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선고로 12.3 계엄령 선포 이후 수개월간 이어진 혼란이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한 대선 일정이 시작됐다.
당연한 절차지만 이번 내란사태가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은 그것이 단순한 정권교체 이상이기를 요구할 정도로 심대하다. 시민혁명을 이끌었던 '비상행동'이 대통령의 탄핵과 대선을 넘어서 국가개조에 버금가는 사회 대개혁을 외쳐왔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검찰독재와 내란사태를 배태해 온 사회구조에 대한 일대 혁신이 없고서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구현할 수 없거니와, 이 시련을 계기로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서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혹한을 무릅쓰고 광장을 지킨 시민들의 열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의 복원과 경제의 회복이 시급한 것은 물론이지만, 새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과 함께 그릇된 풍토와 구조를 혁파하는 민주화가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요한 영역으로 대학 문제가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내란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도 일각에서 새 사회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교육개혁도 그 가운데 하나로 거론돼 왔다. '비상행동'의 사회 대개혁 과제에도 '교육 불평등 해소'가 11개 항목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 바 있다.
교육 일반보다 대학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대학이 학령인구의 감소로 대규모 구조조정 와중에 있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대학 체제 자체가 과열된 대학입시 경쟁을 유발하고 수도권 중심으로 서열화돼 있어 초중등 교육의 근간을 흔들 정도의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문제는 한국 교육의 문제들을 수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주요 의제들과 불가피하게 결합해 있다. 대학 문제가 국가의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초저출생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의 주된 원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2002년부터 진작 초저출산국에 접어든 후 2024년 합계출산율 0.75를 기록했다. 이같은 급격한 출산율 저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뿐더러 이 추세가 지속되면 나라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인구학자들의 암울한 예상이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이 위기를 인식한 정부도 2016년 대통령 직속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설치해 15년간 약 280조의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부었음에도 오히려 상황은 갈수록 악화해왔다. 육아와 보육에 대한 지원 등이 정책의 중심이었으나 대실패로 귀결됐고, 극도로 경쟁적인 사회 풍토가 젊은 세대로 하여금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기피하게 하고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경쟁을 부추기는 국가 정책을 고수하면서 저출 추세를 막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그 뒷받침이 되는 기득권 구조를 해체하지 못하는 한 국가 존망의 위기는 더 심화할 것이다.

청년 세대가 우리 사회의 극심한 경쟁적 성격을 체감하는 공통적인 원천이 그들이 성장기에 겪은 과열된 대학 입시경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런 경쟁을 낳은 원인이 수도권 중심으로 구조화된 대학 서열 체제와 이에 기반한 소위 일류대 중심주의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의 젊은 세대는 10대에는 성적 위주의 교육을 받으며 입시경쟁에 내몰리고, 20대에는 서열화된 대학 체제 속에서 일자리 경쟁에 뛰어들고, 30대에 이르면 일부 예외를 제외한 대다수에게는 사회 속에서의 생존 자체가 절박한 문제가 되면서 결혼과 출산은 뒷전이 된다. 망국적인 대학의 서열체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는 진작부터 있었지만, 역대 정부가 이 체제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고수한 끝에 나라 전체가 지금의 위기국면에 처했다.
구조조정이 대폭 진행되고 있는 대학의 상황도 이와 유사하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지방대 소멸 위험이 거론되고 이에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지 십수 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어떤 점에서 대학의 구조조정은 그동안의 한국 대학의 병폐인 대학 서열을 완화하고 사립대 중심 체제를 공공적 고등교육 체제로 전환할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대 정부는 대학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목 아래 기존의 서열에 입각한 이른바 '선택과 집중' 정책을 기조로 하여, 국가예산을 세칭 일류대에 몰아주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대로라면 10년 후면 지방대는 몇몇 국립대만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폐교될 것이다. 대학과 지역에 몰아닥칠 이같은 재앙은 인구감소로 인한 국가 전체의 쇠퇴 현상과 궤를 같이한다.
