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사회성이 문제 아닌가요?**
여름 장마가 끝나고 푹푹 찐다. 가만 앉아 있기도 힘들다. 이 더위를 먹고 벼는 이삭이 팰 준비를 하고, 콩도 꽃을 피우려 한다. 토마토가 붉게 익어간다. 호박덩굴에 애호박, 오이 덩굴에 오이가 참았던 꽃을 한꺼번에 피운다. 창 앞에 큰대자로 뻗어 낮잠을 달게 자는 남편 모습이 살살 나를 꼬드긴다.
엊그제가 보름이었다. 보름, 그것도 한여름 보름이라 사람의 양기가 밖으로 뻗치는 때다. 마침 먼 곳으로 이사를 간 이웃이 놀러 왔다. 놀러 온 김에 여기저기 기별을 해 동네 사람이 모였다. 한 동네 살아도 얼굴을 잘 못 보는데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이 노래 저 노래 밤늦도록 놀았다. 우리가 모인 집 주인은 손님맞이에 극진했다. 우리 마을은 생긴 지 칠팔 년 된 '새 마을'이라 마을회관은 따로 없지만 사람이 꼬이는 집이 있다. 그 집주인이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손님 대접이 극진한 집이다.
산골에서는 이웃과 오고가면서 서로 돕고 의지하고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 우리 집은 이웃이 많이 오는 집은 아니다. 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사회성이 그리 좋지는 않은가 보다.
이웃이 나보고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는' 타입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맞다. 그 동안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다는 걸 배웠다. 서로 다른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려다 보니 거리를 두고 받아들인다. 남편도 비슷해서 우리 부부는 서로 간에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내는 데 익숙하다. 농사일도 집안일도 돈주머니도 저 알아서 한다. 이웃과 술자리에 어울려도 끝장을 보기보다 기분 좋게 먹고 놀았다 싶으면 일어난다. 이웃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자립해서 살려고 한다. 누가 오면 반갑게 맞이하지만, 볼일이 없으면 잘 안 간다. 전화도 잘 안 하는 편이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집에서, 그것도 산골에서 외로이 지낸다면 사회성을 걱정한다. 어른은 저 좋아서 그렇게 산다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하냐? 아이들은 서로 어울려 지내며 자라야 한다. 우리 사회가 학연 지연이 얼마나 중요한데 아이들이 이 다음에 어찌 살아갈지 걱정도 안 되냐?
고마운 말씀이다. 나무는 보고 숲은 못 본다고 제2자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겠다. 그 말씀에 대해 나름대로 자기변호를 할 수도 있지만 그만 두련다.
아이들이 우리 같은 부모를 만나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걸 그대로 인정한다. 아이들 역시 사회성이 약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되어서 그래도 괜찮은가?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집에 있고나서 나도 모르게 배짱이 생겼나보다. 헷갈릴 때마다 단순하게 생각한다. '부모가 되어 함께 살아주고, 하루 세 끼 손수 해 먹여주면 되지. 거기다 아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주는데 그 이상 무엇을 어찌 하겠느냐. 다 자기 복대로 살아가지 않겠나,' 하고.
이 기회에 아이들에게 지금 생활에 불만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탱이는, "엄마 아버지가 싸우지만 않으면 이대로가 좋아요." 상상이는 근처에 운동장이 없어서 운동을 제대로 못하는 거, 컴퓨터에 대해 잘 몰라 인터넷이 들어왔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거를 꼽는다. 그리고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스트레스는 없는데 한달에 한두 번 특히 손님이 왔다 갈 때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있단다.
***부모노릇을 적당히 미룰 수 없어**
사회성이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니 '사회생활을 하려고 하는 인간의 근본 성질. 인격 혹은 성격 분류에 나타나는 특성의 하나로, 사회에 적응하는 개인의 소질이나 능력, 대인 관계의 원만성 따위이다.'
이러한 사회성은 아이가 자라는 일상에서 형성되어 동심원이 넓혀지듯 이 사회로 넓혀지겠지. 아이에게 가장 기본일상은 가정생활이다. 먹고 싸고 자고. 이 모든 걸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집과 식구. 학교에 다니면 학교생활도 일상이 된다. 그런데 탱이가 학교 다닐 때를 돌이켜 보면 가정생활이 든든하지 않으면 학교생활에 끌려 다니기 쉽다.
그밖에도 아이들은 나름으로 사회생활도 한다. 동네 이웃과, 대가족 속에서, 가게에서 무얼 사고, 은행에 용돈을 저축하고 인터넷에서 세상을 만난다. 가정과 학교를 넘어 이 사회를 보고 배운다.
집에서 공부하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당연히 학교생활이 없다. 학교생활이 빠지면 그만큼 가정생활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아이들이 자라는데 가정생활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면 그건 엄마 아버지 몫이 커진다는 소리인가. 부모가 교사가 되어 가르치고 친구가 되어 놀아주어야 하는가.
