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는 나와야……**
큰 애가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니다 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 초등학생인 작은 애도 따라서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한다. 그때 큰 애들은, "초등학교를 그만 두냐? 야, 나는 초등학교는 잘 다녔다."
그러나 손위 형제가 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서 잘 지내는 걸 본 동생들은, 자기들도 집에서 공부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큰애가 학교를 그만 둔 집은 줄줄이 동생들까지 학교를 그만 두는 일이 생긴다.
상상이 역시 그랬다. 자기 누나가 집에서 잘 지내는 걸 보았으니 그 영향을 받았겠지. 학교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다녀야 하는 건 줄 알면 싫으나 좋으나 학교에 다닌다. 아니 학교를 그만 둔다는 건 상상할 수 없고, 아기가 태어나면 젖을 빨 듯 학교란 당연히 다녀야 하는 곳이다. 탱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랬다. 세 번을 옮기며 여러 학교를 다녀야 했지만 그때그때 잘 적응하고 재미있게 다녔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든가 아니든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아니 상상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 있는 걸 선택한 거다. 상상이는 누가 무슨 말을 해서가 아니라 직감으로 그걸 안 것 같다. 한번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난 뒤 상상이는 흔들림 없이 잘 지내는데 오히려 내가 가끔 흔들린다.
탱이를 보면 눈치껏 집안일을 돕는다든가, 세상 돌아가는 문리를 나름대로 알아 어디를 보내도 걱정이 없다. 상상이가 탱이 같지 않을 때 나도 모르게 '초등학교를 안 다녀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탱이와 상상이가 일곱 살 차이에, 남자 여자가 다르기도 하고, 아이마다 성격도 기질도 다르니 초등학교와는 상관이 없을 텐데도 그렇다. 아이를 어떻게 초등학교도 안 보낼 수 있느냐는 질책을 들을 때면 더 그렇다.
사람이 태어나 자라면서 사람 손길을 받고 이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 익혀야 할 약속이 얼마나 많은가. 밥은 이렇게 먹어라, 옷은 이렇게 입어라, 말은 이렇게 해라, 이 물건은 어디에 두어라, 몇 시까지 해야 한다……. 상상이 역시 태어나 자라면서 수없이 길들여졌겠지만 아직 야생마 같은 데가 남아있다.
사람의 장점이 반대로 단점이 된다. 농사짓고 살아가다 보니 몸을 많이 움직여 몸이 좋아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일하다 보면, 쓰는 부위만 지나치게 쓰게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수벽치기라든가 요가를 해 보면 몸에 불균형을 느낄 수 있다. 상상이 집에서 자라는 일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아이에게 일장 훈시를 하거나 잔소리를 퍼부어 댄다. 그리고 나면 아이는 내 눈치를 흘깃흘깃 보기만 하지 고쳐지지는 않는다.
내가 힘들어하면 남편은 내게 아이한테 물어보라고 한다. 자기 일이니까 아이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그런데 나는 그게 잘 안 되고 혼자 흥분하곤 한다. 아마도 '내가 해결책을 내놓으면 아이가 따라주면 얼마나 좋으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이번에도 <프레시안>에서 독자 댓글을 보고 한동안 끙끙 앓았다. 아이가 학교에 안 가는 일이 그렇게 잘못인가.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아이가 학교에 안 가는 건가 부모가 안 보내는 건가? 나는 만일 아이가 앞으로 아이가 학교에 가겠다면 보낼 건가까지 생각해 보았다.
취학의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학교에 다녀야 하는 취학'의무'는 군대에 가야하는 병역'의무'와는 다르다. 병역의무는 나라를 위해 개인이 해야 하는 의무이고, 취학의무는 아이를 위해 국가와 부모가 해주어야 하는 의무다.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처벌받거나 강제로 학교에 등교시키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래도 내 안에 찜찜한 건 남아있다. 왜 그럴까? 내가 상상이에게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불만이 무어냐면, 공부를 너무 안 하는 것 같아서다. 내가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오지만 사실이 그런 걸…….
