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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고 '야자' 거부의 추억, 아직도 청소년은 '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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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고 '야자' 거부의 추억, 아직도 청소년은 '미생'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 헌법재판소 문도 스스로 두드릴 수 없는 청소년

"헌법재판소법 68조에 다른 법률에 구제 절차가 있는 경우에는 그 절차를 모두 거친 후가 아니면 청구할 수 없다고 하여 이와 같이 그 절차를 거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의 바람은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방과 후의 시간을, 방학 동안의 시간을 당연히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에 따라 활용할 수 있도록 학생 개개인에게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1995년, 춘천고등학교 1학년이던 최우주 씨가 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등이 헌법에서 규정한 행복추구권 등의 기본권을 침해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하려 한다며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글의 일부이다.

당시 춘천고등학교는 "학교에서 하는 일이니까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라. 보충수업 받기 싫은 사람은 자퇴서를 쓰고 춘고를 떠나라"며 최우주 씨를 압박했다. 그러나 최우주 씨가 실제로 교육청 등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헌법소원 시도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자, 자퇴 강요는 "농담이었다"고 변명했으며, 보충수업과 아갼자율학습을 부모의 동의하에 학생이 선택할 수 있도록 방침을 바꾸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오랫동안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강요하는 한국 고등학교들의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일부 학교에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이후 최우주 씨는 현행 교육제도의 위헌성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법을 지키라는 상식적인 요구는 계속할 것이지만 헌법소원을 하려던 계획은 불가피하게 수정한다고 밝혔다.

만약 최우주 씨가 헌법소원을 포기하지 않고 추진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최우주 씨의 헌법소원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사안의 위헌성을 다투는 데까지 가기 전에 애초에 청소년은 스스로 헌법소원을 청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헌법소원을 하려면 부모 등 법정 대리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아무리 청소년 본인이 국가 기관 등에 의해 기본권을 침해당해서 헌법소원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관련된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제기할 수 있어도 현행법상 법정 대리인의 동의 없이는 헌법소원 절차 자체를 진행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외면당하는 청소년

헌법재판 제도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도입된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87년 민주화 체제의 가장 큰 제도적 성과이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률이나 공권력에 의해 기본권을 침해당하였을 경우 개인이 이에 항의하고 침해된 권리를 구제받기란 매우 어렵다. 국민의 편에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제도가 바로 헌법소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법률이나 공권력에 의해 침해당하였을 경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할 수 있다. 때문에 헌법소원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구제 수단으로 여겨지며, 이를 판단하는 헌법재판소는 매우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

"헌법정신에 위배된 법률에 의하여 기본권의 침해를 받은 사람이 직접 헌법재판소에 구제를 청구하는 일. 정식으로는 헌법소원심판청구라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청구할 수 있다."
- 두산백과 '헌법소원' 항목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국민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헌법재판소가 청소년에게만큼은 온전히 열려 있지 않다. 6월 항쟁 등 민주화운동의 과정에도 수많은 청소년들이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은 6월 항쟁의 제도적 성과들에서 모두 외면당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대통령 선거를 비롯한 선거에서 투표를 할 수도 없고, 정당 활동을 할 수도 없다. 학교 안에서도 학생회는 형식적으로나 존재할 뿐, 학교의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조차 할 수 없는 등 학내에서의 참여권도 보장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학교 안팎에서 정치적 권리와 수단이 박탈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최우주 씨 또한 학교 내 인권 침해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헌법소원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기본권을 가지는 이 나라의 국민이지만, 기본권 구제를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하는 헌법재판소를 스스로 이용할 수조차 없다.

모든 국민에게 보장된다는 헌법소원이 왜 청소년들에게는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것일까. 이는 '헌법재판소법' 제40조가 헌법재판소의 절차는 '민사소송법'을 준용한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사소송법'은 민사, 즉 개인과 개인 사이의 분쟁을 다루는 재판에 관한 법이다. 문제는 '민사소송법'이 만 19세 미만의 청소년은 "법정 대리인에 의해서만 소송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사실 '헌법재판소법' 제40조는 "헌법재판의 성질에 반하지 아니하는 한도에서"만 준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인권, 국민으로서의 기본권을 구제해달라는 헌법소원을 청소년이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은 헌법재판의 기본 취지와 성질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잘못된 관행에 의해 청소년은 스스로 권리 구제를 신청하는 것을 제한당하고 있다.

청소년이 스스로 할 수 없게 한 게 보호인가


청소년들은 일상적으로 부모 등 '보호자'의 동의와 대리를 요구받는다. '민사소송법'을 비롯해 '민법'과 관련된 영역에서는 만 19세 미만의 청소년이 법정 대리인, 즉 부모 등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대부분의 행위들을 할 수 없게 제한하고 있다. 스스로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할 수 없고, 물건을 산다거나 집을 계약한다거나 하는 일도 부모가 취소해 버릴 수도 있다.

