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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에 대한 린치적 명상, 또는 유물론적 재주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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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에 대한 린치적 명상, 또는 유물론적 재주술화

[프레시안 books] <어두운 생태학>

우리는 기묘함 앞에서 진정으로 웃을 수 있을까? 티머시 모턴에 따르면 모든 것이 다소간 기묘하다. 따라서 기묘함 앞에서 웃는다는 것은 단지 유쾌한 반응이 아니라 존재 전체에 대한 긍정이 된다. 기묘함을 발견하고, 당혹해하고, 우울에 빠지다가 결국 웃는다. 이것이 모턴이 말하는 생태적 알아차림(ecological awareness) 또는 에코그노시스(ecognosis)다. <어두운 생태학>(티머시 모턴 지음, 안호성 옮김, 갈무리 펴냄)은 이와 같은 기묘한 깨달음에 대한 책이다. 모턴은 보통 객체지향 존재론(OOO)이나 그 친척이라 할 수 있는 사변적 실재론의 일원으로 분류되지만, 책을 이해하는 데 이런 철학사적 분류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진짜 기여는 그가 생태학을 다루는 방식, 즉 생태학을 사랑스럽게 우울하게, 그리고 즐겁게 만드는 방식에 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듯 <어두운 생태학>은 그의 생태학 삼부작의 종장이다. 책은 세 개의 실을 통해 생태적 알아차림을 엮어낸다. 첫 번째 실은 낯선 고리(strange loop)을 만드는 생태적 알아차림의 실이다. 낯선 고리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고리지만, 자기 자신과 다소간 어긋나게, 다르게 돌아온다는 점에서 낯설고 이상하다. 따라서 그것은 엄밀히 말해 닫힌 고리가 아니라 나선형 용수철이고, 순환이 아니라 소용돌이다. 낯선 고리를 낯설게 만드는 것은 현상과 실재의 불일치, 간극이다. 객체란 사물이 아니라 사물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제거 불가능한 불일치와 간극을 말한다. 생태적 알아차림은 자기 자신과 어긋나고 멀어지는 낯선 고리를 추적하는 것이다. 모턴에 따르면 모든 것이 낯선 고리다. 진화론은 폐가 알고 보니 부레였다는 것을, 즉 그 기원에서 부레로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뇌과학은 정신이 알고 보니 세포들의 복잡한 전기화학적 작용이었다는 것을, 즉 그 바탕에서 전기와 화학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인류세는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적 규모에서 불길한 유령처럼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류세는 인간의 회귀이기는커녕 "최초의, 온전히 반인간중심주의적 개념"(52)이다. 농업로지스틱스(agrilogistics)란 역사적으로 농업혁명과 관련된 기술, 지식, 실천의 총체이자, 낯선 고리들을 어떤 내적 간극도 차이도 없는 매끈한 현존, 예측 가능성으로 환원하는 공리 체계를 말한다. 농업로직스틱스의 산물 중 하나가 '자연'이다. 예측 가능한 순환과 리듬, 주기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자연'이란 "홀로세(Holocene)와 농업로지스틱스 사이의 우연적 협력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109)이다. 기후위기, 아니 복합위기는 궁극적으로 이 환상의 끝이다. 따라서 "인류세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았으며,"(110) 오히려 '자연'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지구온난화의 주범"(109)이다.

이 고리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지만 정확히 동일한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돌아오되 어긋나고, 반복되되 달라진다. 이 고리는 닫힌 원이 아니라 꼬인 나선이며, 순환이라기보다는 정체불명의 소용돌이다. 무엇이 이 고리를 낯설게 만드는가? 그것은 곧 현상과 실재 사이, 혹은 존재와 인식 사이에 끼어드는 제거 불가능한 차이, 간극, 불일치다. '객체'란 사물 내부에 은닉된 간극 그 자체를 가리킨다. 생태적 알아차림이란 바로 이 간극을 감지하고 자기 자신과 어긋나며 자꾸만 멀어지는 인식의 나선을 따라가는 행위다. 모턴에 따르면 우주는 본디 낯선 고리들의 콜라주다. 진화론은 폐가 사실상 부레였음을, 즉 그것의 낯선 기원으로 회귀함을 보여주면서 생물학을 희극으로 바꾼다. 뇌과학은 정신이 알고 보니 신경세포들의 정교한 전기화학적 오케스트라였다는, 감동스럽기보다는 당혹스러운 사실을 드러낸다. 인류세는 그 비극적 변주다. 인류세에 인간은 행성적 차원에서 유령처럼 되돌아온다. 이것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전복이다. 모턴의 표현을 빌리면, 인류세는 "역사상 최초의, 그리고 온전히 반(反)인간중심주의적인 개념"(52)이다. 농업로지스틱스(agrilogistics)란 역사적으로 농업혁명과 관련된 기술, 지식, 실천의 총체이자, 낯선 고리들을 어떤 내적 간극도 차이도 없는 매끈한 현존, 예측 가능성으로 환원하는 공리 체계를 말한다. 농업로직스틱스의 산물 중 하나가 '자연'이다.

