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대통령이 전시가 아닌 평시에 계엄을 선포하고 헌법기관인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의 권능 행사를 막기 위해 계엄군을 투입했다. 국민들은 뜬 눈으로 밤을 새웠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위력'(전두환·노태우 신군부 내란 혐의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었다.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 행위는 "사법 심사 대상이 되지 않는 통치 행위"(12.12 담화문)이며 12.3 계엄은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2.25 최종 의견진술)라고 주장했지만, 계엄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결국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으로, 윤석열 정권은 집권 1060일 만에 막을 내렸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 명예교수는 윤석열의 계엄 선포 30여 분 만에 이번 사태를 '대통령의 헌법 파괴'로 규정하는 글을 온라인상에 올렸다. 그는 12.3 비상계엄이 △전시·사변에 준하는 계엄의 요건이 성립되지 않았으며 △의원의 국회 출입을 막으면 그 자체로 내란죄일 뿐 아니라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탄핵 사유에 해당한다고 짚었다.
그의 주장대로, 헌재는 123일 뒤 "(윤석열의 계엄 선포) 행위는 법치국가 원리와 민주국가 원리의 기본 원칙들을 위반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헌법질서를 침해하고 민주공화정의 안정성에 심각한 위해를 끼쳤다"며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했다.
한 교수는 헌재의 윤석열 파면 선고를 겨울 공화국이 끝나고 봄의 도래를 알리는 '팡파르'에 비유하며 헌재의 선고요지와 결정문은 전 국민의 헌법 교재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고 평가했다. 피청구인 윤석열이 계엄 선포 후 쏟아낸 말은 위헌·위법 행위에 대한 사실상 '자백'이었다며 그런 자백이 결국 '파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고도 했다.
한 교수는 윤석열과 검찰의 관계를 '머리'와 '몸통'으로 보고, 윤석열이 전횡을 부릴 수 있게 한 원천으로 검찰을 지목했다. 이어 검찰이 법원의 윤석열 구속취소 결정에 즉시항고를 포기함으로써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며 "한 사람을 위한 제왕적 법 적용"에 "경악스럽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검찰'이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수사에 의지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한 교수와는 지난 7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만났다. 그와의 인터뷰를 상(上)·하(下) 두 편으로 나눠 전한다.

"헌재 선고 22분, 전 국민 헌법 교육의 시간이었다"
프레시안 :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주문이 나오는 순간, 어떤 기분이었나.
한인섭 : 안개와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추면서 겨울에서 봄으로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았다. 온 천지에 봄의 꽃들이 한꺼번에 터진 듯 환희가 느껴졌다. 윤석열의 계엄 사태가 '겨울 공화국'이었다면, 헌재의 파면 선고는 봄의 도래를 알리는 팡파르였다.
프레시안 : 헌재의 선고요지를 두고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한인섭 : 문형배 헌재 소장 권한대행이 선고요지를 22분간 낭독했는데, 국회 탄핵소추의 적법성 여부, 탄핵심판 쟁점별 정리, 윤석열 측의 반론 소개, 반론에 대한 정문일침(頂門一鍼) 등 어려운 법률 용어나 개념을 쓰지 않고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전달했다.
전 국민의 헌법 교육 시간이었다. 민주주의, 정당, 여야 갈등, 대통령의 역할, 행정부와 국회의 관계 등을 예시를 들어가면서 하나하나 설명했기 때문에 결정문은 국민 전체를 위한 헌법 교재로도 손색이 없다.
윤석열 탄핵 반대 측도 선고요지를 청취하면서 많은 억측이 용해(溶解)됐을 것이다. 헌재의 결정은 갈등을 더 심화할 수도 있고 완화할 수도 있는데, 선고 후 갈등 요인이 증폭되지 않고 오히려 갈등의 수위가 가라앉았다. 헌재의 선고 후 충돌이나 대치도 없었다.
좋은 의미의 '법'은 전쟁을 평화로 만드는 것이다. 헌재가 전면적 갈등 상황을 법이라는 매개를 통해 평화적 과정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모멘텀(momentum)을 제공했기 때문에,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고 평가한 것이다.

프레시안 : 헌재의 결정문은 100쪽이 넘는다. 결정문을 작성한 후에 국민들에게 전달할 요지를 22분 분량으로 간추렸을 것 같은데….
