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가유연계약제(이하 '이중약가제')를 운영하기 위한 법령 개정안의 입법예고가 지난 1월 14일 종료되었다. 이중약가제는 의약품의 표시가격과 실제 거래가격을 분리하는 제도로 2013년 위험분담제 환급형 도입 이후 지속적으로 적용범위가 확대되어 왔다. 얼핏 들어도 이상한 이런 가격정책을 정부가 앞장서서 확장해 온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약품 접근성과 제약산업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한국의 의약품 가격 결정체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의약품의 가격은 비용-효과성 평가와 국가의 사회경제적 수준, 사회적 요구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산정된다. 그 결과 지불용의를 반영한 가격이 국가별로 차별적으로 형성되며, 제약산업은 이러한 가격 차이를 통해 높은 초과이윤을 누릴 수 있다. 외국약가참조제도(International, Reference Pricing, 이하 'IRP')는 이러한 가격 차별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이다.
각국은 최종 약가를 결정할 때 타 국가의 약가 수준을 참고하는데, IRP가 활성화될 경우 가격 수준은 국가별 최저가 수준에 수렴하는 경향을 보인다(☞관련논문 바로가기). 제약업계에서는 IRP로 인한 가격 인하를 피하기 위해 약가 수준이 낮게 책정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에는 아예 신약 출시를 포기하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제약업계에서 흔히 '코리아패싱'이라 불리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다. 이는 단순한 시장 판단이 아니라 특정 국가의 환자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공급 전략이며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와 가족에게 전가된다.
코리아패싱이란 추상적인 정책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고통의 문제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한국 정부는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만약 코리아패싱의 원인을 한국의 낮은 약가 수준과 IRP 제도에서만 찾는다면, 가장 손쉬운 해법은 의약품의 가격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제도화된 것이 표시가격과 실제 가격을 분리하는 이중약가제이다. 이중약가제를 도입하면 제약사는 한국의 낮은 약가가 다른 국가의 가격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고 정부는 신약 도입 지연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일정 부분 회피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한국산 신약의 해외 진출 과정에서 높은 가격을 확보할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다. 마치 이중약가제는 환자 접근성과 제약산업 육성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코리아패싱이 발생하는 원인을 좀 더 심층적으로 검토해 보자. 그 근인(近因)은 한국의 약가 수준이나 IRP에 있을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原因)은 의약품 공급이 이윤극대화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데 있다. 제약산업은 이윤 손실이 예상된다면 사람들의 필요와 무관하게 특정 국가 전체를 시장에서 배제하는 선택을 서슴지 않는다. 코리아패싱은 바로 이러한 전략적 판단의 산물이다.
이윤을 목적으로 공급이 이루어질 때 의약품 접근의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는 국가 간 불평등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의약품의 속성에 따라서도 불평등은 구조화된다. 항생제와 같이 높은 이윤을 기대하기 어려운 의약품은 사람들의 절대적인 필요에도 불구하고 개발과 공급의 공백이 발생한다(Pharmacy gap). 이러한 의약품 공급의 불평등은 한국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보건의료의 지역별 불평등, 필수의료공백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이윤을 좇는 거대 자본 앞에서 건강할 권리, 보건의료의 형평성이라는 외침은 공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 추구' 자체는 문제화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기업의 '이윤 추구'는 불가침의 전제로 통용되며, 이를 정당화하는 사회경제적 권력관계가 공고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약가제는 바로 이러한 전제를 제도적으로 승인하는 장치이다. 기업의 이윤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에 기반하여 국가가 가격 투명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중약가제'를 평가한다면, 단기간에 한국이라는 국민국가가 얻게 될 비용과 편익은 차치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자본권력의 주도권을 공고히 하고, 의약품 공급의 불평등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의약품 공급의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이 지점에서 의약품 공급체계의 공공성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약품 접근성은 시장에서 획득해야 할 혜택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할 권리이다. 이런 맥락에서 의약품은 '상품'이 아니라 '공공재'로 기능해야 한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우리는 의약품의 공급이 자본주의적 이윤 논리에서 기인할 경우 발생하는 불평등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이는 비단 한국, 또는 지불능력이 부족한 일부 저소득국가에서만 파편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차별과 배제를 토양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이윤 논리에서 벗어나, 전지구적 연대를 통해 '공공성' 기반의 의약품 공급체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약품 공급의 공공성 운동은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과 의약품이 갖는 사회경제적 성격을 고려하여, 다양한 사회운동과 연대해야 한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자본주의 체제의 '이윤 논리' 앞에서 '공공성'을 주장하는 것은, 기존 질서로부터 단번에 벗어나겠다는 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온 전제에 질문을 던지는 또 다른 방식의 실천이다. 사회변화는 이러한 작은 인식의 틈으로부터 시작된다.
다가오는 2월 첫째 주(2월 5~7일)에는 '2026체제전환운동포럼'이 열린다. 이번 포럼이 의약품과 건강, 공공성을 둘러싼 논의를 확장하고, 공공성으로 나아가는 다양한 사회운동의 연대의 장이 되기를 희망한다(☞2026체제전환운동포럼 참가신청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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