'자연'은 실체라기보다 담합의 산물이다. 예측 가능성과 리듬, 주기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자연은 사실 홀로세(Holocene)와 농업로지스틱스의 은밀한 공모 아래 조립된 허상이다(109). 기후위기, 아니 보다 정직한 이름으로는 복합위기는 이 허상의 피로한 마지막 장면이다.

'자연'이란 "홀로세(Holocene)와 농업로지스틱스 사이의 우연적 협력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109)이다. 이 환상의 끝이다. 따라서 "인류세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았으며,"(110) 오히려 '자연'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지구온난화의 주범"(109)이다.

결론적으로, 인류세는 '자연'을 파괴한 것이 아니다(110). 오히려 '자연'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개념적 조작이, 지구온난화라는 이 시대의 실질적 주범이다(109). 요컨대, 자연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믿는 한, 이 낯선 고리는 계속해서 우리를 비껴 지나갈 것이다.

▲ <어두운 생태학>(티머시 모턴 지음, 안호성 옮김). ⓒ갈무리

두 번째 실은 인간과 비인간을 묶는, 낯선 고리의 존재론과 논리학의 실이다. 모턴은 "결코 증발한 적이 없는 인간과 비인간의 원초적 관계성"(117)을 원-석기(arche-lithic)라고 부른다. 인간과 비인간의 얽힘은 인간이 석기를 써서 지구를 자원화하기 이전부터 존속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근대인은 고사하고 "결코 신석기인이었던 적"(117)조차 없다. 원-석기의 논리는 나르시시즘의 논리, 'A는 A(A=A)'라는 동일률이다. 'A는 A'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정말로 공허했다면 애당초 A에 대해 '~는 A'라는 말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무엇이 A에 대해 굳이 '~는 A'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다시 말해 나르시시즘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XY 염색체를 가진 생물학적 남성일 뿐 아니라 그 사실을 넘어 남자 답게 행동할 때, 우리는 그를 두고 '남자는 남자네!'라고 한다. 인공지능이 그저 텍스트를 생성하는 기계일 뿐 아니라 기계로만 보기는 힘든 방식으로 말을 할 때, 우리는 '인공지능은 정말 인공지능이네'라고 한다. 이처럼 'A는 A'는 A가 단지 A일 뿐만 아니라 A이지만은 않은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 즉 자기 내부의 차이 또는 간극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A의 낯선 고리 구조를 은밀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이 언제나 인간일 뿐만은 아닌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단지 인간일 뿐 아니라 박테리아의 서식지, 세포의 군집, 분자로봇들의 군대 등 비인간으로 나타난다. 인간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비인간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언제나 이미 원-석기인이다.

'A=A' 속에 내재한 낯선 고리 구조를 제거하려 할수록, 즉 현상을 걷어내어 실재만을 남기려 할 수록 역설적으로 A는 붕괴한다. A가 단지 A이기만 하도록 만드는 것은 A를 죽이는 짓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라고 강요한다면 그의 인격은 보존되기는 커녕 파괴될 것이다. 마치 달팽이의 맨 살을 드러내기 위해 점액질을 닦아내는 순간 달팽이가 말라죽는 것과 같다. 현상은 사물(thing)이 나타내는 사물이지 않은 것(no-thing), 즉 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사물은 무에 흠뻑 젖어 있다." (190) XY 염색체로 인한 남자다운 행동이야말로 남성성을 구성하고, 개발과 훈련으로 인한 그럴싸한 말이야말로 인공지능의 지능을 대변하듯이, 사물이 분비하는 사물이지 않은 것이야말로 사물을 사물답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물은 언제나 "고유성을 방출"하고, "특정성으로 곤두서 있다." (190) 사물에서 무를 닦아내어 사물이 사물일 뿐이게 만드는 순간 사물은 죽는다. 그렇게 죽은 사물을 "생각하기 쉬운 실체(Easy Think Substance)"만을 갖게 된다. 이것이 농업로직스틱스의 귀결이다. 땅을 생각하기 쉬운 실체로 간주했기에 잡초를 제거하여 경작지를 만들 수 있었고, 지층을 생각하기 쉬운 실체로 생각했기에 시추탑을 세워 석유를 뽑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직접 겪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실은 낯선 고리를 바꾸는 윤리와 정치의 실이다. 모턴이 내세우는 것은 초월도 내재도 아닌 저월(subcendence)이다. 초월을 통해 전체가 부분을 합을 넘어서고, 내재를 통해 전체가 부분의 합 속에 품어진다면, 저월을 통해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모자라게 된다. 부분들의 관계 맺음을 통해 전체의 효과가 줄어드는 것이 저월이다. 전쟁을 줄이고,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는 복합위기의 시대에 저월의 정치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야 한다. 저월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것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아 보이는 것, 즉 놀이(play)다. 놀이는 "나를 레고, 벽돌, 지의류, 활동가 네트워크, 미생물 군집, 녹아내리는 빙하와 연결해주는 저월"(208-209)의 운동이다. 복합위기의 시대는 놀이챙김(playfulness)을 강제한다. 우리는 ""놀아라! 안 그랬단 봐!"라고 소리치는 도덕적 목소리의 선고를 받는 상황"(207)에 처한다. 형벌에 가까운 놀이가 행복할 리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심각하고 어두우며, 그래서 놀기 위해서는 부정적 정동의 층들을 통과해야 한다. 모든 것의 시작인 죄책감, 죄책감의 근원에 있는 수치, 수치의 바닥에 깔린 멜랑콜리, 멜랑콜리를 일으키는 공포, 공포스런 장난감, 장난감의 우스꽝스러움, 우스꽝스러움의 영묘함, 영묘함의 공허함, 공허 속의 슬픔, 그리고 슬픔을 유발한 갈망까지, 모턴은 그 끝에서 역설적으로 즐거움(The Joy)에 도달한다. 이 즐거움은 "에로틱"(274)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이질적인 "존재자들 사이의 결속이 강화되는 "세포적" 경험"(279)이기 때문이다. 에코그노시스는 궁극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쾌락적 과정이자, 인간과 비인간을 끊임없이 맞춰 나가는 조율(attunement)의 윤리적 과정이자, 저월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생태적 알아차림은 부정적이고 기묘하기 이를 데 없지만, 우리는 그 기묘함 속에서 웃을 수 있다. 즐겁기 때문이다.

