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을 비롯한 검사들에게 제재를 가한 데 이어 이번에는 ICC 자체를 무력화하기 위해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제외하려는 제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0일(이하 현지시간) 미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행정부가 ICC에 대한 광범위한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고 관계자들이 전했다"라며 "이는 ICC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한 이후, 해당 기관을 해체하려는 워싱턴의 움직임이 급격히 강화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자체적으로 확인한 문서와 미국 관리들의 설명을 종합해 제재 주요 내용이 ICC가 미국 달러화로 거래하는 것을 막겠다는 내용이라고 전했다. 신문은 "이 제재는 6~7개월의 유예 기간을 거친 뒤 ICC와의 대부분 거래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이는 ICC가 미 달러로 거래하는 것을 차단하고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상당 부분에서 고립시킴으로서 재판소의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킬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신문은 "최종 결정 및 발표 시기는 불투명하지만, 일부 미국 관리들은 유엔 총회 기간인 이번 주나 그 직후에 이 조치가 확정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고 덧붙였다. 다만 미 재무부는 관련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에 응답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미 ICC에 대한 공세의 일환으로 소장을 비롯해 다수의 ICC 관계자들을 제재한 바 있다. 신문은 "이번 제재는 특정 개인을 넘어 ICC와의 광범위한 거래 전반에 적용될 예정"이라며 "관련 문서에 따르면 통신 서비스 관련 거래는 제재 대상에서 제외된다"라고 전했다.
신문은 "유럽 국가들과 일본 등 ICC의 주요 지지국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공세로부터 ICC를 보호하겠다고 공언했으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불투명하다"라며 "유럽연합(EU)은 역내 은행들이 ICC와 계속 거래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앞서 지난 7월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ICC에 대한 광범위한 조치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벽돌 하나하나 허물듯" 재판소를 해체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미국 정부는 성폭행 혐의로 지난 7월 해임된 카림 칸 전 수석 검사, 아카네 토모코 ICC 소장 및 기타 판사들, 두 명의 부검사, 그리고 네타냐후 및 기타 이스라엘 관리들에 대한 사건을 담당한 수석 검사 등을 제재 대상에 올린 바 있다.
미국은 ICC 회원국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ICC 해체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지난 2024년 11월 21일 ICC가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이스라엘 국방장관에 대해 전쟁범죄 및 반인도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기 때문이라고 신문은 설명했다.
신문은 "루비오 의원은 ICC 비회원국 관리들을 겨냥한 재판소의 결정이 위험한 선례를 남겼으며 미국의 주권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라면서 네타냐후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인사들에 대해 영장을 발부한 것을 문제삼았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역시 미국과 함께 ICC 비회원국이다.
그런데 신문은 루비오 장관이 "2022년 당시 상원의원으로서 ICC 비회원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를 ICC가 수사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공동 발의했을 때는 이러한 선례를 문제 삼지 않았다"라며 "이후 2023년 ICC는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과 다른 러시아 관리들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고 밝혀 미국 정부의 '이중잣대'를 지적하기도 했다.
ICC는 미국의 제재 계획에 대해 신문에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다만 지난 8월 26일 토모코 소장은 일본 기자클럽이 주최한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본인에 대한 미국의 제재에 대해 "ICC는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라며 "제재를 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 가능한 저항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본인인 토모코 소장이 미국 정부에 반발하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ICC에 최대 기여국인 일본도 우선은 토모코 소장의 입장에 맞추는 모습이다. 지난 8월 19일 트럼프 정부가 토모코 소장에 대해 제재를 발표한 다음날인 19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기자들에게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미국을 포함한 관계국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대응해 나가겠다"고 말했다고 <아사히신문>이 전한 바 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21일 다카이치 총리는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으로 출국하고 이후 22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기조연설에 나설 예정인 가운데, '법치'를 중시해 온 일본 총리로서 다카이치가 어떤 메시지를 발신할지가 "제1의 관전 포인트"라고 일본 <지지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은 다카이치 총리가 ICC에 대한 미국의 제재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밝힌 데 대해 '저자세(유약한 태도)'라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전했다. 통신은 22일 다카이치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간 정상회담에서 실제 ICC 문제를 어느 선까지 언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전망했다.
통신은 한 외무성 당국자가 "개별 사안을 다룰지 여부는 회담 시간과 진행 상황에 달려 있다"며 "견해차가 있는 부분이 있더라도 협력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회담이 된다면 좋겠다"고 밝혔다고 전해 다카이치 총리가 ICC 문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강하게 항의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신문>은 복수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당시 총리의 "매우 유감스럽다"는 표현은 외무성과 총리관저 관계자들 사이에서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한 관계자는 "여론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더라도 이 정도의 표현에 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신문은 "이 배경에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를 악화시켜서는 안 되는 사정이 있다. 연말로 예정된 안보 관련 3개 문서 개정에서는 미국의 방위비 증액 요구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라며 "24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 간 미중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을 제쳐놓고 이뤄지는 협상을 경계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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