한인섭 : 재판관 여덟 명이 '국민이 주인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작성했을 것이다. 그 주인은 각계각층의 국민들이고, 남녀노소 모두를 포괄하고, 개개인의 취향·지식·관심도 다양하다. 국민은 단일체가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체 아닌가. 이런 국민을 앞에 두고 어떻게 소통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재판관 8인' 모두 전문가다. 그래서 파면 결정에 걸맞은 방식으로 대국민 해설을 했다고 생각한다.
결정문과 선고요지는 국민만큼이나 다양한 가치와 의견을 지난 8인이 치열한 논의 끝에 하나의 흐름으로 녹여낸 것이다. '8대 0' 전원일치 파면 결정이 나왔다고, 전원일치가 단일 의견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다른 가치, 다른 의견, 다른 선호가 어떻게 하나의 흐름으로 멜팅(melting)됐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윤석열 탄핵 사건의 주심이었던 정형식 재판관이 역할을 많이 했겠지만, 결정문은 1인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8인이 여러 방식으로 관여하고 검토한 집단 창작물이다. 또 재판관들을 뒷받침해 주는 헌법연구관들의 노력과 노무현·박근혜 탄핵 등이 축적된 산물이다.
프레시안 : "대한국민"이라는 표현을 쓴 점,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인용한 점 등이 눈에 띈다.
한인섭 : 헌법 전문(前文)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라고 나와 있다. 제일 상위법인 헌법만 이런 전문을 갖고 있다. 그래서 결정문에 "대한국민"이라는 주어를 쓴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
그리고 100쪽에 이르는 결정문의 '결론'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제1조 제1항)"로 시작한다. 대통령 탄핵심판이라고 하는 그 어려운 재판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선언과 다름없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은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라는 선언을 한 뒤에, 비로소 대통령이 된다. 수호(守護)가 아니가 준수(遵守)다. 즉, 헌법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도 취임할 때 국민 앞에서 국민을 향해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선서했다. 이 선서를 어기면, 헌법을 위배하는 것이 되고 대통령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헌재 선고 지연, 법원·검찰의 제왕적 법 적용 때문"
프레시안 : 비상계엄 선포 직후부터 페이스북에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을 정리해서 올리고 있다. 헌재 파면 선고 이후에도 결정문을 분석해서 설명해주고 있는데, 결정문이 헌법 교재라면 한 교수의 페이스북 글은 해설서 같다.
한인섭 : 법학자로서 헌법과 형사법에 대한 지식도 있지만 박정희의 계엄령 시대를 산 경험도 녹아있는 해설서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총 네 번의 계엄(5.16 쿠데타, 6.3 항쟁, 10월 유신, 부마항쟁 등)을 선포했고, 이 중 세 번째 계엄령이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까지 이어졌다. '77학번'으로 긴급조치 시기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긴급조치는 상시 계엄령 비슷하다. 그리고 계엄의 한복판에서 졸업했다. 이후 교수로 학문의 길을 걷다 정년을 앞둔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이 선포됐다. 39년 강의를 종강하는 날이었는데 바로 그날 계엄이 선포됐다. 개인적으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도 없었고 학자로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밤중 선포된 계엄에, 사람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페이스북에 '대통령의 헌법 파괴'라는 제목으로 윤 전 대통령의 위헌·위법 행위를 정리해 올렸다. 법적으로 방향을 딱 짚을 필요가 있다는 절박한 생각으로, 각오하고 결단해서 쓴 글이다.
그 다음에는 윤 전 대통령의 계엄과 내란죄 상관관계에 있어서,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행위가 내란죄가 되는가'라는 의문에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에 대한 내란죄 처벌을 명시한 '형법 87조'와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국회·선거관리위원 등)을 강압해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국헌문란으로 정의한 '형법 91조'를 근거로 제시했다.
특히 형법 91조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이례적인 내용들인데,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 대통령이 국회를 강압하고 침탈한 역사가 있었고, 국회에서 이듬해 형법을 만들면서 그 교훈을 조문으로 만든 것이다.(부산 정치 파동은 한국전쟁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1952년 5월 25일 계엄령 선포 후 야당을 압박해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한 사건이다. 편집자.)