<어두운 생태학>은 그 제목에 걸맞게 어두운 책이다. 난해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재미있는 책이란 말이다. 인류세나 신유물론 등 동시대의 문제를 다루는 공부를 해온 입장에서 어두움 외에도 강조하고 싶은 책의 미덕이 있다. 일단 '인류세'나 '인간중심주의'를 운운하고 싶다면 우선 차크라바르티를 읽은 뒤에 모턴을 읽으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어두운 생태학>의 1장은 인류세에 대한 정밀하고도 흥미로운 분석을 보여주고 있다. 모턴은 여러 피상적인 오해에 맞서 인류세 개념의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핵심은 인류세가 인간종의 낯선 고리라는 것이다. 인류세에 인간은 돌아오지만, 인류라는 비인간적인 초-객체(hyper-object)로서 돌아온다. 인류세의 주요 이론가인 차크라바르티는 아마도 이러한 모턴의 논의에 동의할 것이다. 인류세 자체가 "유독한 악몽 형태에서의 '자연'"이며 "'자연'은 재앙으로 출현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인류세의 잠재적 형태"라는 서술은 날카롭다 못해 통쾌하기까지 하다.

<어두운 생태학>은 또한 소위 신유물론과 OOO의 만남에 대해 많은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다. 그레이엄 하먼은 신유물론과 자신의 OOO를 사사건건 대조하면서 OOO를 '비유물론'으로 정식화한 바 있다. 나 또한 이 때문에 신유물론과 OOO, 사변적 실재론 등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모턴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 견해를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턴은 명시적으로 말한다. "사물은 "살아 있습니다(alive). 혹은 오히려, "살아있음"은 생명-무생물의 경계를 초월한 반짝거림의 작은 영역입니다."(193) 그는 명시적으로 베넷을 인용한다. "쓰레기처럼 보였던 것은 제인 베넷이 그 자신의 생동적 삶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는 객체들입니다."(260) 모턴이 말하는 객체의 살아 있음은 내가 이해해온 물질의 행위성과 다르지 않았다. 물질의 행위성을 행위성으로 만드는 것은 의도나 지향성이 아니라 일말의 놀라움, 의외성, 제어의 곤란함이다. 라투르가 중립적으로 놀라움이라고 부른 것을 모튼은 직접적으로 기묘함, 낯섦, 어둠이라고 부른다. 모턴의 OOO는 물질, 사물, 비인간의 행위성이 가진 기묘하고 어두운 측면들을 독창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신유물론에 대한 속류화된 캐리커쳐를 교정하는 효과를 가진다. 물질의 행위성이란 능동적이기보다는 차라리 기묘하고 낯선 것이다. 복합위기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물질과 사물의 기묘함과 어둠, 즉 그것의 '생태학'에 대한 자각일 것이다. 브라이도티는 과타리를 참조한 것이 분명한 에코소피(ecosophy)를 강조하는데, 나에게는 에코소피가 모턴이 말하는 에코그노시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이러한 신유물론의 생태학적 사유들을 '유물론적 재주술화(materialist re-enchantment)'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모턴과 라투르, 해러웨이, 바라드와의 수많은 교차점을 잡아낼 수 있다. 이 모든 교차점에도 불구하고, 모턴의 가장 큰 기여는 에코그노시스를 통해 신유물론의 생태학적 사유와 성공적으로 공명하면서도 그 부정적이고 정동적인 계기들을 세밀하게 파고들어 어둡고 기묘한 즐거움을 발견해낸다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올해 1월에 기묘함과 어두움의 영화적 현현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 린치가 죽었다. 린치의 영화에 기이한 쾌락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어두운 생태학이 린치적 생태학이라면, 생태적 알아차림은 린치적 명상일 것이다. 복합위기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쩌면 사물을, 물질을 린치의 영화를 보듯이 경험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경험의 중심에서, 저월의 끝에서 즐거움에 미쳐 날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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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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