상상이 글쓰기를 안 하려 한다. 아니 도통 연필을 잡고 쓰려고 하지 않는다. 책은 폭넓게 읽는데 글을 쓰는 건 아주 싫어한다. 그게 늘 불만이었다가 <프레시안> 독자 댓글을 보고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도 일장연설을 시작하려다 그쳤다. 그리고 이 엄마가 얼마나 훌륭한 선생일 수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상상이 "그래요?".
남편 말을 떠올려 상상이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상상이는 자기 역시 찜찜했단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한 쪽이라도 글쓰기 공부를 하기로 했다. <프레시안> 독자의 따끔한 질책 덕에 해묵은 숙제를 풀 수 있으려나?
***아이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는가?**
공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더 해 보자.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가 학교에서처럼 시간표를 짜서 수업 진도 나가듯 공부를 할 수 없다.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는 걸 제대로 살리려면, 아이가 스스로 공부를 해야 제 맛이다.
공부를 한 시간을 해도 제가 좋아서 하면 얼마나 효과가 좋은가. 게다가 삶에서 필요한 걸 공부해 그때그때 실천하면 더욱 좋다. 내게 그런 공부가 어떤 거였나? 운전을 하기 위한 공부, 농사 공부, 글쓰기 공부……. 솔직히 학교 교과서 공부는 아니었다. 탱이가 유치원 다닐 때 공부가 취미였다. 그러다 초등학교 들어가니 재미가 사라졌다. 기왕 해야 하는 공부. 조금이라도 재미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했다. 배고프지도 않은 아이한테 화려한 밥상을 차려준 셈이다.
탱이는 그렇게 6년을 지냈기에 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 있기 시작한 뒤 1년 혼자 공부하는 법을 가르치니 그 뒤부터 알아서 잘 한다. 하지만 상상이는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를 하는 습관이 안 들었다. 그런데 공부는 꼭 책상머리에 앉아 해야 하는 건가? 공부란 무언가?
격월간지 <민들레>에서 호주에서 홈스쿨링 하는 집 이야기를 본 기억이 난다. 그 집 엄마 말이 아이들이 한동안 한 가지에 푹 빠져 지내다 다른 걸로 옮겨간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을 봐도 그렇다.
상상이 지금은 바둑에 푹 빠져서 지낸다. 나는 바둑을 모르니 상상이 바둑 실력을 가늠할 수 없지만, 날마다 신문을 오려 혼자서 따라하고 다시 응용하고. 바둑에 관계된 책을 벌써 여러 권을 외우다시피 공부한다. 어린이 책이 아닌 일반인 책들이다. 그 책을 이해하고 실제 바둑을 두는데 응용을 하는 걸 지켜보면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가 잡혔다.
신문에서 19단 외우기가 논란이 되고 있다. 상상이는 19단이 어떤 건지 궁금해 기회가 되면 그 책을 보고 싶다고 한다. 그러니 상상이가 구구단을 알게 된 과정이 떠오른다. 나는 탱이건 상상이건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구구단을 가르치지 않았다. 상상이 집에서 공부하던 첫해, 제 아버지가 산에 나무하러 가는데 쫒아가 나무를 하다 구구단 원리를 들었나 보다. 한껏 자랑을 하기에 그럼 네가 구구단 표를 한번 만들어 보라고 했다. 상상이 컴퓨터에 앉아 2*2부터 9*9까지 제 손으로 구구단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구구단의 원리를 터득했다. 그러나 구구단을 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2단부터 9단까지 외우라고 해도 안 한다. 처음에는 수학문제를 풀 때 구구단의 원리를 따져 답을 냈다. 문제를 풀 때마다 원리를 따져서 풀려니 귀찮지. 자주 나오는 것부터 토막토막 외워나가 다 외웠다.
