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또래가 하나 있으면……**
우리가 빈집을 빌려 살던 마을은 열댓 집이 사는 작은 산골 마을이다. 우리나라 어느 농촌이나 그렇듯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신다. 형님뻘인 반장님네 아이들이 대학을 다닐 때였다. 마을 어른들은 오랜만에 동네에 아이들 목소리가 들린다고 좋아하셨지만, 우리는 동네에 우리 아이들 또래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탱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라고 탱이 친구들을 우리 집에 부르곤 했지만, 멀고 교통이 불편한 우리 집까지 아이들이 놀러 오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생일 초대에 반 아이들 대부분이 와주었다.
탱이 5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어느 날 누가 "여기 탱이 학생 집이지요", 하며 집으로 들어온다. 누굴까? 학교에서 주는 우유란다. 어찌된 일인가. 알고 보니 탱이는 학교에서 무료 우유 급식을 받는 대상으로 뽑혔단다. 그때는 우리 사회가 IMF 사태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을 때다. 선생님이 집이 어려운 친구를 추천하라 했더니 탱이 생일에 왔다간 친구 하나가 탱이를 추천했단다. 그 덕에 나라에서 주는 공짜 우유를 받아먹을 수 있었다.
그때 우리 사는 모습이 탱이 친구 눈에는 아주 어려워 보였나 보다. 마을 어른들도 우리가 도시서 망해 먹고 시골로 왔다고 생각을 했고, 탱이 역시 우리 집이 아주 어렵다고 생각을 했단다. 엄마 아버지 아무도 돈을 안 벌고 쓰기만 하니까.
남의 눈에만 어렵게 보인 건 아니었겠다. 그때 우리 자신이 어렵게 살았던 거지. 어떻게든 이 곳에서 농사로 뿌리박고 살아보고자 애를 썼으니까. 첫 농사를 무사히 갈무리하고 이듬해는 집을 지어 이사를 갔다. 사람 꼴을 갖추기 시작한 거다.
탱이 6학년에 올라가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듯 활기차게 학교를 다녔다. 선생님이 기합을 주면 자기들이 얼마나 재미있어하며 했는가를 탱이 신나서 이야기한다. 그때 담임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는데 단 한 가지 탱이가 질색을 하는 말이 있었다.
"너희들 부모님께 말씀드려 하루라도 빨리 도시로 나가라.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했어."
선생님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고 실제로 아이들이 하나씩 도시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부모가 대학 나온 아이, 돈 좀 있는 집 아이, 공부 잘 하는 아이……. 탱이는 "그럼 나는 뭐야? 서울서 살다 시골로 왔잖아", 친구들도 서로서로 촌놈, 촌년 이렇게 흉보고, 신발 하나라도 도시 나가 샀다고 자랑한단다. 시골은 자신을 낮추어 보고 도시를 우러르고 어떻게든 도시를 쫒아가려 한다.
탱이는 학교 전체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집 딸이었다. 그러기에 마을에 또래가 없었던 게 다행일 수 있었다. 만일 또래가 있었다면 탱이는 집에 와서도 학교 문화의 연장으로 살았으리라. 동네에 또래가 없었기에 탱이 학교에서는 학교 생활을 했지만, 집에 와서는 부모와 함께 지내며 자연을 하나하나 배우며 기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때로는 모자람이 복이 되기도 한다.
***졸업 앞 둔 6학년 겨울방학**
탱이 자라면서 학원에 다닌 적이 없다. 아, 서울 살 때, 피아노 학원을 몇 달 다니긴 했구나. 서울 살 때는 학원에 안 가려면 노력을 해야 했다. 친구들 대부분 학원을 서너 개씩 다녔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도 학원을 보내는 분위기였으니까.
분교에서는 학원이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면소재지로 옮겨오니 탱이 친구들은 학원을 다니거나 학습지도 받아서 풀곤 했다. 그러나 탱이나 나나 따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탱이가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에 들어갔을 때, 하루는 내게 영어학습지를 시켜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걱정되었나 보다. 탱이가 내미는 신문 광고에 보니 영어학습지에서 '무료 일주일 체험'이 나와 있다. 그리로 전화를 해 학습지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탱이 실력을 테스트하더니, 겨울방학에 바짝 공부를 해야 한단다. 그러려면 한달에 십 만원. 가만 계산해 보니 일년에 백만 원쯤 내야 되겠다.
내가 농사지어 백만 원을 버는 것보다는 탱이를 가르치는 게 더 경제적이겠다. 그래도 자신이 없어, 이웃에 영어를 잘 하는 이가 있나 찾아보았다. 그러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보자. 영어라면 손사래를 치며 영어에서 소외되었던 나였지만, 용기를 내고 말았다.
1970년대 고등학교, 대학을 다녔으니 영어는 죽은 영어였다. 학교 선생님이 읽어주는 대로 따라 읽고 해석하고 문제 풀었다. 녹음된 발음을 듣는 건 그때는 없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교과서만 벗어나면 영어는 깜깜절벽이었다.
