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을 외친다는 데 이유가 필요할까요. 단지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싶을 뿐인데, 당연한 요구가 왜 이토록 쟁점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같이 일하기 불편한 존재'라는 꼬리표를 지우기 위해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고, '좋은 여자'로 보이기 위해 나를 지워야 하는 현실 속에 여성들은 여전한 생존한 긴장에 자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능력주의의 규칙을 따르지만, 능력으로 평가받는 대상에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는 여전히 예외입니다. 여성의 성취가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통계는 넘쳐나지만, 현장은 다릅니다. 익히 아는 것처럼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월평균 29%로,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입니다. 능력 중심 사회를 자임하면서도 여성의 노동력은 여전히 '보조의 영역'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세대인 저는 학벌과 경력을 쌓으면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예상을 배반했습니다. 우리는 면접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언젠가 떠날 존재', '결혼 후 그만둘 사람'으로 낙인찍힙니다. 그러한 시선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느라,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라고 되풀이하는 동안 자존은 조금씩 흩어집니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까. 여성이 일할 수 있는 공간과 역할을 한정하는 현실은 견고합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은 교묘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여성을 일터에서는 임시직으로, 가정에서는 헌신하는 당연직으로 소비합니다. 무겁게 들리지 않는 말 한마디, 익숙하게 반복되는 시선 하나가 여성의 존재를 '보조'로 밀어냅니다.
한국 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질문을 받아왔습니다.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10년이 흘렀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조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성가족부가 성평등가족부로 이름을 바꾸고 제도적 장치가 늘어났지만, 실제 현실은 '성평등이 완성된 것처럼 보이길 바라는 사회'로 돌아갔습니다. 성평등을 논하는 일조차 부담스러워지고, 여성혐오적 언행은 다시 일상처럼 스며듭니다.
성차별은 변화를 가장한 퇴보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됩니다. '성평등은 완성되었다'는 식의 담론이 확산되면서 오히려 불평등의 문제는 정책의 후순위로 밀려났습니다. 여성 노동자, 한부모 가정, 돌봄노동자를 비롯한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모두에게 "이젠 됐잖아"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사회제도의 공백과 정부의 방관 속에 그간 여성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버텨왔습니다. 거리에서,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가정에서, 강의실과 교실에서, 서로의 이슬비가 되어주며 세상을 바꿔왔습니다. 그렇게 2016년 5월 17일 이후 10년, 아니 훨씬 더 오래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 연대로 생존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멈추려 합니다. 파업은 멈춤의 언어입니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만 일어나는 경제적 투쟁이 아닙니다. 이 사회의 모든 노동, 보이지 않는 돌봄과 감정노동, 관계의 생산까지 멈춰 서겠다는 선언입니다. 사회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돌봄노동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면, 사회 자체가 존속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떠넘긴 70% 이상의 돌봄노동을 포함하여 무급노동, 감정노동, 관계노동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음에도 이들의 노동은 통계 밖에 있습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이 하루를 멈춘다면 세상은 마침내 그 존재와 그들이 지탱해온 무형의 가치들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여성파업은 단지 '여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존재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멈춰 서서 구조를 직면할 시간이 왔습니다.
"과연 하루 멈춘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그렇게 묻는 목소리를 이해합니다. 생계는 지속되어야 하고, 돌봄은 멈출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바로 그 사실이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진실입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돌봐야만 세상이 유지된다는 것. 그 노동을 지탱해온 이들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 그것을 잠시라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멈춰야 합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거세진 백래시, 여성연대에 대한 조롱과 혐오가 오히려 이 운동의 필요성을 뒷받침합니다. 그들은 연대를 막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연대가 세상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파업이 가장 강력한 발화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최초의 여성파업이 있었던 1975년,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하루동안 모든 일을 멈추자 불통이 된 전화부터 학교, 병원 등의 공공서비스까지 사회 전반적인 기능이 온전히 정지된 나라에는 정적만이 흘렀습니다. 여성파업은 이윽고 국가 전체의 경고음이 되었습니다. 의회는 평등권 보장법을 제정하였고, 5년 후인 1980년, 아이슬란드는 세계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당선된 뒤 현재 OECD 성평등 지수 1위의 국가가 되며 1975년의 멈춤의 한 사회의 방향을 바꿔놓게 되었습니다.
파업은 세상을 적으로 두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다시 선언하는 일입니다. 하루쯤 멈춘다고 세상이 당장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루로 인해 세상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굴러간다'던 하루가 사실 얼마나 많은 여성의 노동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적 결심이 아닙니다. 작은 연대의 마음입니다. 가족 식사를 미리 준비해두고, 직장에 연차를 내고, 혹은 그저 마음으로 동참해도 좋습니다. 그 하루, 자신의 노동과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세계 여성의 날, 여성파업을 통해 되묻습니다. 성평등은 이미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새롭게 쟁취해야 하는 삶의 조건입니다.
여성파업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세상을 멈추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멈춰야만 보이는 진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그 하루의 멈춤이 곧 해방의 첫걸음이며, 서로를 잇는 연대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더 이상 '1등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여성의 이름으로, 사람의 이름으로, 이제 멈춥시다. 멈춤은 후퇴가 아닙니다. 그것은 연대의 시작이며, 사회를 작동시키기 위한 선언이며, 결국 모두를 위한 해방의 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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