민운동은 그 정당성과 존립 자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동안 일반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오던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이제 시대착오의 집단이기주의로, '나이 많은' 농민들의 불쌍한 항변쯤으로 치부되는 가운데 어떠한 의미 있는 연대나 지원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농민운동은 과거지향의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고, 도시인들로부터도 젊은이들로부터도 미래비전으로부터도 소외된 고립무원의 상태에 갇혀 있다. 노동운동이나 일반 시민사회 또한 농민운동에 대해서는 온정주의 이상의 시선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위기의 원인은 농민운동 자체에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WTO 반대투쟁이나 시위 집회가, 그동안 전농과 농민연대가 수행해 온 미국반대, 개방반대, 통일농업의 구호가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 모든 저항과 반대에 앞서 농민운동은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나아가 일반 시민들도 공감하는 새로운 농촌공동체 건설과 긍정의 농업 농민 대안을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농민운동은 그런 희망과 공감을 주는 데 실패했다. 실제 농민운동은 농업 농민을 살리는 어떤 프로그램도, 식량자급의 구체화된 어떤 프로그램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농업은 천민의 직업 정도로 인식되고, 농민운동은 그저 그런 이익집단의 집단행동이나 청원운동 정도로 전락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농민운동의 성과로서 1990년 4월 결성된 전농의 강령을 보면, '농민적 토지소유', '식량 자급형 농업', '환경 보장형 농업', '통일 대비형 농업', '전업적 가족농을 통한 농업의 협동화' 등이 명시되어 있다. 전농이 추구해야 할 농업의 대안이 뚜렷한 용어로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강령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지 그 길과 방식에 대한 구체안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전농은 과연 자신의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 현실에서 어떤 기획을 하고 어떤 실천을 했던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농민운동은 명확한 이념과 전망이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어떤 사회운동도 이념과 전망이 없거나 불명확하면 그것은 운동으로서 지속되기가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일시에 폭발해서 광범위한 저항과 반대의 물결이 온 사회를 휩쓴다 해도 뚜렷한 이념과 미래에 대한 구체상이나 상상력을 갖춘 조직 집단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전략전술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일장춘몽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아니 그런 전략전술을 갖고 있다 해도 인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 또한 실패로 끝나기가 십상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쟁이 그러했고, 20세기 최대의 실험이었던 현실사회주의가 그러했다.

우리의 먹을거리를 농약투성이인 외국산 화학농업의 산물에 맡길 수는 없다. 우리의 건강권을 위해서도 그렇고 식량안보를 위해서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식탁을 우리의 농약투성이 농산물로 채운다는 것도 똑같이 안 될 말이다. 한국 농민운동은 우선 자신들부터 화학농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런 근본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말하지만 에너지 과소비의 관행농업, 에너지 외부의존, 외부종속의 화학농업, 석유농업은 지속가능하지도 않고 우리의 미래도 결코 아니다. 쌀을 생산하기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는 종자에서부터 논밭갈기, 씨뿌리기, 모심기, 농약뿌리기, 가을걷이, 가공, 포장, 저장에 이르기까지 엄청나다. 사실상 우리는 밥을 먹을 때 다량의 석유까지 함께 먹고 있는 셈이다.

