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서사에 균열을 내는 예술의 정치성
서울 구로구 평화박물관 스페이스99에서 열리고 있는 고승욱 개인전 '어떤 이야기'(8월 1일~9월 6일)는 예술이 어떻게 역사의 지배서사에 균열을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2025년, 이 전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2008년부터 최근까지 17년간의 작업을 망라하는 이번 개인전에는 신작 유화 7점을 포함해 비디오 6점, 사진 21점, 드로잉 5점, 설치 1점, 오브제 1점 등 총 41점이 출품됐다. 하지만 작품의 수량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제시하는 '다른 역사 읽기'의 방법론이다.
동두천에서 시작된 '기억의 정치학'
고승욱(1968~, 제주 출생)이 현재의 작업 세계를 구축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05년 말 동두천 상패동 공동묘지에서의 충격적 경험이었다. 묘비도 없는 무덤들 앞에서 작가는 "이미 붕괴된 한국 사회의 역사적 공동체에서도 잊혀지고, 이미 도래한 개인주의 사회에서도 어떤 개인의 자격조차 획득하지 못한 무수한 망자들"을 대면했다.
이는 단순한 감상적 체험이 아니었다. 작가는 이후 20년간 제주 4.3 학살 현장, 노근리 쌍굴다리, 지리산 실상사, 한국전쟁 격전지 홍천 등 "한반도 변방에 위치한 사건의 장소들"을 체계적으로 순례했다. 이러한 순례는 관광이나 취재가 아닌, 억압된 기억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정치적 실천이었다.
'돌초'와 '탁영' - 지배서사를 넘어서는 애도의 방법
이번 전시의 핵심인 사진 연작 '돌초'와 '탁영'은 기존의 기념비적 추모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애도의 문법을 제시한다. 작가가 만든 '돌초'는 우리 산하의 돌을 파라핀 왁스로 뜬 거푸집 형태의 초다. 데스 마스크와 라이프 캐스트의 중간 지점에서, 이 초들은 어머니의 자궁이나 망자의 시신을 위한 집을 연상시킨다.
바람 불고 파도치는 해안 절벽에서 이런 제의가 펼쳐질 때, 원혼이 나타나 자신의 한 맺힌 사연을 쏟아내는 울음을 작가는 '말더듬'이라 명명한다. 근대 민족국가의 서사 형식으로는 재현될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제주 무속의 심방처럼 영게울림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공인한 기념식이나 추도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치적 행위다. 공식 역사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추모'이자,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주체적 애도'의 실천인 것이다.
제주에서 후쿠시마까지 - 연대의 상상력
작가의 문제의식은 한반도를 넘어선다. 제주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조 농사를 지어 희생자 영령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 프로젝트는 비디오작품 '밭과 소'(2022)에서 동일본 대지진 참사의 기억과 조우한다.
후쿠시마 농부가 목장을 재건하며 소를 키우는 생명 회복의 서사와 제주에서 죽음의 땅에 생명의 씨앗을 틀우는 공동체적 실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는 자본과 국가권력에 의해 파괴된 생명과 공동체를 복원하려는 보편적 투쟁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촛불에서 굿당까지 - 저항과 치유의 변증법
작가의 2018년 작품 '△의 풍경'은 시간성의 정치학을 드러낸다. 1950년 노근리에서 민간인 학살을 차마 실행하지 못했던 미군 병사의 복잡한 내면과 2016-2017년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과거와 현재는 단선적 시간이 아닌 나선형의 구조로 만난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신자유주의적 자본 축적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제주 강정과 같은 현실 앞에서, 역사적 트라우마는 단순히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이 드러난다. 작가가 촛불시위 현장과 제주 굿당에서 수집한 녹은 초를 재생하여 다시 불을 밝히는 행위는 저항과 치유의 변증법적 통일을 보여준다.
지배서사에 맞서는 '트릭스터'의 역할
흥미롭게도 작가는 때로 '선한 속임수'를 사용한다. 신작 '몰래물이야기'(2025)에서 제성마을 왕벚나무 지키기 과정에서, 작가는 베어진 나무의 가지 외에 다른 왕벚나무 가지도 함께 꺾꽂이한다. 원본의 진실성을 의도적으로 '오염'시키는 이러한 행위는 절대적 진리나 순수성을 주장하는 권력의 논리에 균열을 낸다.
노근리 학살 유가족과 함께한 영상작업 '북극성'(2023)의 촛불 그림자 퍼포먼스에서도 작가의 '주술'에 의해 희생자와 생존자가 서로 손을 맞잡는 탁영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이는 현실을 꿈으로, 꿈을 현실로 전치시키는 예술의 급진적 힘을 보여준다.
문화정치학적 함의와 과제
고승욱의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과거사를 다룬다는 점이 아니라, 역사를 기억하고 서술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기 때문이다. 국가나 자본의 서사에 포섭되지 않는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매 순간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줄놀이 광대의 연희처럼, 작가의 '어떤 이야기'는 생명의 파동을 전달한다. 애도가 저항이 되고 추모가 연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는 예술의 정치적 힘을 확인한다.
다만 이러한 작업이 미술계 내부의 담론으로만 소비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실천과 연결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작가가 직접 쓴 『어떤 이야기』 책자 발간과 8월 1일 진태원 교수와의 대화 프로그램은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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