나부터 새롭게 공부한다고 마음먹자. 이웃집에 있는 영어 공부 방법 책을 빌려다 보기도 하고, 책방에 가서 영어 교재를 찾아보았다. 좋은 영어 교재는 이 세상에 넘쳐났다. 그 가운데 내가 하고픈 공부 방법을 찾아 탱이와 함께 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치우고 겨울햇살이 따스한 마루에 둘이 앉아 영어공부를 했다. 공부를 하다 수다로 이어지기도 했고, 한창 공부하는데 하나가 뒷간에 볼일을 보러 가면 다른 하나는 길게 누워 해바라기를 했다. 한가하고 따스한 공부시간이었다.
살면서 나름대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딸과 둘이 영어 공부를 새롭게 시작하는 맛은 색달랐다. 그 덕에 자신감을 많이 되찾았다. 공부하고자 하면 이 세상에 널린 교재를 하나 정해 꾸준히 하면 되겠구나. 산청 살 때 보았던 자매의 모습을 우리에게서 보았다.
***자연에서 살 이유가?**
탱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때 탱이 친구들, 그 부모들을 만나면 주된 화제는, "중학교를 어디로 가는가?"
누구는 전주로, 누구는 대전으로 눈에 보이게 빠져나갔다. 탱이는 면에 있는 중학교로 올라갔다. 한 학년이 40명인 작은 중학교. 강당에 전교생과 학부모가 모여 입학식을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 학교버스가 없다. 군내버스를 타고 다니려면 아침 6시, 저녁 6시 반에 타야했다. 차를 타면 금세니, 7시도 안 되어 면에 떨어져 학교 문을 여는 8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초등학교 버스를 탈 수 있게 해주거나, 군내 버스 시간을 조종해 달라고 여기저기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 되었다.
산골 3월초는 눈이 오고 된서리가 하얗게 내린다. 6시는 깜깜하지. 그때 버스를 타고 나가라 할 수 있나. 집에 차로 아이를 데려다 주는 수밖에. 집 앞 길이 빙판이니 멀리 큰 길에 차를 세워놓고, 둘이서 잰걸음으로 거기까지 가서 앞 유리창에 낀 성에를 닦고,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조심 운전을 해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학교는 4시면 끝났다. 그때부터 6시30분까지 기다려야 집에 오는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러니 아이는 학교를 마치면 집으로 전화를 했고 그러면 데리러 가곤 했다. 아침에 한번, 오후에 한번. 나는 자가용 운전기사 노릇을 하려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탱이는 늘 미안해했다. 학교 다니기 힘들어라!
탱이 중학교에 입학하니 새로운 얼굴도 있더란다. 면에 있는 분교에서 온 친구들이다. 그 아이들까지 합해 한 반에서 학원을 안 다니는 애는 탱이까지 단 둘. 학원의 좋은 점은 끝나고 집에까지 데려다 준다는 점. 그러나 학원을 다니려면 저녁을 사 먹고 보통 때는 9시, 시험 때는 열시까지 공부를 해야 한단다.
우리가 왜 여기 사는가? 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탱이 아침에 해 뜨기 전에 학교 가서 저녁에 해 지고 집에 온다면 자연에 살 이유가 없었다.
***이 사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거 아냐?**
내가 탱이와 영어공부를 하며 잃었던 자신을 되찾던 그해 겨울. 남편은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러더니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도 잘 키울 자신이 있다 했다.
그러나 나는 막상 학교를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의 일로 여길 때는 몰랐는데 막상 학교를 그만 두려니 이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일처럼 여겨졌다. 어쩜 이 고비를 넘기면 그런대로 잘 다닐지 모르는데, 섣불리 학교를 그만 두었다가 영영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두렵고 두려웠다. 산청 살 때 본 자매, 우리보다 먼저 귀농한 집 가운데 중학교부터 학교를 보내지 않는 집 하나하나 떠올리며 용기를 가져 보려고 했다. 존경하는 선생님을 찾아뵙고 의논도 드렸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만에 하나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탱이가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리고 집안 어른들께는 뭐라 하나? 이웃에게는?
남편은 한번 마음먹자 용기 있게 나갔고, 나는 절절매며 어쩔 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자주 다투었다. 탱이가 "내 일로 엄마 아빠가 싸우니 돌아버리겠어요. 내게 맡겨 주세요. 내가 결정할 게요", 그렇다. 탱이 자신의 일이었다. 탱이가 어찌 결정할지 두고 보는 수밖에.
탱이 드디어 결정을 했다. 1학년 봄 소풍을 마치고 그만 두겠노라고. 탱이가 한번 공을 굴리니 뜻밖에도 공은 데굴데굴 잘 굴러갔다. 높아보였던 장애물은 막상 부닥치니 모래 위에 그은 선처럼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탱이 담임선생님이 쉽게 이해해 주셨다. 선생님들 가운데 그러면 안 된다는 분도 계셨지만, '잘 해 보라'는 선생님도 계셨다한다. 시골 중학교는 의무교육이어서 의무 취학 유예원을 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반대를 하리라 예상했던 외할아버지는 뜻밖에 '잘 알아서 해라', 하셨다. 친구들의 선물을 받고 탱이 학교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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