***농민운동, 이제 '햇빛 농업'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유일무이한 대안은 '현재의 햇빛 농업'(현재의 햇빛 농업이란 관행 화학농업이 과거의 햇빛 에너지가 응축된 석유를 대량으로 투입하는 약탈 농업임을 빗대어 글쓴이가 만들어 낸 말임. 모든 농산물과 생명은 현재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 에너지의 산물이며, 또한 해, 바람, 물, 바이오매스 등 재생가능에너지[이들도 사실 현재의 햇빛 에너지가 기본임]를 이용하는 농업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말을 썼음)이다. 에너지 자립의 주춧돌 위에 세워진, 지금 이 순간의 햇빛 에너지를 이용한 건강한 농업만이 현대 산업문명의 눈먼 미친 질주를 멈추게 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햇빛 에너지를 마구잡이로 강탈하는 농업은 인류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자살농업일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의 주범이자 여섯 번째 멸종을 향해 달려가는 생명파괴의 농업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인류는 단 200년 만에 지구상의 화석연료를 거의 절반 이상 마구 퍼다 써버렸다. 우라늄조차 약 50년, 채굴하는 데 비용이 더 들어가는 것까지 합해도 100년이면 영원히 없어져 버린다. 우리나라 에너지 의존율은 97%로 그것도 자랑스러운 세계 1위다. 게다가 미국이 전쟁을 일으킨 중동지역에 대한 의존율이 73%에 이르고 수급 또한 철저히 석유메이저에 종속되어 있다. 아무리 반미를 외치고 자주독립을 말로만 떠들어보았자 지금과 같은 석유 정치에서 한국은 처음부터 반미가 불가능한 에너지 수급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농민운동은 구호만의 반미, 반세계화에 앞서 에너지 자주독립의 대안부터 모색해야 한다. 2005년 우리나라 석유도입액은 420억 달러나 되고, 석유소비량은 1200억 리터나 된다. 63빌딩을 320번 채울 수 있는 양이며 드럼통을 늘어놓으면 서울부산을 648회 왕복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같은 에너지 광(狂)낭비의 경제체제에 속한 농업에 그대로 함몰되어 있으면서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과 자립을 모색하지도 않고 단순히 세계화를 반대한다는 것은 어쩐지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에너지 집중, 에너지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에너지 지역 자립과 자치의 분산형 재생가능에너지 체제를 지향하는 현재의 햇빛농업만이 우리들 자신의 건강을 보장해주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멈추게 해주고, 수많은 생명을 죽이는 농약 사용을 멈추게 해주고, 다국적 곡물메이저의 농업노예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거대한 기계문명의 물신화를 멈추게 해주고, 양극화를 멈추게 해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농업공동체의 형성과 지역의 도농연대를 통해 지역 자립과 자치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밑에서부터 실현해 나갈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를 통해 튼튼한 식량자급의 기지가 형성될 수 있게 된다.

현재의 햇빛농업을 실천하는 주체는 기업농이 아니라 당연히 소농 가족농일 수밖에 없다. 지역 자립에 튼튼하게 토대를 둔 가족농 중심의 식량자급이야말로 지금의 대규모 공장제 화학농업을 대체하는 유력한 대안이다. 우리는 이런 소농 가족농을 되살려야 한다. 이들의 협업이야말로 지역공동체를 되살려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는 지름길이다. 가족농의 경우 적정 규모는 3000평 정도이다. 우리나라 평균 농가 호당 경지면적은 대략 3500평이다. 우리는 이미 소농 가족농을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현재의 햇빛농업에 가장 근접하게 걸맞는 것이 지금 유기농이라는 이름의 무농약 농업이다. 우리나라 유기농업의 역사는 정농회의 발족과 함께 근 30년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생산비중은 0.05%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 나라들이 3%에서 10%인 것에 견주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기계농, 화학농의 대국인 미국의 0.1%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유기농도 석유를 이용한 유기농이라면, 그리하여 대규모 기업형 유기농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이는 말 그대로의 지속가능한 햇빛농업과는 거리가 있다. 기업형 유기농업 또한 우리의 목표가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역자립과 도농 간 지역연대의 공동체 형성과도 거리가 멀다. 최근 일부 대기업이 만주에서 대규모 유기농 단지를 조성하고 대형 할인점에서 유기농 농산물을 판매하면서 이른바 유기농 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앞뒤가 뒤바뀐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국적 곡물기업의 목표는 분명하다. 소농과 가족농을 말살시키고 기업농, 공장제 농업을 양성하는 것이다. 말이 좋아서 기업농이지 자신들이 생산하는 유전자조작 종자를 사서 자신들이 생산하는 농약을 치고 자신들이 고가로 팔 수 있는 지역으로 팔아먹는 농업노예들을 양산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 면에서 6㏊ 규모의 전업농 7만 호를 육성해 100㏊가 넘는 외국의 대농장과 경쟁시키겠다는 것은 소도 웃을 난센스의 정책이다.