남편은 3년째 <어린이신문 굴렁쇠(www.hikid.net)>에 '시로 쓰는 농사일기'를 연재하고 있다. 주간신문이니 한 주일에 한 편씩 시를 써서 실어야 한다. 남편은 시를 써서 우리 식구 모두에게 보여주고 도움말을 듣는다. 처음에는 내가 한 몫을 했다. 그 다음에 탱이가 한 몫을 했다. 탱이는 제 아버지 시를 보다 보니 학교 때는 시를 싫어했는데 점점 좋아진다고 했다. 이제는 상상이가 한 몫을 한다. 상상이 또래 아이들 보라고 쓰는 시이니 상상이의 도움말이 가장 좋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렇게 책을 읽고, 어른이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워 따라하면서 그 원리를 터득해 가고, 스스로 호기심을 가지고 한 가지를 탐구하는 게 공부라면 상상이는 공부를 제법하고 지낸다. 머리로 아는 것만 많은 게 아니다. 삽으로 땅을 파고 망치로 못을 박는 일은 제법이다. 네 식구가 힘을 모아 아래채를 짓고 있는데 구들 놓으려 개자리를 만들며 구들의 원리를 생각하며 물리공부를 한다. 산에서 나무, 들에서 들꽃을 나름대로 볼 줄 알고 짐승도 잘 돌본다.
그러나 교과서를 읽고 문제를 푸는 게 공부라면 상상이는 공부는 하나도 안 한다고 봐야 한다. 책상 앞에 앉아 받아쓰고 문제 풀고 하는 공부는 수학 과목만 가끔 한다.
우리는 학교에 교과서를 주십사 했다. 학교에서는 상상이에게 교과서를 준다. 지난해에는 참고서까지 주었다. 교과서가 오면 상상이 그걸 방안 가득 펼쳐놓고 보다가 자기 방안 책꽂이에 잘 꽂아놓고 꺼내본다. 요즘 교과서가 얼마나 잘 만들어져 있나. 음악책을 꺼내 애국가를 부르기도 하고, 국어책을 꺼내 동화를 읽기도 하고 참고서를 보고 문제를 풀어보기도 한다. 그 가운데 차근차근 교과서 진도를 따라가는 건 수학이다. 수학은 나름대로 재미있나 보다. 혼자서 교과서를 보고 문제를 풀어나간다.
상상이가 저 혼자 교과서를 다 풀고 난 뒤 내가 들여다볼 때가 있다. 그러면 상상이만의 공부 방법이 보인다.
상상이는 기본 원리를 공부하는 대목에서는 꼼꼼히 공부한다. 여기서 막히면 한 동안 쳐다보지 않고 미뤄 놓는다. 얼마 뒤 다시 도전해 술술 풀리면 한달음에 교과서를 다 풀어 버린다. 공부한 걸 보면, 연습문제는 풀고 검산을 하며 채점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상상이는 몇 개 맞았나만 보고 넘어간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은 자기 기준이 있나 보다.
나는 여기서 잠깐 갈등했다. 틀린 거를 다시 풀어 정답을 찾도록 해야 할까? 한두 번 해보다 그만 두기로 했다. 아이가 기본 원리를 아는 건 분명한데 틀린 거를 다시 풀어 모두 정답을 찾도록 하는 건 '백점' 정신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닌가.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칠 것도 아니고, 아이가 스스로 수학을 재미나게 공부해 나가는데 백점을 요구해야 할까?
아이가 집에 있으니 전에는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까지 하나하나 새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남들 가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몫이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학교에 의지하고 살았는지,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니 그걸 실감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아이가 혼자 공부가 될까? 하는 근본 물음부터 공부란 무엇인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까지. 초등학교 나이의 상상이를 집에서 지내게 하려니 새롭고 새롭다. 이 새로움이 나를 젊어지게 하지 않을까!
(이번 글로 '산골 아이들'의 4부가 끝납니다. 프레시안은 '산골 아이들' 필자인 장영란 선생이 참여하는 대담을 준비 중입니다. 또 '산골 아이들'에서 보여진 교육에 대한 독자들의 소중한 의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필자 소개**
무주 산골에서 자급 농사를 하며 자연에 눈 떠가고 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맛을 나누고 생각이 서로 이어지는 이와 만나고 싶어 틈틈이 글을 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을 두루 할 수 있는 전인이 되고 싶다. <자연달력 제철밥상>(들녘 펴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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