헌재도 윤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국가긴급권 남용으로 봤다. 결정문의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 재현'이라는 소제에서 부산 정치 파동을 언급한 뒤 "피청구인은 마지막 계엄이 선포된 때부터 약 45년이 지난 2024. 12. 3. 또다시 정치적 목적으로 이 사건 계엄을 선포함으로써 국가긴급권을 남용했다"고 지적했다.

프레시안 : 윤석열의 명백한 위헌·위법 행위에도 헌재의 선고가 늦어진 이유는 뭘까.
한인섭 : 지난해 12월 3일 22시 30분에 선포된 계엄이 4일 오전 4시쯤에 해제됐다. 그리고 12월 7일 국회에서 표결이 한 차례 실패하고, 14일에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의결됐다. 윤석열은 계엄 선포 열흘 만에 탄핵 심판대에 서게 된 것이다. 굉장히 빠른 속도다. 이때만 해도 올해 2월 중순이나 하순쯤 탄핵심판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윤석열 탄핵은 박근혜 탄핵과 달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재의 변론 종결 11일 만에 파면 선고가 나왔다. 윤석열 측은 법 전문가 집단을 동원해 탄핵심판을 방어했으며, 경찰·검찰·군대에 대한 영향력을 강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온갖 술수, 사변, 궤변도 모자라 절차적 문제까지 거론하며 변론을 2월 25일까지 끌었다.
2월 25일부터 2주 정도는 헌재의 심리 시간이라고 본다. 그래서 3월 14일 정도면 충분히 결정할 수 있다고 봤고, 아무리 늦어도 21일 정도면 선고가 날 것으로 기대하며 인내했다. 그런데 대역풍이라고 할까. 윤석열이 3월 7~8일 갑자기 석방돼 나왔다. 구속취소 상황이 아닌데, 법원이 날이 아닌 시간 단위로 계산해서 구속취소를 했다. 또 검찰은 이 문제에 대해 즉시항고하지 않았다.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는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법 적용, 그야말로 '제왕적 법 적용'을 한 것이다. 검찰이나 법원이나, 이전까지 어떤 경우에도 시·분 단위로 구속기간을 산출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탄핵반대 세력의 기세가 엄청 올라갔다.
전체적으로 불안감과 위기감이 커졌다. 동시에 국민들은 근본적인 의문을 가졌다. '왜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재판관 8인에게 '제발 탄핵해 주세요'라고 애원해야 하지?', '국회의 3분의 2 찬성으로 탄핵소추됐는데 왜 재판관 여덟 명이 최종 판단을 해야 하는 거지? 국민의 대표성도 없는데?' 등. 대통령 탄핵의 진짜 주역은 국민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탄핵은 전문가의 판단과 국민의 판단이 일치해야 한다. 노무현 탄핵 당시에는 헌재의 선고가 나오기 전 치러진 17대 총선(2004년 4월 15일)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 국민들이 '탄핵은 잘못 됐다'고 심판했다. 박근혜 탄핵의 경우 17대 총선(2016년 4월 13일)에서 여소야대가 된 이후 줄곧 '박근혜 탄핵' 주장이 나왔기 때문에 헌재가 그에 부응했다. 윤석열 탄핵도 헌재가 국민의 뜻에 맞춰 파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윤석열의 헌재 의견진술, '파면' 부메랑 됐다"
프레시안 : 윤석열 전 대통령은 탄핵 심판대에 선 전직 두 대통령과 달리 직접 헌재에 출석해 의견진술을 했다. 최종 의견진술에서는 67분간 준비해 온 원고를 읽었는데, 어떻게 봤나.
한인섭 : 탄핵 사건 피청구인 혹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 피의자 윤석열의 말은, 헌재에서나 TV에서나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의 내심, 성향, 기질 등이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헌재나 국민이 판단을 내리기가 결과적으로 좋았다. 통상 재판에서는 당사자(피의자, 피고인, 피청구인)가 말을 적게 할수록 좋다고 한다. 판사 출신인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국회에서조차 증언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나.