집약농업과 공장제 축산은 그만큼 에너지 위기와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잦은 광우병과 구제역 파동, 최근의 조류독감 바이러스, 니파 바이러스 확산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런 집약농업과 집약축산 대신 분산농업과 분산축산이 뿌리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바다를 건너온 농축산물이 가격이 싼 까닭은 그만큼의 노동력 착취와 자연착취 때문이다. 이런 에너지 과소비의 농축산물 교역은 다국적 기업의 배만 불려줄 뿐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재앙일 뿐이다. 그 농축산물은 농약과 항생제와 각종의 화학물질이 뒤범벅된,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암 촉진제일 뿐이다.

***햇빛 농업으로 진정한 자립이 가능하다**

우리는 현재의 햇빛 농업을 통해 다국적 곡물기업에 예속되지 않는 소농 가족농 공동체와 지역의 도농공동체를 밑에서부터 건설해야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뜻있는 소수의 농민들에 의해 도시와 농촌의 연대가 모색되고 도농 직거래운동을 통한 유기농운동이 정착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20년 가까운 역사의 한살림생협은 이제 그 회원이 11만 명에 이르고 있고, 유기농 학교급식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농민운동은 자신의 핵심 과제로서 이같은 직거래운동을 지역 자치의 공동체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각종의 시민사회 조직과 직접 교류하는, 그리하여 대규모 농산물 시장에 종속되지 않는 생산과 소비의 도농 직거래 운동은 그 자체가 튼튼한 민주주의와 자립 자치, 식량자급의 기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이 진전될 때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과 분산형 에너지 자립 체제도 가능해지게 된다.

우리나라 대외경제의존도는 70%에 이른다. 세계화는 필연이 아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운명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지나친 대외의존도와 세계화는 나라경제와 지역경제를 지나치게 수직계열화해 외부의 충격에 손쉽게 무너지는 지극히 허약한 체질로 바꾸어 놓았고, IMF사태에서 경험했듯 사실상 위험경제, 위험사회로 전락시켰다고 할 수 있다.

완전고립과 자립의 아우타르키(Autarkie)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맹목의 세계화, 개방화 논리에 함몰된 외부 의존경제의 위험성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 말이 의존이지 그것은 사실은 눈먼 자원 착취, 비정하고도 끔찍한 나라 안팎 인민 착취의 고상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외부에 종속된 노예의 삶으로 바꾸어버린 이런 의존에서 탈피해 자립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민중경제다.

한때 군사독재 정부조차 경제개발정책을 시작하면서 자립경제를 목표로 내걸었고, 민주화운동 또한 대외의존을 탈피한 자립경제를 당연한 운동이념으로 내세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민주정부 들어 자립경제란 용어 자체를 시대착오의 전근대 개념으로 내팽개치고 경멸하고 있는 것은 근대화에 철저히 눈이 먼 민주화운동의 이념을 웅변해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하는 오늘날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서고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리면서 오히려 박정희 향수가 광범위하게 재생하는 것은 당연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자립경제는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이자 출발이다. 그리고 지금 이같은 자립경제는 현재의 햇빛농업을 통한 식량자급과 에너지 자립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내수 중심의 지역 자치 자립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지름길이다. 농민운동은 이제 이런 대안의 농업과 에너지 자립 체제의 구축을 실천하는 전망을 새롭게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세계화 경쟁력, 규모의 경쟁력 이데올로기를 밑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의제는 먹을거리의 안전성이다. 대규모 화학농법으로 만든 먹을거리는 거의 독극물 수준임을 농민운동은 제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우리 농민들부터 화학농업으로부터 현재의 햇빛농업으로 과감한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공장폐수와 생활하수 등으로 강물과 지하수를 오염시켜놓고는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마시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매연을 뿜어대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공기청정기를 틀어놓는, 참으로 이상한 정신병자의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영위하고 있다. 농민운동은 이같은 이상한 생활에 대한 문제제기부터 시작해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부터 그러한 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농민운동이 반미투쟁을 중심으로 해야 하느냐 반정부투쟁을 중심으로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때그때의 당면과제 성격에 따라 미국에 대해서도 정부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런 투쟁에 앞서 우리는 대안의 실천, 대안의 생활을 자신부터 시작하는 것이 시급하다. 1960년대부터 산업화와 함께 우리 사회에는 거대한 이농의 물결이 지속되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자그마치 1000만 명 넘는 농민이 도시로 도시로 살길을 찾아 무작정 상경했다. 이제 우리는 거대한 귀농의 물결을 조직해야 한다. 숨 막히는 도시노예를 벗어나 자유로운 노동의 연대를 꿈꾸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대이동을 준비해야 한다.