기혼 여성의 출산중단 이유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과중한 자녀교육비며 그 대부분이 사교육비 부담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난 3월 13일 교육부가 발표한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사교육비는 전년도에 비해 7.7% 증가한 총 29조2000억원이고 참여율은 학생 전체의 80%에 이른다. 또 사교육을 받는 목적의 90% 가까이가 학교수업 보충, 선행학습 및 진학준비 등 성적향상을 통한 일류대 진학에 있다. 교육부는 이 조사의 목적이 "사교육비 경감대책 및 공교육 내실화 등 교육정책 추진에 활용"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서열체제를 강화하고 일류대에 혜택을 몰아주는 현재의 교육정책 방향이 이와 역행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같은 추세를 역전시킬 방법은 없는 것인가? 많은 이들이 우리 현실에서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난망하다고 하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 들어설 정부가 1994년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대개혁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적인 경쟁 중심의 대학정책을 폐기하고, 공공성과 다양성에 입각한 새로운 정책 기조를 세우고 실천하기만 하면 활로가 열린다. 30년간 지속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가 오늘날의 위기 상황을 낳았다면 지금이야말로 정책 기조의 일대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작년 한국은행에서조차 대학입시 과열현상을 한국사회의 저출생 및 지역소멸이라는 국가적 위기의 요인이라고 분석하고 수도권의 상위권 대학들을 대상으로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제안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명목상의 공정성을 앞세운 서열체제로 인한 불평등 구조가 한국 자본주의의 정상적 작동조차 저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서울의 일부 상위권 대학의 입학정원을 지역별 학령인구비율을 반영하여 선발한다는 것이 이 제도의 핵심이다. 한국은행의 이 제안은 해당 대학들의 거부반응으로 찻잔 속의 태풍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만약 새로운 정부에서 이같은 취지의 '적극적 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를 시행하고자 한다면 현행 입시제도 속에서도 그것이 구현될 수 있다. 가령 10% 정도에 머무는 사회통합전형 즉 지역균형선발과 기회균형선발의 비율을 대폭 확대하면, 서울 특히 강남지역 출신의 과다한 일류대 입학 비율을 줄이고 지역별 계층별로 다양한 합격자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진 정원할당제(quota)를 토대로 하는 강력한 '적극적 시정조치'를 시행할 수도 있다. 예컨대 해외의 경우 남아공, 브라질, 인도 등은 자국을 대표하는 상위권 대학들의 입학정원 50%를 하층계급이나 유색인종 혹은 빈곤층에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시행해왔다.
물론 입시제도의 변화만으로는 수도권 중심의 서열 체제가 해소될 수 없다. 이 체제를 완화할 수 있는 총체적인 대학 정책이 동반되어야 한다. 새로 수립될 정부는 시장주의적 경쟁의 원리 대신 대학 체제를 공공적 관점에서 개편하는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 정부가 저출생과 지방소멸이라는 국가위기 국면이 대학 체제의 왜곡성과 결합돼 있다는 인식만 있다면, 구체적 개혁 방안은 나오기 마련이다.
전국의 대학들을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3분 체제를 원용하여 연구중심, 교육중심, 기술교육 중심으로 나누는 것도 유력한 방안이다, 이를 통해 지금의 일률적인 평가기준에 따른 지방대나 전문대의 일방적인 퇴출을 막고 각 대학의 특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학을 재편할 수 있다.
일류대로 일컬어지는 수도권 대형 대학들은 연구중심대학으로 특성화해 학부 정원을 줄이는 대신 대학원 중심으로 개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해당 대학의 국제 경쟁력을 키우는 동시에 구조조정에서 수도권 대학의 정원을 줄이는 난제도 해결할 수 있다. 아울러 위기에 처한 전문대는 기술교육을 국가 책임으로 하는 서구대학의 모형에 따라 대부분을 무상교육이 가능한 국립으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
이와 같은 체제 개편이 서열 체제에 안주하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초래할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개혁 의지가 있는 지도자라면 대학 문제의 해결이 인구감소가 초래할 국가위기 극복의 요건이라는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내란 사태의 혼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20, 30대를 주축으로 하는 청년 세대의 주체적인 참여가 두드러졌음을 우리는 봐왔다. 국회 앞 여의도광장에서, 남태령에서, 그리고 광화문에서 우리는 청년 세대가 노동자 농민 등 민중들과 결합하여 내란세력의 준동을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시민 주체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훈련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오늘날의 청년 세대가 과거와 같은 정치의식 없이 경쟁풍토에 익숙한 이기주의적 성향을 보인다는 편견은 이 사태를 겪으며 무너졌다. 이 청년 세대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대학이라는 제도를 변화시키는 일은 그들이 주체가 되어 열어갈 우리 사회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대학 문제가 새 정부에서 중요한 국가적 의제 가운데 하나여야 하는 당위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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