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아이들'이 오늘부터 4부 '차라리 무학(無學)'을 시작합니다. 편집자.
***상상이, 또 다른 개성**
상상이는 탱이와 또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탱이는 서울 반쪽, 산골 반쪽이라면 상상이는 아기 때부터 산골서 자랐다. 돌투성이 길에서 걸음마를 익혀 백화점 1층 매끄러운 바닥에서는 미끄러졌다. 상상이에게는 면소재지도 번화한 곳이다.
탱이는 집 앞 백화점을 좋아하며 자랐다면 상상이는 고속도로 휴게소를 좋아하며 자랐다. 상상이가 제법 말을 할 때다. 서울에 갔다가 만화영화를 보고 나서 옆에 있는 패스트푸드 점에 들어갔다. 감자튀김을 먹고 나자 상상이 뛰어서 계산대로 가더니 거기 일하는 직원에게 뭐라 한다. 직원은 아이 말을 못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상상이 다시 이야기했다.
"잘 먹었습니다."
우리가 살던 곳은 사람 귀한 산골. 집주인이 우리에게 집을 공짜로 빌려주고, 이사 간 날 점심을 차려 주셨다. 그런 곳에서 자라는 상상이는 먹고 나서 인사를 하는 게 자연스런 일이었겠다.
손에 작대기 하나 들고 돌아다니고, 들에 가면 이것저것 주워 놀잇감으로 삼아 놀았다. 아이 곁에 낫, 톱, 망치 같은 연장들이 있고 때로는 그걸 가지고 놀았지만 다치지 않았고, 밭을 지날 때는 고랑으로 다닐 줄 알고, 논을 지날 때는 논둑으로 다닐 줄 알았다.
상상이 막내에 늦둥이지만 시골서는 아이도 돌보아야 할 게 있다. 강아지 데리고 놀고, 작대기 하나 들면 다 큰 개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침, 저녁으로 토끼에게 풀 해다 주곤 해서 풀잎을 보면 한 입 먹어보고 토끼가 좋아하겠다며 뜯어다 주고, 저녁이면 누나랑 닭들을 닭장에 몰아넣었다. 자그마한 어린아이도 집짐승 앞에서는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오줌 마려우면 과일나무에 거름으로 주며, 똥 누면 강아지가 달려와 먹는 줄 안다.
어쩌다 아파트에 가 승강기를 타면 단추를 누르고 싶어 하는 촌놈. 서울 가는 길에 집에서 신던 노란 장화를 신고 가 지하철에서 지나는 사람에게 '비 오느냐'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네가 농사한 쌀로 밥 해 먹는 줄 알아 서울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밥을 먹느냐고 걱정을 했다.
한마디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환경에서 자란 셈이다.
***어린이집**
상상이 다섯 살, 탱이 5학년 때 우리는 새집을 짓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집을 지어보고 싶고 또 한 푼이라도 절약을 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하루 종일 집짓기에 나서야 했다. 새벽밥을 먹고 나와 하루 종일 집터에서 일을 하고 틈틈이 농사일도 해야 했다. 어서 내 집을 짓고 살고픈 마음이 앞섰던 거다. 지금 생각하면 좀 느긋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을 그때는 왜 그리 악착같이 했는지….
그렇게 하려니 상상이를 데리고 할 수가 없었다. 이 참에 상상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상상이는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고 우리는 집을 짓고. 아침에 누나 따라 학교 버스에 태워 보내면 누나가 동생을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 누나 따라 학교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되겠네! 산골에 살아도 다 길이 있네!
탱이는 꼬마 엄마처럼 동생을 데리고 다녔고, 동생은 끝없이 누나 잔소리를 들으며 다녀야 했다. 상상이는 자고 나면 머리가 모두 일어서 뻗친다. 그런 상상이 모습을 탱이는 창피하다 했다. 그래도 집안 사정이 그리 꽉 물려서 돌아가니 아이들은 투정 한번 제대로 못 해 보고 함께 돌아가야 했다. 아이들 덕에 그해 연말 새집으로 이사를 갔다.
봄이 되자 나는 상상이를 다시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었다. 거기서 또래를 사귀고 사회생활을 익히게 하겠다는 명분이었다. 그 속에는 아이를 보내고 나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하는 내 욕심이 깔려있었다. 아이가 다시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한 날, 나는 산 위에 있는 친구네 집에 놀러가 '자유'를 노래했다.