그런데 윤 전 대통령은 계속 이야기했다. 피청구인(피의자)의 주관적 내심(內心·속마음)을 입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윤 전 대통령은 스스로 발설했다. 법조인들은 야당 폭거와 선관위의 부정 때문에 계엄을 선포했다는 윤 전 대통령의 주장을 '계엄 선포의 헌법적 사유가 없다'는 자백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헌법 77조에 '대통령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이 계엄 선포 이후에 한 모든 말은 부메랑이 돼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자신의 지지자를 향한 정치적 효과는 있었을 테지만….
프레시안 : 윤석열 측 대리인인 김계리 변호사가 "난 계몽됐다"고 얘기한 것만 봐도 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한인섭 : '계몽(啓蒙)', 한자 뜻이 '열 계(啓)'에 '어두울 몽(蒙)'이다. 어둠을 깨친다는 의미다. 상대방을 계몽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계몽됐다'는 말은 '흑화(黑化)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거짓 뉴스, 가짜 프레임에 빠져 들어갔다. 흑화했다'라는 간접 고백인 셈이다.
프레시안 : 윤석열 전 대통령은 계엄 선포 배경으로 거대 야당의 '폭거'를 주장하며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고 항변했다.
한인섭 :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임기 내내 여소야대 상황이었다. 장상·장대환 등 국무총리 인준안이 번번이 부결되기도 했다. 그래서 야당이 반대할 명분이 없는 사람을 찾았고, 그가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김석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적인 고려 끝에 초기 비서실장으로 경북 출신의 김중권을 임명했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리는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그 시절 이회창 한나라당 야당 총재에게 매일 문안인사를 했다고 하지 않나.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당 존중을 이렇게 해야 한다.
정치 지도자의 민주적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야당과 언론의 비판에 귀 기울이고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윤석열 전 대통령은 민주적 요소가 전혀 없었다. 대통령 선거 외에는 민주적 과정으로 권력을 쥔 경험이 없다. 특수부 검찰을 통해 상대를 사냥하듯 수사에만 열을 올렸다. 상대와 공존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걸 배운 바가 없다.
야당 대표와는 취임 17개월 만에 처음으로 대화했고, 국회 개원식과 예산안 시정 연설에 불참하는 등 기록을 새로 썼다.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도 195일 만에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종합적으로 민주적 리더십이 가장 없는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을 뽑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를 이끌 역량을 갖췄는지 종합적인 테스트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윤 전 대통령에겐 그런 시험이 거의 생략됐다. 결국 국민이 대통령을 잘못 뽑은 것이다. 리더의 성격·기질·행태 이런 부분을 두루 꿰뚫고 판단하는 국민적 안목이 부족했다고 봐야 한다.

프레시안 : 세 번의 대통령 탄핵 중 한 번은 기각됐고 두 번은 인용됐다. 일각에서는 잇단 탄핵에 대한 대내외적 불확실성을 문제 삼기도 한다.
한인섭 : 국민적 피로감이니 정치 혼란을 자주 지적하는데, 내 생각은 반대다.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가. 국민이다. 주인인 국민의 뜻에 따르지 않는 대통령은 언제든지 탄핵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권한남용·전횡·독선·오만·독재로 점철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탄핵은 국민이 대통령에게 '당신은 주인이 아니야. 국민이 주인이야. 당신은 언제나 국민의 뜻을 생각하고 존중해야 해. 국민을 모시고 살아야 해'를 알려주는 것이다. 앞으로도 대통령 탄핵은 또 나올 수 있다. 탄핵에 따른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 국민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국민의 경고가 일상화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프레시안 : 윤석열 탄핵심판 과정에서 탄핵 찬성과 반대라는 분열 양상이 두드러졌다. 양극화된 사회에 대한 해법이 있을까.
한인섭 : 전광훈 목사가 매주 광화문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탄핵 반대 세력을 이끌었다. '국민 저항권'을 내세우는 등 부작용이 많았다. 다만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광장에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언어의 싸움, 마이크·확성기의 싸움, 유튜버 간 싸움, 돈과 쩐의 싸움 등 의사를 표출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민주주의는 각각이 가진 대표성이 있기 때문에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표출을 억지로 막을 이유는 없다.
광장의 소란을 줄이는 제도적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 주말마다 광장에서 소리를 지르는 대신 이해관계집단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성을 확보해야 한다. 광장 정치와 의회 정치의 일치성을 위해 국회의 대표성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 무척 어렵고 지난한 일이지만, 정치권이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다. (하(下)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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