'형법' 관련 영역, 즉 범죄 등에 관해서는 부모 동의가 없이도 청소년이 스스로 범죄 피해 사실을 신고하고 고발 절차를 밟을 수 있다. 그러나 일선 경찰들은 부모의 동의를 요구하거나 당사자의 동의 없이 피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청소년들도 대부분 이런저런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음을, 특히 범죄 피해의 경우 믿을 만한 성인의 도움은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상 홀로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마음먹었을 터이지만, 청소년의 주체적인 결정을 마주한 우리 사회는 어김없이 의심부터 하고, '보호자'의 존재와 승인을 요구한다.

부모 등 '보호자'가 청소년을 대리하여 권리를 행사하니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는 부모고, 당사자는 당사자다. 청소년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행동하는 부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청소년이 피해자인 성폭력 사건에서 부모가 피해자의 동의 없이 가해자와 합의를 해준 일이 문제가 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또한 청소년이 부모와 함께 살지 않거나 연락이 끊긴 상황 등 법정 대리인이 실질적으로 청소년을 대리하지 못하거나 대리할 의지가 없는 상황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보호자'를 우선시하고 정작 청소년 당사자의 의사를 깡그리 무시하는 사회적 인식은 청소년을 그 어떤 판단도 행위도 스스로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상정하고 있는 데에서 기인한다. 청소년은 능력이 부족하여 타인이 대신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규정해 버리고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며 권리를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청소년을 더욱 무능력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청소년은 사회의 편견에 의해, 현행 법체계에 의해 철저하게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무능력해진다.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성인' 보호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비대칭적 권력관계는 '성인'의 차별과 폭력을 더 용이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능력이 부족할 때 필요한 것은 권리 행사의 제한과 박탈이 아니라 스스로 권리 행사를 할 수 있게끔 돕는 지원과 보조이다. 능력 부족을 이유로 권리 자체를 박탈하는 것은 그저 차별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부모라면 당연히 무엇보다 우선해서 자식을 위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많은 부모들, 나아가 어른들은 청소년의 존엄성이나 권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입시경쟁교육이나 온라인 게임 셧다운제를 둘러싼 논란 등에서 다수의 부모들은 청소년의 권리를 옹호하는 편에 서지 않곤 했고, 적극적으로 청소년을 억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때로는 당사자보다 자신이 청소년들의 문제를 더 잘 안다는 착각에 빠져 청소년의 권리를 침해하길 서슴지 않기도 한다. 통계상 아동학대 가해자의 대부분이 친부모인 현실이 보여주듯, 부모에게 주어진 권한이란 청소년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어른이 없어도 또 문제다. 성인 '보호자'가 없는 청소년은 사각지대로 내몰린다. 특히 탈가정 청소년 등 성인의 '보호'가 없다고 여겨지는 청소년들은 범죄의 우선적 타깃이 된다. 대리해줄 누군가 없이는 청소년들이 스스로를 보호하지조차 못하게 만들어 놓는 것은 과연 보호인가?

스스로의 권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2012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여러 어려움을 딛고 청소년들이 선거권 연령 제한 기준이 만 19세인 것과 청소년의 정당 가입 등을 금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적이 있다. 2년이 넘어서야 판결이 나왔는데, 헌법재판소가 기각 결정을 내리며 내건 사유 중 하나가 "청구인들이 선거권이 생겼다"였다. 나이를 먹어 선거권이 생겼으니 '문제 해결'이란 것이다.

이는 나이 어린 존재의 권리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소년을 미완의 존재, 아직 인간이 되지 않은, 성숙하지 못한 존재, 그러기에 온전한 권리를 가질 수 없는 존재로 보는 한편, 지금 겪는 차별은 어쩔 수 없는 것,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시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나이로 인해 차별을 받는 청소년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구조 속에서 개별 청소년들이 나이를 먹어 청소년이 아니게 된다고 해서 청소년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기준으로 권리를 유무를 결정하는 현행 법체계 자체에 대한 반성과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청소년에 대한 차별은 해결되지 않는다.

청소년의 법적·정치적 행위 능력을 부정하는 법체계를 전면 수정하여 청소년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스스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청소년에겐 권리를 대신 행사해줄 대리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의사를 존중하고 나의 행위를 도울 조력자가 필요하다. 사법절차나 헌법소원 절차를 스스로 진행하지 못한다는 건, 자신의 권리를 보호할 수도 쟁취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소년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자가 대변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청소년의 권리와 이익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하고 때로는 이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청소년에겐 스스로의 권리를 스스로 지킬 방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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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준)

청소년의 인권을 옹호하고 요구해온 활동가들의 단체입니다. 청소년에 대한 차별과 하대, 보호를 빙자한 억압을 비판합니다. 스무 살 되어 인간대접 받는 세상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한 인간이자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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