아이를 유치원이나 학교에 보내려면 엄마가 꽤 노력을 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처럼 지역공동체 속에 들어온 낯선 사람이라면 더욱 노력을 해야 하겠다. 또래들 엄마들과 사귀고 아이가 친구들과 사귀 수 있게 뒷배를 봐주고. 그런데 나는 그렇게 못했다. 여기 산골은 연고사회다. 웬만하면 친척이고, 그렇지 않아도 동창, 친구, 선후배다. 그 엄마들은 오래도록 삶을 나누며 살아왔다. 게다가 나보다 한참 어리고 살아온 이력이 너무 달라 공감대를 찾기 어려웠다. 나는 그 분들과 사귀지 못하고 겉돌다 말았다. 그저 어쩌다 마주치는 선생님들에게 인사나 잘할 뿐이었다.
탱이가 6학년이니 상상이는 제 누나를 따라 갈 수 있었지만, 아침에 준비를 못해 늦어지는 날이 자주 있었다. 그런 날은 내가 태워다 주고, 나간 김에 시장도 보고 들어왔다. 귀찮아하면서 또 그 김에 바람도 쐬었지, 아이가 왜 늦어지는지 헤아려 보지 못했다.
상상이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 피카추, 탑블레이드 이런 것들이 한창 유행을 했던 때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안 보고 사는데다 그런 문화는 버렸으면 했으니 나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하지만 상상이는 그맘때 또래들이 가지고 노는 게 얼마나 부러웠겠는가.
그 작은 아이들 무리에서도 따돌림은 있었던지. 상상이는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았나 보다. 다만 짝꿍과 사이가 좋아 어린이집을 다녔다. 우리는 아무 연고도 없으니 누구 하나 귀띔해주는 이 없었고 나 역시 귀 기울이지 못했다.
***나 유치원 안 가면 안 돼요?**
혁명 전야인 그해 겨울. 봄이 되면 탱이는 중학교에 가야했고, 상상이는 병설유치원에 가야 했던 겨울. 혁명의 불꽃은 상상이가 제 아버지에게 던진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나 유치원 안 가면 안 돼요?"
그 말이 남편 가슴을 울렸고, 상상이는 제 말을 들어주는 아버지에게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둥그런 책상에 둘러앉아 있는데 아이 하나가 책상 밑에 들어가 장난을 치더란다. 그러니 다른 애 하나가 상상이에게 그 아이를 말리라 했나 보다. 상상이 그 아이를 말리러 책상 밑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상상이에게, "쓰레기래요. 쓰레기래요", 했단다. 이때 상상이는 자기는 힘이 약하니 대들 수 없다고, 자기는 주먹도 약하고 힘도 없고…….
남편은 아이의 말에 공감했고, 아이들에게 과연 학교는 필요한가를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상상이에게 물었단다. 유치원 안 가면 심심할 텐데 그래도 괜찮나 하고? 엄마 아버지는 친구들처럼 놀아줄 수는 없으니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냐고? 상상이는, "노력해 볼게요."
상상이 그래서 유치원에 가지 않기로 했고, 두 달 뒤 탱이가 중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서 지내기에 이르렀다.
그때만 해도 상상이를 보면 긴 방학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심심하지. 엄마 아버지는 일하러 나가고, 누나는 방에서 책만 읽고 상상이는 많이 심심해했다. 짧은 기간이면 함께 어디를 놀러가거나 참고 기다리면 되겠지만 그날그날이 이어지니 더 심심했을 거다.
또래와 놀 기회를 준다고 상상이를 데리고 다녔다. 두 살 어린 동생네 놀러갔더니 그 동생과 서로 잘 어울려 놀았다. 그 동생과 놀고 싶은 마음에 상상이 혼자서 놀러가 보겠단다. 상상이 전화를 걸어 놀러가도 되는가, 확인했다. 그러느라 숫자를 공부했다.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등에 매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혼자 길을 떠난다. 2㎞가 넘는 거리. 아이가 혼자 가기엔 만만치 않은 거리다. 가다가 아랫마을 할머니를 마주치면 인사하고 '어디가?', 하고 물으면 대답하고. 할머니들은 아이가 혼자서 길을 가니 자꾸 물어보신다. 다시 인사하고 대답하고. 아랫마을을 지나 인적이 없는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멀리서 그 집이 있는 동네가 보인다. 그러면 다 온 것 같지. 산골길은 거기서도 한참을 걷는다.
그렇게 놀러 다니는데 하루는 그 동생이 공부를 시작했단다. 학습지 선생님이 오시고, 그러면 동생은 공부하러 들어가고. 상상이는 집에 돌아왔단다. 한동안 이렇게 동생네를 놀러 다녔다. 이제는 누가 놀러오면 잘 놀지만 부러 놀러가지는 않는다. 또래 손님이 온다면 기다리고, 우리가 놀러가는 곳에 또래가 있다면 기대에 부푼다. 사람이 귀하니 한번 만나도 오래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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