아니다. 그럴 자신도 없고 필요도 못 느낀다. 다만 부모 노릇을 적당히 미룰 수 없다. 시골 살다 보니 밥 챙겨먹기 귀찮아도 사 먹을 수 없고 손수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해본 사람은 안다. 하루 세 끼를 꼬박 마련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귀찮아도 나도 먹는 거니까. 그 덕에 나도 건강해질 테니까 하면서 한다.
공부는 교재가 좋으니 스스로 알아서 한다고 넘어가고. 그럼, 친구는? 또래끼리 주고받는 무언가가 빠지지 않나? 그런 아쉬움이 있다. 실제로 날마다 친구를 만나다가 못 만나니 탱이는 의기소침해 있었고, 상상이 역시 한동안 심심해 어쩔 줄 모르기도 했다. 하나가 빠진 빈 자리를 확인하고 확인했다.
그렇게 보낸 몇 년. 그 대가로 아이들은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먹고 자고 싸고. 그러더니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게 무언지,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무언지를 하나하나 알아나간다. 여기서 싸는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려 한다.
***아침에 똥을 누고 나서 하루를 시작해야**
탱이가 서울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가 떠오른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 탱이가 멀쩡하게 돌아오다 우리 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까지 가는 사이에 갑자기 어쩔 줄 모를 만큼 급해진다. 그때까지 긴장해서 몰랐다가 긴장이 풀리는 순간 몸이 신호를 하는 거다.
그러다 탱이가 학교를 그만 둔 첫 해. 아침 먹고 치우고 둘이 공부하려고 마주 앉곤 했을 때. 둘이 마주 앉아 공부를 하다 보면 슬그머니 뒤가 마렵다. 잠깐! 하고 뒷간에 다녀오면 다른 하나가 뒤이어 다녀온다. 공부 하다가 자유롭게 뒤가 마려울 수 있는 이 편안함. 이렇게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는 게 신기했고, 뒷간에 다녀오면서 행복했다. 나나 탱이나 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갈 준비하느라 아침에 볼일을 보지 못했고, 학교에 가서는 언감생심 뒤가 마려울 수가 없지 않았나! 그 긴장이 풀어지며 몸이 자연스레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신호. 그 신호가 따스한 겨울햇살처럼 우리를 감쌌다.
그 뒤 상상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나는 이 부분에 집중했다. 상상이는 똥을 누고 학교에 갈 수 있기를….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상상이는 똥 누는 시간이 좀 길고 아침을 먹기 전에 신호가 오는 날도 있지만 아침밥을 먹다 신호가 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 가기 시작하자 학교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 긴장해야 한다. 만일 똥을 누느라 시간을 보낸 날은 빨리빨리 숨넘어가게 준비해야 학교버스를 탈 수 있었다. 아. 똥 누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이제 아이들이 집에 있으니 아이들 몸이 신호하는 대로 자연스레 똥을 눌 수가 있다. 몸이 자유를 얻고 나서 아이들이 많이 편안해졌다.
***기운이 자라 넘치면 저절로 세상으로**
탱이는 몇 년 집에 있으면서 자기 자신부터 추슬렀다. 자기 중심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지난해부터 탱이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을 지낸 탱이가 하는 말이, "만나는 사람마다 친구가 없어 외롭겠다는 소리를 어찌나 했는지 한동안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에 운영자도 해보고,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모인다고 하면 거기도 가보고. 친구들끼리 우르르 몰려 시외버스 뒷자리에 앉아 여행도 다녀보고, 인터넷에서 사귄 친구를 만나러 제주도로 날아가보기도 했다. 탱이는 전국에 친구들이 생긴 기분인가 보다. 탱이를 보면 친구가 몇 명이냐, 얼마나 자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 하는 양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서로 공유하는 느낌. 거기에 달린 듯하다.
그리고 하나 더. 탱이 말이 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친구와 사귀었다면 학교를 그만 두고 나서는 사람 사귀는 폭이 넓어졌단다. 탱이를 보면 같은 학년이 아닌 여러 사람을 폭 넓게 두루 사귄다. 학교 문을 나서니 한두 살 차이는 그냥 친구다. 열 살쯤 위인 사촌 언니 오빠 심지어 형부하고도 잘 논다.
그럼 상상이는 어떤가? 탱이가 그렇게 움직이니 상상이 제 누나 영향을 받을 법하다. 누나가 집을 나가 있으면 상상이도 조금 흔들린다. 그러나 상상이는 어디를 가겠다든가 하지 않는다.
옛말에 '수신제가'라는 말이 있다. 상상이는 자신이 '수신' 할 때라 생각하나 보다. 사람이 똥 누고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몸이 준비되었을 때 집밖으로 나갈 수 있듯, 아이가 자기 기운을 기르고 그 기운이 자라 넘치면 저절로 이 세상으로 나아가리라.
아이가 집에 머물고 싶어 하는 동안 부모인 우리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형편인 것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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