***학교급식, 군대급식을 햇및 농산물로 바꾸자**

농민운동은 운동방법의 변화 또한 모색해야 한다. 지금은 군사독재의 시대가 아니라 적어도 언론과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는 어느 정도 보장이 된 민주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민주화시대에 아무리 방어수단이라 하더라도 대중동원형 폭력 시위는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의 공감도 얻지 못한다. 폭력시위를 통해 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는 것은 국방의 의무 때문에 마지못해 거기 서 있는 젊은 전경들뿐이며 대중동원형 시위 때문에 불평이 터져 나오는 것은 교통체증에 짜증을 내는 일반 시민들이다. 도식화 되어버린 불타는 전경차와 피 흘리는 농민 식의 언론보도 탓을 할 게 아니라 실제 시위 형태를 철저한 비폭력 평화 노선으로 바꾸어야 한다. 생태적 전환을 추구하는 현재의 햇빛 농업은 뭇 생명까지도 살리는, 지극히 평화를 지양하는 농업 농민운동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치밀한 사전준비를 통해 군대급식을 유기농으로 바꾸라고 국방부 앞에서 평화로운 연좌시위를 하는 게 백배 낮다. 학교급식을 자연 순환형 햇빛 농산물로 바꾸라고 교육부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공연을 펼치는 게 훨씬 더 수많은 인민들을 감동시키고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도시의 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먹을거리의 안정성 문제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이 아토피와 각종의 도시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먹을거리만 깨끗하다고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지만 그러나 우선 당장 안전한 먹을거리라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와 군대 급식만 제대로 현재의 햇빛 농산물로 바꾸어도, 여기에 노동조합과 연대해 기업 급식까지 유기농으로 바꾸어도, 초중고 400만 명, 대학생 250만 명, 공무원 140만 명, 군인 60만 명, 기업까지 합하면, 이것만 하더라도 현재의 햇빛 농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은 충분히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급하기 위해 농민들이 싸운다는 데 외면하거나 반대할 부모는 이 세상에 없다.

이런 운동에 드러내놓고 반대할 언론이나 정치인, 기업인들도 사실 많지 않다. 여기에 들어가는 예산이라고 해봐야 비행기 몇 대 값이다. 솔직히 고속도로 1km 건설비용이 약 600억 원이다. 그리고 이제는 토건족만 살찌우는 더 이상의 도로 건설은 중지되어야 마땅하다. 바로 이런 예산이 우리 사회의 농업 농민 살리기에 투입되어야 한다. 농민운동은 이런 긍정의 건설과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과감하게 싸워나가야 한다. 이외에도 농민운동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도시농업, 주말농장 활성화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농업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인식을 도시인들에게 체험하게 해야 한다. 학교를 비롯 각종의 도시 공간에서 확산되는 현재의 햇빛농업 농지는 젊은이들의 산 체험장일 뿐만 아니라 귀농운동의 산실이 되기도 할 것이다.

저항과 방어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은 개척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 가운데 가장 휘발성이 강한 의제가 비정규직 문제와 농업문제다. 농민운동은 이제 대안의 농업 농민운동을 시작해야 하며 그것은 현재의 햇빛 농업과 농민운동에 대한 폭넓은 인민의 지지를 형성하는 일이자 생태적 전환을 밑에서부터 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농민운동은 아직도 충분히 그러한 긍정과 대안의 운동으로 전환할 힘이 있으며 그것이 역사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농민운동 선배들의 헌신에 값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주 미약한 실천일지라도 나부터 시작하는 실천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이끌어내는 나비의 날개 짓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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